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함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아서 관산호가 뚜껑 부위를 잡고 힘을 주자 덜컥하는 미약한 소리와 함께 쉽게 그 안을 드러냈다.
“팔찌 같은데요?”
안의 물건을 확인한 관산호가 고개를 들어 양천록을 보며 말했다.
“그런 것 같네.”
장연령도 관산호의 의견에 동의했다.
철함 안에는 두 개의 주먹만 한 물체가 들어 있었는데 둥근 형태인 데다 가운데에 폭이 세 치 정도로 뚫려 있었다.
아무런 빛도 없이 그저 검고 둥글기만 해서 귀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장연령과 관산호는 직감적으로 물건이 귀물(貴物)임을 느끼고 있었다.
철함은 뻘겋게 녹이 슬어 있는데도 그 물건들은 전혀 녹이 슬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팔찌치고는 좀 이상하네요? 끊어진 부위가 전혀 없는데 이걸 어떻게 팔목에 찬담?”
물건을 살펴보던 장연령이 고개를 갸웃하며 양천록에게 물었다.
“평범한 물건이었으면 이 물건으로 인해 우리 가문이 폐허가 되지는 않았겠지. 산호야, 그걸 차봐라.”
양천록이 관산호를 보며 말했다.
그 말에 관산호는 철함을 옆의 탁자 위에 놓고 팔찌처럼 보이는 물건을 꺼냈다.
하지만 팔찌를 차지는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난감해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의 주먹은 팔찌로 판단되는 물건의 구멍보다 반 배는 더 컸다.
손바닥을 펴서 송곳처럼 모아보아도 구멍보다 한 치는 더 컸다.
구멍에 들어갈 리 없었다.
그 물건이 팔찌라면 어느 부위든 한곳이 끊어져 벌어져야 했는데 그런 곳은 요리조리 살펴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무게로 보면 같은 크기의 쇠보다도 더 나가는 물건이었다.
그러니 물건이 고무줄처럼 늘어날 것도 아니었다.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관산호가 난감해하는 것을 지켜보던 양천록이 불쑥 손을 내밀어 그 물건 중 하나를 잡더니 송곳처럼 손가락을 모은 관산호의 오른손에 쑥 끼웠다.
“응?”
지켜보던 장연령이나 당사자인 관산호 모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무게나 형태, 감촉으로 보아 그 물건은 금속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양천록이 그 물건의 양쪽을 잡고 벌리자 그 물건의 구멍이 두 치는 늘어났다.
양천록은 그렇게 늘어난 물건, 팔찌임에 분명한 그것을 관산호의 팔목에 채워 버린 것이다.
관산호의 팔목에 채워진 팔찌는 다시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그의 팔목 두께에 딱 맞을 만큼만 줄어들고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것의 이름은 파천여의환(破天如意環)이라고 한다.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는 나도 모르고,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 기능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는 것도 있지. 여의환에 대해 내가 아는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네가 보는 것처럼 그것의 크기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오른 팔목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감촉에 낯설어하면서도 관산호는 다른 하나의 팔찌를 양천록이 했던 것처럼 늘려 왼 팔목에 찼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양천록은 말을 계속했다.
“그나마 내가 그 물건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본 장이 무너질 때 나를 살려준 이인(異人)이 가르쳐 주신 덕분이다.”
관산호는 잠시 팔찌에 쏠렸던 관심을 거두고 양천록의 말에 집중했다.
“그 물건은 아버님께서 납품 관계로 북경에 다녀오실 때 골동품상에서 구하신 것이다. 너도 본 것처럼 분명 금속임에도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것이 신기해 귀물이라고 생각은 하셨지만 당신께서는 돌아가시던 순간까지도 그 물건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셨지. 그래서 할아버님 대부터 교류가 있었고, 본 장의 어려움을 많이 해결해 주기도 했던 하중곤에게 별 생각 없이 얘기를 하셨다.”
