* * *
관산호는 정오를 넘긴 지난 시간에 의창의 중심가인 남문대로를 강예령과 함께 걷고 있었다.
폭 십여 장에 달하는 잘 다져진 길을 두고 그 양옆에 수백여 개의 상점이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령아, 아직 멀었냐?"
관산호는 오른쪽에서 걷고 있는 강예령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서 심드렁한 기색을 읽은 강예령의 눈매가 샐쭉해졌다.
"왜? 힘들어, 오빠?"
강예령의 말투에 날이 선 기색을 읽은 관산호는 뜨끔한 표정으로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도 다른 남자 애들처럼 물건을 사러 돌아다니는 것에는 별 취미가 없었고 지루해했다.
오늘도 강예령이 남문대로 부근에서 우연히 본 노리개를 사달라고 졸라서 나오긴 했지만 내켜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강예령에게 내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강예령은 막내인 데다 딸이고 태어나면서부터 엄마 없이 자랐기에 강풍양은 물론이고 강천기와 관산호도 그녀를 끔찍하게 아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렇게 주변에서 늘 어여쁨만 받으며 자란 탓에 자기 중심적인 면이 있어서 토라지면 감당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 열세 살의 아이였다.
물론 관산호와 한 살 차이에 불과했지만.
"힘들기는, 네가 다리 아프지 않나 염려돼서 물어본 것뿐이야."
"정말?"
"그럼, 그럼!"
관산호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강예령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이제 오십 장 정도만 더 가면 돼. 그 노리개, 정말 예뻤단 말이야."
강예령은 생각만 해도 설렌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 모습에 관산호는 피식 웃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예쁘다고 하니 예쁘겠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은 관산호가 강예령을 따라 오십여 장 정도를 걷자 제대로 된 상점 거리가 끝이 나고 임시로 가판을 차려 물건을 파는 노점들이 나타났다.
강예령은 망설이지 않고 오른쪽 노점상 중 한곳을 향해 걸어갔다.
노점상은 사십대 중반쯤 된 중년 여인이었다.
그녀는 평범한 얼굴에 푸짐한 몸매의 소유자였는데, 여인네들의 장신구와 노리개를 파는 사람이어서인지 푸른색과 붉은색이 섞인 화려한 옷을 입고 있어 주변의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관산호는 여인이 입고 있는 옷의 재질이 보기와는 달리 그리 좋지 않은 하품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철사보는 호북성 남부에서 가장 강력한 무림문파임과 동시에 가장 부유한 세가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팔 년을 보낸 그의 안목이 평범할 수는 없었다.
여인은 길이 넉 자에 폭 두 자쯤의 가판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는데 가판에는 백여 개가 넘어 보이는 여인네들의 장신구와 노리개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아주머니, 제가 어제 본 노리개 아직도 있죠?"
급하게 다가온 강예령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여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제 온 아가씨군요? 물론이에요. 오늘 꼭 온다고 해서 따로 보관해 놓았어요."
여인은 호들갑스러운 어조로 강예령에게 대답하며 앞에 놓인 가판의 아래쪽을 뒤져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노리개 한 쌍을 꺼냈다.
은은한 자색을 발하는 노리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잎이 만개한 형태였고, 예닐곱 치 길이의 오색 수실이 달려 있었다.
강예령의 뒤에 서서 물끄러미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관산호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꺼낸 노리개는 주변에서 귀한 노리개들을 수없이 보고 자란 강예령이 그를 졸라 사러 올 만큼 세공이 잘된 것이었다.
여인이 건네주는 노리개를 받아 든 강예령이 관산호를 돌아보았다.
그를 데리고 나온 목적이 계산을 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그녀의 눈빛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는 자명한 일.
관산호는 소리없이 웃으며 품에서 전낭을 꺼내 동전 이십 문을 노점상 여인에게 건넸다.
노리개 값은 생각 외로 쌌다.
"동생이 이십 문이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공자님."
말과 함께 여인이 동전을 냉큼 가져가는 것을 보곤 관산호가 지나가는 어투로 물었다.
"그런데 이 노리개는 누가 만든 겁니까?"
그의 질문을 받은 여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왜 그러시나요, 공자님?"
"별것은 아닙니다. 가판에 있는 것과는 세공이 많이 다른 것 같아서 궁금증이 일었을 뿐입니다."
"눈매가 예리하네요."
여인은 조금 감탄한 눈빛으로 관산호를 보며 말했다.
겉보기에는 덩치만 커다란 소년인데 눈썰미가 보통이 넘었기 때문이다.
여인은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그들을 주목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관산호에게 말했다.
"사실은 우리 바깥양반이 일 때문에 하남성을 다녀오던 길에 우연히 손에 넣은 것이에요."
