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선물
“살아 계셨네요.”
관산호는 싱긋 웃으며 침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열린 창가의 침상에 누워 들어서는 그를 바라보고 있던 양천록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첫 말치고는 정말 싸가지없구나!”
“흐흐흐, 성격이잖아요. 그런데 수월하게 이기시진 못했나 봐요?”
관산호는 눈으로 양천록의 전신을 훑으며 말했다.
양천록은 상체를 벗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근육을 자랑하던 그의 상체가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왼팔과 상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감은 두터운 붕대가 그의 벗은 몸을 가리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게 다행이야.”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삼십대의 여인이 볼멘소리로 끼어들었다.
눈가에 가는 잔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여인은 대단한 미인으로 성숙함과 우아함에 있어서는 젊은 여인들이 따라오지 못할 듯했다. 그녀는 양천록의 연인, 양천록은 강력하게 부인하지만 스스로 양천록의 처를 자처하는 장연령이었다.
그녀는 관산호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왜 안 왔니? 생일이라서 기다렸는데…….”
서운한 어투다.
관산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일이 있어서 몸을 뺄 수가 없었어요.”
양천록은 말을 하는 관산호의 눈가에 그늘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물었다.
“선친의 유언 때문이냐?”
“예.”
“안 좋은 내용이었나 보구나.”
“안 좋다기보다는…….”
관산호의 말끝이 흐려졌다.
“알 수 있느냐?”
“죄송합니다. 말씀드리기 곤란해요.”
관산호의 대답에 양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사람은 홀로 가슴에 품고 가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혼자서는 어려운 일이고, 타인의 도움을 받으면 쉽게 풀 수 있는 일이라 해도 그 자신이 홀로 풀어야만 하는 종류의 일도 있는 것이다.
세상을 어느 정도 알 만큼 나이를 먹다 보면 저절로 그것을 알게 된다.
관산호는 화제를 바꾸었다.
“청룡방은 해체되었겠네요?”
“물론.”
양천록은 싱긋 웃으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관산호가 장난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아저씨 은퇴하는 건 또 미루어졌군요.”
“이 자식이 심사를 긁으려고 작정을 했나! 말이 이상타!”
말을 하는 양천록의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산호가 맞는 말 하는데 왜 그래요? 당신이 더 이상해요!”
이번에는 장연령이 도끼눈을 뜨고 양천록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양천록이 움찔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험험, 당신은 왜 끼어드는 거야?”
그의 음성은 안으로 감겨 들어갔다.
천하에 거칠 것이 없는 그도 장연령만은 어려워하는 듯했다.
“끼어들 만하니까 끼어들죠. 이제 도방 일은 그만 해도 되잖아요. 내일모레면 오십인 사람이 왜 그 위험한 일을 계속하려고 하느냐구요!”
“아직 마흔셋인데…….”
양천록이 작게 중얼거린 말은 오히려 장연령의 부아를 돋웠다.
그녀의 고운 눈매에 쌍심지가 켜졌다.
“뭐라고요?!”
그녀의 선이 고운 입술 사이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된 고음이 터져 나왔다.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관산호는 피식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두 번 본 모습도 아니고, 겉으로 보기에는 양천록이 장연령의 기세에 주눅이 든 것 같지만 이 싸움에서도 장연령은 결코 양천록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매번 그래왔던 것처럼.
관산호는 두 사람을 보며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사랑싸움에서 항상 지는 사람은 상대를 더욱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연령은 양천록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나이답지 않은 깨달음이었다.
양천록과 장연령의 말다툼은 반 각 정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다.
다툼에 열중했을 때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들은 곧 관산호의 존재를 자각했고, 다툼을 멈추었다.
그들이 시선을 관산호에게 주었을 때까지 관산호는 창밖의 후원에 시선을 둔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깊은 것을 본 장연령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표정이 왜 그러니?”
그녀의 질문에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두 사람에게로 옮긴 관산호가 불쑥 말문을 열었다.
“무공을 익힐 생각입니다.”
“응?”
그의 말에 양천록은 눈을 크게 떴다.
“유언장에 그래도 된다더냐?”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원할 때는 막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의외로구나. 네 선친께서 강 대협에게 그런 유언을 남겼다고 하셔서 난 그 유언장에서도 변함없이 계속 막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양천록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내용은 장연령이 모르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양천록은 그녀가 알아야 할 내용이라면 숨기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이고, 자신을 친형수처럼 따르는 관산호도 그동안 언급한 적이 없는 것이었으니 그녀는 자신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알 필요가 없는 것은 물을 필요도 없다.