하중곤을 언급하는 양천록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하중곤의 별호는 천기객(天技客). 아는 것이 많고 손재주가 좋기로 유명했던 절정고수로 정사 중간이지만 정파에 가까운 성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무림에 알려졌던 자다. 처음 여의환을 본 그는 바로 아버님에게 그 물건을 자신에게 팔라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버님도 그 물건이 갖고 있는 신비한 기능을 보고 애착이 생겼던 터라 정중하게 거절하셨지. 하지만 하중곤의 제의를 거절하고 돌아오셨던 아버님은 나를 무릎에 앉히시곤 하중곤에게 그 물건을 팔아야겠다고 말씀하셨다. 할아버님 때부터 교류가 있었던 강호의 기인이 원하는 것인데 당신이 너무 야박하게 거절한 것 같다시면서. 비록 하중곤의 생활을 본 장에서 책임지고 있다고는 해도 그가 본 장이 하는 일을 보호하고 있기에 우리가 받는 이득도 적지 않았거든. 하지만 아버님은 그 말씀대로 행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본 장의 담을 넘은 자가 있었다.”
되살아나는 기억에 견디기 어려운 듯 양천록이 잠시 입을 닫았을 때 장연령이 분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 하가로군요?”
“…….”
양천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본 장은 순수한 상가여서 삼류급 호위무사 몇 명 외에는 힘쓸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인이 이십여 명 있었지만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어서 무공을 익힌 사람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지. 본 장에 침입한 하가는 우리 가족을 단숨에 제압했고, 아버님에게 여의환을 요구했다. 월담을 하는 자들은 보통 복면을 하지. 하지만 그날 밤 하가는 복면을 하지 않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우리 가족은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가족의 목숨으로 물건을 요구하는 하가에게 아버님은 망설임없이 여의환을 주셨다. 그 물건의 가치가 어떠한 것이든 가족보다 중요한 것일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물건을 받은 하가는 그냥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잔혹한 수하에 의해 아버님이 먼저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어머님과 한 분의 형님, 그리고 두 분의 누님이 목숨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나를 향해 그가 손을 쓰려 할 때 본 장 근처를 지나가던 이인 한 분이 끼어들어 내 목숨을 구해주셨지.”
“하가는요?”
양천록이 지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눈물을 흘리며 듣고 있던 장연령이 한 맺힌 음성으로 물었다.
양천록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아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양천록의 과거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장연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삼십이 년 전의 일인 데다 양천록이 그녀에게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죽었을 겁니다, 아주머니.”
장연령의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양천록이 아니라 관산호였다.
그의 대답에 눈을 빛낸 양천록이 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가 살아 있다면 아저씨 성격으로 여기서 이렇게 살고 계시지 않았을 테니까요.”
관산호의 대답에 양천록은 쓴웃음을 지었다.
“네 말이 맞다. 하가는 그날 나를 구해주신 이인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하중곤의 무공은 대단했지만 이인의 손에서 십 초를 버티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자에게 우리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것이 너무 어이없었지. 흐흐흐.”
양천록은 나직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 담긴 절절한 아픔이 관산호의 가슴을 울렸다.
그의 얼굴도 침중하게 변했다.
“나를 구해주신 이인의 말씀으로는 여의환을 본 무림인 중 욕심 내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셨지. 그것은 파천여의환의 마지막 주인이라고 알려진 사람이 무림사에 너무도 유명한 사람인 데다가 그가 자신의 무공을 파천여의환에 남겼다는 전설이 무림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마른침을 삼킨 양천록이 말을 이었다.
“나는 그분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분은 이미 제자를 두고 있었고, 살기가 강한 나와는 사제의 연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떠나가셨다, 여의환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나는 여의환을 그분에게 드리고 싶었지만 그분께서는 거절하셨다. 인연이 없는 신외지물은 복이 아니라 화에 불과할 뿐이고 가족 모두를 잃는 대가를 치렀으니 그 물건의 주인은 나라고 하시더군. 그분이 떠나신 후 나는 여의환을 방금 네가 보았던 그 장소에 집어넣었고, 그 후 몇 번 꺼내어 살펴보았지만 내 능력으로는 그 안에 담긴 비밀을 풀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십여 년 전부터는 꺼내본 적도 없다. 그 물건의 주인은 나도 아니었던 거지. 이제 여의환의 주인은 너다. 그것의 비밀을 푼다면 네가 무엇을 하려고 하던 큰 도움이 될 거다.”
관산호는 조금 긴장한 시선으로 자신의 팔목에 차여진 파천여의환을 살펴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양천록은 말을 이었다.