"세공이 특별할 만큼 좋은데 너무 싸게 내놓은 게 아닙니까?"
"호호호, 어린 공자님은 물건 값이 싼 것도 불만인 모양이네요."
푸짐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관산호의 말을 받은 여인은 말을 이었다.
"공자님 말씀처럼 그 노리개는 세공이 잘된 것이긴 하지만 귀한 보석을 사용한 것이 아니어서 크게 높은 값을 받을 수 없는 거예요. 사실 다섯 문 정도는 더 받을 수 있는 물건이지만 어린 아가씨가 너무 예뻐서 싸게 받은 것이죠."
여인의 말을 들은 관산호는 여인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그의 태도를 본 여인의 눈이 반짝였다.
얼핏 보아도 귀한 집 자제 같은 몸가짐과 옷차림을 하고 있는 관산호와 강예령이었다.
가풍이 엄격한 집안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관산호 정도의 나이에 저런 말투를 쓰지 않는다.
그리고 외견상 보았을 때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노점을 하는 일개 서민층 여인에게 고개를 숙일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소년이었기에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호호호, 별말씀을. 보는 눈이 있는 사람에게 물건이 갔으니 제 주인 찾아간 것이라고 생각하면 저도 기분 좋은 일이에요."
여인과 대화를 마친 관산호는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며 좋아하는 강예령을 데리고 몸을 돌렸다.
그들이 왔던 길을 이 장 정도 되돌아갔을 때였다.
"공자님, 잠깐만!"
노점상 여인이 부르는 소리에 관산호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가 의아해하는 눈길로 돌아보자 여인이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여인에게 되돌아간 관산호는 궁금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인은 조금 멋쩍어하는 빛과 기대의 빛이 섞인 눈빛으로 관산호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바깥양반이 주운 물건은 그 노리개만 있는 것이 아닌데 혹시 공자님이 관심을 갖지 않을까 싶어서요."
"노리개라면 저는 됐습니다."
"노리개가 아니에요. 제가 설마 여인네들 물건으로 공자님을 불렀을까요. 귀해 보이긴 해도 조금 이상한 물건인데……."
그녀의 말에 관산호의 눈빛이 반짝였다.
노리개의 세공 솜씨는 범상치 않았다.
그와 같이 있었던 물건이라면 같은 등급의 물건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관심이 안 생길 수 없는 일이다.
"제가 일단 그것을 보아야 뭐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만……."
"물론이죠."
여인은 관산호의 생각이 바뀔까 무서운 듯 서둘러 가판의 아래쪽에서 회색의 천으로 둘둘 만 물건 하나를 꺼내 놓더니 천을 풀었다.
펼쳐진 천 위에 놓인 물건을 본 관산호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천 위에는 노리개와 마찬가지로 은은한 자색을 발하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팔각형 패가 놓여 있었다.
도사들이 사용한다는 팔괘 패와 형태가 비슷한 듯했지만 패의 어디에도 팔괘의 문양은 새겨져 있지 않았다.
패의 표면은 대패로 민 듯 반듯했고, 여덟 개의 각은 예리하게 꺾여 있었다.
패의 외견은 귀해 보이는 자색을 제외한다면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패를 보는 관산호는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두근두근두근.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율이 그의 등골을 타고 전신을 흘러내렸다.
잠시 말을 잃고 패를 뚫어지게 보고만 있는 그가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강예령이 관산호의 오른팔을 잡아 흔들었다.
"오빠, 왜 그래?"
"응?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저 패가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익숙하다고?"
강예령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패와 관산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관산호는 몸을 치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장난감 같은 것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성격이어서 어렸을 때도 장난감을 가지고 논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처음 보는 노리개같이 생긴 패를 익숙하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눌 때 여인은 자색의 패를 다시 천에 둘둘 말았다.
손동작이 빨랐고, 천을 펼쳐 놓을 때도 그녀의 소맷자락은 은연중 패를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차단시키고 있었다.
그 태도는 마치 그 패를 누가 볼까 두려워하는 듯했다.
패를 만 천을 손에 쥔 여인이 관산호에게 물었다.
"공자님, 이 물건을 사 가실 생각이 있나요?"
"사겠습니다. 얼마죠?"
관산호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기대에 찬 얼굴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여인은 환하게 웃었다.
"호호호, 역시 공자님은 보는 눈이 있군요. 아가씨에게 이십 문에 팔았으니 도련님에게도 이십 문에 팔겠어요."
관산호는 흥정도 하지 않고 바로 전낭을 꺼내어 여인에게 이십 문을 건넸다.
여인에게서 패를 건네 받은 관산호의 전신이 다시 한 번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율했다.
'이 느낌은……. 왜 이 물건이 이처럼 익숙한 거지? 그리고 이 떨림은?'