다른 경우라면 그녀도 다르게 반응했겠지만 두 사람을 잘 아는 그녀였기에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녀는 열세 살에 기녀가 되어 산전수전 다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사람을 파악하는 데는 도사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여인인 것이다.
“왜 무공을 배우려고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네게 목표가 생겼다니 난 좋게 받아들인다. 내 먹물 먹은 사람들에게 듣기로 공자라는 위인도 열다섯에 뜻을 세웠다는데 너도 열다섯에 뜻을 세웠으니 나중에 공자만큼은 되겠다. 흐흐흐.”
“훗, 아저씨는 너무 대단한 분과 저를 비교하시는군요.”
양천록이 자신을 공자와 비교하는 말을 들은 관산호가 조금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도 사람이고 너도 사람이다. 장래는 누구도 모르는 거 아니냐. 네가 그만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고. 껄껄껄.”
껄껄거리며 웃던 양천록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강 대협의 사사를 할 생각이냐? 그분도 하북무림에서 널리 알려진 고수이시니 무공을 배우려고 한다면 네 여건은 꽤 좋은 편이다. 네게 다행한 일이고.”
말을 하던 양천록의 표정이 뜨악해졌다.
관산호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본 탓이다.
“안 배운다고? 왜?”
“아버님은 강한 분이시지만 그분의 무공을 배워서는 공자만큼 유명해질 수가 없잖아요.”
“뭐?”
양천록과 장연령 두 사람의 얼굴이 멍해졌다.
관산호는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말에 깃든 의미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천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당대에도 성인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무공을 배워 그 정도의 인물이 되려 한다는 관산호의 말은 그의 목표가 광오할 정도로 높고 크다는 뜻이었다.
“흐어…….”
양천록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큼 놀란 때문이었다.
“흐흐흐, 알고 보니 미친놈이었구나. 네놈 배포가 큰 줄은 알았지만 거의 제정신이 아닌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공을 배운 자들 중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대 천하십대고수 중에도 그런 말과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뭐, 그래도 사내자식이 목표를 세웠으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네 목표의 절반만 가도 천하제일은 따놓은 당상이겠다. 흐흐흐.”
관산호를 보는 양천록의 눈은 흐뭇해 보였지만 장연령은 아니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근심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삼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옆에서 관산호를 본 그녀였기에 그가 한번 입 밖에 낸 말은 결코 번복하지 않으며, 한번 결심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행하고야 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관산호를 향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산호야, 내가 일을 하면서 무림인도 적지 않게 상대해 보았다. 그들 중에 작은 명성이라도 얻은 사람은 보통 서른이 넘었다. 이십대에 명성을 얻은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그들은 정말 극소수였어. 그것도 좋은 가문이나 명문의 자제였지. 뿌리가 없는 낭인 중에 어린 나이로 높은 명성을 얻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단다. 그들은 모두 학문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무공이라 쉽게 경지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나같이 말하더구나. 네 뜻이 높은 것은 칭찬할 만하지만 현실성이 결여된 경우에는 자신을 망칠 수도 있단다. 너는 무공을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잖니. 그런데 그런 꿈을 이루려면 무림인들이 흔히 말하는 절세의 기인을 만나거나 천고의 기연이라도 얻어 무공을 익혀야 할 텐데…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나로서는 감이 잡히지가 않는구나.”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관산호는 따스한 눈빛으로 장연령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짧게 끊어지는 말이다.
그의 말을 들은 장연령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관산호가 저런 태도를 보일 때는 이미 결심이 선 상태이다.
관산호는 그 나이로는 생각지 못할 만큼 성격이 진중해서 어떤 일도 즉흥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한번 결정을 하면 결코 남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장연령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성격은 양천록과 비슷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친해진 것이겠지만.
“네가 무공에 관심은 있었어도 꼭 배우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무공을 익혀야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뭐냐? 네 선친의 유언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은 되지만 궁금하다.”
양천록의 질문을 받은 관산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으며 강렬하게 빛났다.
“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무공을 익혀야만 가능한 일이냐?”
“예.”
“다른 방법은 없고?”
“무공을 익히지 않으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입니다.”
“흠… 네가 신중하다는 것은 안다만 너무 이른 판단은 아니냐? 세상은 생각보다 넓어서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
양천록의 말에 관산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고 양천록은 고개를 저었다.
관산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어떤 말에도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표였다.
“네놈이 지금까지 한 말대로라면 강 대협이나 철사보 내의 무공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겠구나.”