“이인은 여의환이 아주 오래전부터 강호 상에 떠도는 물건이라고 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그분도 모를 만큼 오래전부터 말이다. 네가 본 것처럼 신비한 기능이 있어서 그 비밀을 풀려고 많은 사람들이 시도한 모양이지만 비밀을 푼 사람은 없는 듯하고, 마지막으로 여의환을 소유했던 사람이 강호 상에서 사라지면서 여의환도 모습을 감추었다고 한다.”
“여의환의 마지막 주인이 누굽니까?”
“너는 혹시 권마(拳魔) 초륜(楚輪)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양천록의 질문에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던 관산호의 얼굴에 놀란 빛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설마 백오십 년 전의 절대오강 중 한 명인 그 권마 초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가 여의환의 마지막 주인입니까?”
“그렇다.”
양천록의 대답을 들은 관산호는 떨리는 눈길로 여의환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시절 의부인 강풍양에게 들었을 때 그를 경이에 빠지게 했던 전설이 지금 그의 앞에 현신한 것이다. 소리없는 전율이 그의 전신을 치달리고 있었다.
권마(拳魔) 초륜(楚輪).
백오십 년 전이라는 아득한 세월 이전에 존재했던 인물이지만 지금도 무가에서 자란 자라면 모를 수 없을 만큼 무림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백오십 년 전의 무림은 무림사에 유래가 드문 전성기였다.
실전된 무공들이 숱하게 복원되었고, 그에 버금가는 절기들이 무수하게 창안되었으며, 또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인 고수들이 속출했다.
수많은 영웅과 거마, 효웅이 천하를 질타했다.
군웅할거, 폭풍노도의 시대였다.
강자가 많다는 당대의 무림이지만 당대 최고의 고수들을 그 당시의 강자들과 비교한다면 손색이 있을 것이라고 할 정도이니 당시 무림이 얼마 만한 전성기를 누렸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기인 고수가 사막의 모래알처럼 많다는 당시의 무림에 다섯 명의 절대 초강 고수가 존재했다.
중원무림의 태산북두로 자타의 공인을 받았으나 인재의 부재로 오랜 침체기에 빠졌던 소림을 새로운 부흥기로 이끌었던 신승(神僧) 망아 선사.
천무 진인 장삼봉의 최후 심득을 검으로 구현해 내는 데 성공하며 살아서 검의 신선으로 추앙받았던 무당의 검선(劒仙) 태허 진인.
신비로 점철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나 세상과 섞이기를 거부하며 구름 속의 신룡처럼 살아가던 모용세가에서 배출한 희대의 천재 신유(神儒) 모용재.
흔히 마교라 불리는 패(覇)와 마(魔)의 성지 구중군마천의 주인 마조(魔祖) 우문천린.
두 주먹만으로 천하를 비웃으며 독보 강호했던 낭인 출신의 권마(拳魔) 초륜.
그들 오 인이 절대오강(絶對五强), 혹은 환우오천왕(寰宇五天王)이라 불리며 무림사에 한 획을 그었던 당시의 절대 초강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평생 동안 서로를 제외하고는 삼초지적을 만나지 못했다는 전설의 주인공들이다.
양천록은 지금 파천여의환의 마지막 주인이 그들 중 권마 초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의환에 초륜의 절학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무공을 익히려고 결심한 마당이니 여의환에서 초륜의 무학을 찾으려 노력해 볼 가치는 충분하고도 넘치지.”
양천록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의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이 별처럼 빛나는 관산호의 눈과 부딪쳤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반드시 이 물건의 비밀을 풀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관산호의 어조는 담담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양천록과 장연령의 얼굴에는 만족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관산호는 나이가 어리지만 입 밖으로 낸 말은 어긴 적이 없고,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그들은 그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네놈을 믿는다. 언젠가 내 앞에서 권마의 무공을 시현해 다오. 기꺼이 구경해 주마.”
“예, 아저씨.”
관산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파천여의환이 양천록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알고도 남았다.
그것은 양천록의 삶을 파멸시킨 물건이다.
평범하게 자랐다면 능히 일대의 걸물이 될 만한 인물인 양천록을 흑사회의 파락호로 살게 만든 물건인 것이다.
그 악몽 같은 날 이후 양천록의 방황이 어떠했을지 관산호의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가문을 파멸시킨 자는 그날 죽었다.