관산호는 자색의 패가 자신에게 주는 느낌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강예령이 다시 관산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오빠,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네? 왜 그래?"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관산호를 보며 물었다.
그녀의 말에 쓴웃음을 지은 관산호가 고개를 흔들어 불현듯 자신을 덮친 정체의 알 수 없는 느낌을 떨쳐 냈다.
집으로 돌아온 관산호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탁자 위에 자색의 패가 놓여 있었고, 그는 벌써 반 시진째 패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 물건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익숙한 듯 느껴지는 걸까?'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패를 보던 관산호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가 반 시진 동안 패를 보며 알게 된 것은 반듯하게 깎여 있는 듯한 패의 표면에 평범한 시력으로는 확인이 가능하지 않은 미세한 선이 무수하게 그어져 있다는 것 정도였다.
너무나도 미세한 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종횡으로 겹쳐 있어서 패의 표면이 매끈하게 보였던 것이다.
손에 든 패를 천장으로 들어올리고 올려다보던 관산호의 두 눈이 한순간 무섭게 빛나며 의자에 기대 늘어져 있던 그의 상체가 퉁기듯이 바로 섰다.
'이건… 창… 룡… 지… 존… 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반복해서 살펴보아도 패의 상단에 그어진 선들은 다섯 개의 글자를 이루고 있었다.
창룡지존부(蒼龍至尊符).
그것이 패에 새겨져 있는 글자였다.
관산호는 처음 패의 표면에 있는 선들이 직선과 곡선이 뒤섞여 있었고, 무질서하면서도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 그 선들을 세월이 흐르며 자연적으로 생긴 흔적으로 보았다.
단지 그 크기가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작다는 것이 조금 특이할 뿐이었다.
하지만 혼천무극진기의 수련으로 얻은 경이로운 시력으로 그중 일부가 글자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지금은 그 선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선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에는 물건에 대한 사전 지식이 너무 없었고, 현재 그가 가진 능력으로는 그 선들의 의미를 추측하는 것도 무리였다.
관산호는 손을 들어 머리 뒤로 깎지를 끼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나도 제정신이 아니지. 처음 보는 물건이 익숙한 느낌이 든다고 이렇게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으니. 그런다고 답이 나올 것도 아닌데.'
관산호는 반 시진의 고민을 떨쳐 버렸다.
그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일단은 그것의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노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깨끗하게 포기하는 성격이었다.
어떤 종류의 일은 시간이 해결해 주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나와 인연이 있는 물건이라면 언젠가는 그 인연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겠지.'
생각에 잠기며 늘어져 있던 관산호의 눈빛이 빛났다.
'그 아주머니를 한 번 더 보아야겠다. 아까는 이것의 느낌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 아주머니에게 이 물건을 주운 정확한 장소가 어딘지 물어보는 것을 잊었다. 내일은 그곳이 어딘지 가서 물어보아야겠다.'
그는 천천히 반쯤 열린 창문 밖으로 하늘을 보았다.
혼천무극진기를 수련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등잔불도 없어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칠흑같이 어두운 방이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어 사람이 머무는 듯 하지 않던 방 안에서 갑자기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아이에게 물건은 전해졌느냐?"
가래가 끓는 듯 탁한 음성은 힘이 담겨 있지 않은 노인의 그것이었다.
"예, 어르신."
노인의 질문에 대답을 한 음성은 노인과는 대조적으로 굵고 힘찬 중년인의 것이었다.
"특별한 것은?"
“그 물건이 범상치 않은 것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인의 말에 대답하던 중년인이 잠시 머뭇거렸다.
“말하거라.”
중년인을 재촉하는 노인의 음성에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그 물건을 보고 익숙하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허허허."
중년인의 대답을 들은 노인의 입에서 홍소가 터져 나왔다.
"그럴 것이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럴 수밖에. 또 그래야 하고. 허허허!"
노인의 웃음소리는 길게 이어졌다.
그 웃음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노인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최대한 빨리 안배를 마칠 수 있도록 노력하거라."
"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네게는 늘 미안하구나. 일의 전말도 알려주지 않은 채 늘 힘든 일만 시키고."
자상하면서도 미안함이 가득 담긴 음성이었다.
"과한 말씀입니다, 어르신. 어르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지도 못할 것입니다. 제가 어르신께서 의도하시는 바를 알지 못한다 해도 천하를 염려하는 어르신의 마음이 얼마나 크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로 족합니다."
"고맙구나."
온화한 노인의 음성이 이어졌다.
"천하의 운명이 그 아이에게 걸려 있음이라……. 최선을 다해야 한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중년인의 작으나 힘찬 대답 소리와 함께 방 안의 인기척은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인기척이 사라져 아무도 없는 듯하던 방 안에 다시금 탁한 노인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대사형……."
그의 음성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