“…….”
“네가 무공을 배워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단은 최고 수준의 무공을 익혀야 뭘 하든 하겠구나. 그런데 그런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희박한지는 알고 있는 것이냐?”
관산호의 침묵을 지켜보며 말을 하던 양천록의 두 눈이 서늘해졌다.
그와 눈이 마주친 관산호가 진지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예, 아저씨.”
단단한 표정이 된 관산호가 어깨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 때문에 이제는 이곳에 자주 오지 못할 것 같아서 미리 아저씨께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흠, 그렇겠지. 늦게 시작하는 것이니 배워야 할 것들이 좀 많겠느냐.”
고개를 끄덕이며 관산호의 말을 받은 양천록이 힘겨운 동작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에 놀란 장연령이 그를 부축했다.
“왜 일어나요?”
“저놈에게 줄 것이 있어.”
장연령의 부축을 받으며 침상에서 내려온 양천록은 말과 함께 관산호를 바라보았다.
“따라와라.”
“예?”
양천록의 뜬금없는 지시에 관산호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토 달지 말고 따라와.”
지시에 가까운 양천록의 말에 관산호는 어리둥절했지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양천록의 지시에는 뭔가 이유가 있는 듯했지만 설명을 해줄 태세는 아니었다.
말을 마친 양천록은 지팡이와 장연령의 팔에 의지해 방을 나섰다.
장연령과 관산호는 그런 그를 말없이 따랐다.
한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히면서도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에게 할 말이 있을 리 없었고, 말릴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양천록이 두 사람과 함께 도착한 곳은 그가 평소 무공을 수련하던 대청이었다.
대청에 도착한 그는 착잡한 눈빛으로 대청의 사방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 중 좌상방(左上方) 기둥을 잠시 바라보더니 그쪽으로 걸어갔다.
기둥에 도착한 그는 망설이지 않고 기둥의 한 면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눌렀다.
그그극!
귀를 거북하게 만드는 소음과 함께 기둥 뒤쪽의 청석 바닥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상황의 전개가 뜻밖이어서 장연령과 관산호는 조금 긴장한 모습으로 양천록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이 대청에 들어와 본 적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하지만 이곳에 저런 기관 장치가 되어 있다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다.
그 의미는 단 하나였다.
양천록이 두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무엇인가가 저곳에 있다는 것이다.
양천록은 드러난 구멍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폭 한 자에 높이 다섯 치 정도 되는 철로 된 상자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다시 기둥에 손을 대자 바닥은 예의 소음과 함께 원상으로 회복되었다.
철함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붉은 녹으로 뒤덮여 있어서 칙칙한 느낌이 묻어났다.
길에서 보았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그런 물건이었다.
성한 왼손으로 철함을 잡은 채 묵묵히 그것을 내려다보는 양천록의 눈에는 회한이 가득했다.
잠시 석상처럼 그렇게 서 있던 양천록이 철함을 관산호에게 쑥 내밀었다.
“받아라.”
“예?”
철함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얼떨결에 철함을 받아 손에 쥔 관산호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양천록이 말문을 열었다.
“갈등하긴 했지만 본래 네가 무공을 배웠으면 좀 더 일찍 주려고 했던 물건이다. 이제 네 마음이 결정되었으니 가져라.”
“이게 뭡니까, 아저씨?”
“나도 잘은 모른다. 하지만 무림에서의 가치는 대단한 것일 것이다.”
관산호의 질문에 답하는 양천록의 음성은 모호했다.
관산호는 양천록이 자신에게 준 물건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의아해졌다.
그의 궁금증을 알았지만 양천록은 말없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침상에 앉을 때까지 관산호와 장연령은 입을 열지 않았다.
양천록에게 전해지는 무언인가가 그들의 입을 막고 있었다.
침상에 앉은 양천록은 두 사람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조금 머쓱해진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나는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열한 살 때까지 양가장은 항상 사람이 북적이는 곳이었지. 내 조부님 대부터 우리 집안은 세 척의 배를 가지고 철사보의 탄광에서 나온 석탄을 나라에 납품하는 업무의 일부를 맡아 상당한 부를 쌓았다.”
말을 잇는 그의 음성은 어두웠다.
“할아버님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뵌 적이 없지만 부모님은 모두 살아 계셨고, 자상하신 분들이셨다. 흐흐흐, 그 모든 것을 끝장 낸 것이 그 물건이다. 열어봐.”
그의 말에 관산호는 철함의 뚜껑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