복수의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복수는 가능하지 않고, 그 원인이 된 여의환의 비밀은 풀리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허무뿐이었을 것이다.
양천록의 삶이 아프게 관산호의 가슴을 파고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웃어주는 것뿐이었다.
그 웃음이 그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의 징표였으니까.
* * *
“붕대는 이제 그만 푸세요”
창밖으로 양가장을 벗어나는 관산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연령이 웃음기 묻어나는 어조로 말했다.
“그럴까?”
양천록은 씨익 웃더니 천천히 팔과 상체를 휘어 감고 있던 붕대를 천천히 풀어냈다.
“호호호, 답답하셨죠?”
그 모습이 못내 우스운지 장연령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나직하게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방 안에 깔렸다.
“조금.”
풀어낸 붕대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양천록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붕대를 풀어낸 그의 상체는 그 나이의 보통의 장정과 많이 달랐다.
어지간한 사내 허벅지만한 굵은 팔뚝과 아름드리 나무를 연상시키는 가슴과 배의 근육은 감탄스러울 만큼 잘 발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상체 어디에도 상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우람한 상체를 바라보는 장연령의 볼이 능금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어색함을 떨쳐 버리려는 듯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나요?”
“저놈 고집을 몰라서 그래? 대놓고 제안했으면 면전에서 거절당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무공을 익히려고 하잖아요. 당신이 제안한다면 호아가 받아들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생각해요.”
장연령의 말에 양천록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호가 자란 곳은 철사보야.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의협의 기본에 충실하기로 따진다면 당세에 몇 안 되는 진정한 정파명문이지. 그런 곳에서 자란 아이가 산호라는 것을 잊지 말라구. 게다가 저 아이는 천성적으로 낭인 기질이 너무 강해서 어느 한곳에 매이는 것을 못 견뎌해. 그런 산호가 내 정체를 알고도 순순히 나를 따라나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옳아. 무리하게 강행한다면 괜찮은 어린 친구 하나를 잃게 될 가능성만 커질 뿐이지.”
그의 말에 장연령의 붉은 입술 사이로 가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호아가 당신도 찾아내지 못한 권마의 절학을 과연 찾아낼 수 있을까요?”
“인연이 닿는다면 가능하겠지. 그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산호의 운과 나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야.”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장연령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녀는 물었다.
“당신은 호아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아요.”
“현재의 내가 운신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산호를 만난 것은 기적에 가까운 행운이야.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상황인데 기대를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정말 도박이라고밖에 드릴 말씀이 없군요.”
중얼거리듯 말하는 장연령의 말에 양천록은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받았다.
“인생은 어차피 한 판의 도박과도 같은 것이니까. 산호가 권마의 절학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 아이는 스스로의 꿈도 이루지 못하겠지. 그리고 내 꿈도 함께 허무 속에 스러지겠지. 나 혼자서는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찾아낸다면 그 아이는 자신의 꿈을 이룰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고, 나 또한 접어둔 꿈을 다시 꿀 수 있게 될 거야. 아무튼 산호가 권마의 절학을 찾아낸다면 그 아이의 성격상 후일 어떤 형태로든 나와 이어질 수밖에 없어.”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시나요?”
“산호는 전형적인 정파의 대협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능글맞고 생각이 많지만 대협이 가져야만 하는 어떤 자질은 넘칠 정도로 갖고 있지. 그것을 알기에 내가 이런 도박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산호가 갖고 있는 자질? 그게 뭔가요?”
“은(恩)과 원(怨)의 구분이 분명하다는 것. 산호 스스로는 아직 잘 모르는 듯하지만 그 기질이 산호의 운명을 만들어 나갈 거야. 그리고 파천여의환은 그런 산호와 나를 이어줄 운명의 고리 역할을 할 것이고.”
양천록은 장연령을 등 뒤에 둔 채 천천히 팔짱을 끼며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삼 년 전 산호를 보았을 때 이미 내 운명을 건 도박은 시작되었어. 이것은 당신 말처럼 분명 도박이야. 하지만 나는 저 아이를 믿기에 이 도박에서 내가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해.”
그는 담담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장대한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기세는 완전하게 개방되지 않아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방 안에 들어와 있던 하오의 햇살은 소스라치게 놀라 창문 밖으로 정신없이 달아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