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최소한 오가장의 십대무사 정도는 되어야 감당할 무위라고 판단하는 호위들이었다.
비록 죽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손을 계속 섞는다면 사태가 더 악화될 수 있다고 판단한 호위가 쓰러진 오극을 등에 들추어 메고 내실에서 벗어나자 그 뒤를 매염옥이 따랐다.
“술잔이 없군.”
두 개의 술잔이 모두 깨어져 버렸기에 무혼과 비연 앞에는 여분의 술잔이 없었다.
무혼이 잘못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던 비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가져올게요.”
“비연.”
돌아서던 비연이 무혼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예.”
“무혼. 내 이름은 금무혼이다.”
비연의 몸이 떨렸다.
‘금무혼. 금 가가…….’
오 년이었다.
자신이 한 남자의 이름을 알게 되는 데 걸린 시간은 이 순간 비연의 가슴속에 담겨진 모든 어둠은 사라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오가장의 둘째 아들 오극이 행해 올 복수에 대한 생각도, 그리고 술잔을 가지러 가던 자신의 행동도.
“가가!”
비연이 무혼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인연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니, 인연이 아니어도 좋았다.
곧 또 말없이 사라질 사람이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단지 비연은 지금 이 순간 금무혼의 넓고 아늑한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이 행복할 뿐이었다.
그렇게 흘러내리는 비연의 눈물 속에 그동안의 회한이 담겨져 무혼의 옷섶을 적시고 있었다.
***
달리는 이두마차의 속도는 두 마리의 말이 낼 수 있는 최상의 속도를 이미 넘었을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마부석에 앉아 있는 사내는 채찍을 멈추지 않고 말 등을 때렸다.
끼이힝!
고통에 울부짖는 말들이 더욱 속도를 내며 쏘아져 나감에도 마부의 채찍질은 멈추지 않았다.
‘잡히면 수아가 위험하다.’
사내에게는 사명감이 있었다.
마차에 타고 있는 소녀는 자신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 내어야 할 소중한 존재였다.
뒤를 쫓아오는 이들은 셋.
자신의 무위로 그들을 막아설 수는 있다. 하지만 승리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자신이 그들의 손에 죽는다면 앞으로 가야 할 먼 길을 소녀 혼자서 헤쳐 가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사내는 알고 있었다.
달리는 마차의 요란한 움직임에서도 뒤를 쫓아오는 이들의 기운을 파악해 내었다.
십 장 가까이 그들이 따라붙었음은 굳이 뒤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숲을 뚫고 대평지가 드러나면서 마차는 저들의 시야에 확보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소녀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소녀의 효용가치가 다한다면 달라진다.
사내는 그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오 장 거리!’
거리가 더욱 좁혀졌다.
평지에 들어서면서 시야가 확보된 그들은 더욱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의 거리라면 암기라도 발출하면 충분히 닿을 수 있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이제 두 마리의 말에 더 무리한 속도를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엇인가 결심한 사내는 채찍으로 말의 등을 때림과 동시에 허공으로 치솟았다.
짙은 어둠 속이었지만 사내의 눈에는 세 명의 추적자들이 확연하게 들어왔다.
허공에서 그의 검이 발출되었다.
그의 청강검이 달빛에 반사되며 반짝이는 찰나의 시간에 청강검의 검첨에 검기가 일렁였다.
분검.
하나의 검이 아닌 세 개의 검으로 나누어진 검기가 세 명의 추적자들의 가슴을 향해 파고들었다.
***
‘괜한 짓을 했어.’
어제 저녁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며 금무혼은 늘 자신이 운공을 하는 바위로 향했다.
금무혼은 주명산 아래로 펼쳐진 대해와 마주하고 있는 바위 위에 자연반좌식(自然盤坐式)의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새벽 운공을 시작한다.
지나간 세월 그 모든 것을 잊기 위해 그가 치중한 것은 무공이었다.
무아일체에 돌입하면 그 시간 동안만큼은 머릿속을 지배하던 모든 번뇌들이 사라졌다.
물론 처음부터 무혼이 무아일체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휴우∼.”
잠을 자는 동안 체내로 들어온 탁기를 발출하려는 듯 깊은 숨을 내쉬는 무혼은 늘 운용해 오던 방법으로 내력을 다스려 나갔다.
정폐호흡(停閉呼吸).
숨을 들이쉬어 내부를 닫아 머무르게 하는 호흡법이 바로 정폐호흡이었다.
무혼은 내력을 쌓는 운기법으로 처음 접할 당시부터 정폐호흡을 택했다.
들숨을 기본으로 하고 견갑골 사이를 충분히 펼친 후 가슴은 안으로 오므린다.
소위 발배함흉(拔背含胸)이라 하는 이 자세를 날숨에 응용해 운공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 벌써 이십여 년이 지났다.
숨을 들이쉬며 그 진기를 충맥(?月永)에 머물게 하고 숨을 내쉴 때 임맥과 단전을 통하게 했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운공에 몰두하는 무혼은 먼저 잡념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시이불견(視而不見) ― 보되 보이지 않고
청이불문(廳而不聞) ― 듣되 들리지 않으며
후이불각(嗅而不覺) ― 맡되 느끼지 않는다.
이 세 과정을 거치면 해풍으로 인한 짠 냄새도, 새벽을 알리는 짐승들의 소리도, 아련하게 비추어지던 옛 기억도 뇌리 속에서 사라진다.
묵념자구(默念字句) ― 잡념을 제거하고
염담허무(恬秘虛無 ― 마음을 비운다.
숨결이 공기 중에 가볍게 뿜어져 나와 수증기를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진기가 대주천하고 이미 운공을 끝낸 무혼이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운공 뒤에 늘 이어지는 명상과 사색.
그것은 무혼을 가일층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육체가 적응하는 수련이 중요하지만 명상을 통한 무공 수련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평소라면 잡념으로 인해 명상과 사색이 불가능하다지만 이렇게 새벽 운공을 한 직후라면 가능한 것이었다.
남아 있던 어둠이 가시고 대지를 밝히는 해가 떠오를 즈음 무혼은 바위에서 일어났다.
늘 얼음처럼 차가운 그의 얼굴에 가는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가 하루 중 유일하게 웃음을 짓는 순간이 바로 이때였다.
마치 묵은 탁기를 씻어 낸 듯 상쾌함이 몸을 감싸기 때문이다.
“산책이 좋겠군.”
무혼은 새벽 운공 후 가벼운 산책을 즐기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물론 함께 먹는 이 하나 없지만 그는 늘 정성을 들여 식사를 준비하고 연못가에 있는 탁자에서 그 맛을 즐겼다.
하지만 오늘은 산책을 선택했다.
주명산의 아침은 싱그럽다.
밤사이 숨을 죽였던 모든 생물들이 아침이 되면 자기들만의 소리를 내느라 소란스럽다.
나무 위에 자리한 새들도 그러했지만 풀 속에 숨어 있던 벌레들의 소리도 무혼의 귓속으로 들려왔다.
화옥루의 비연을 생각하던 무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는 걸음이 빨라졌다.
‘요놈!’
마치 빨려 들어가듯 흘러가는 무혼의 경공법으로 인해 주위의 사물들이 빛살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은 잡아 주마.’
무혼은 발바닥의 중심에 있는 용천혈로 내력을 더욱 흘려 넣었다.
절정의 초상비(草上飛)를 펼치는 무혼의 눈앞에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는 다람쥐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놈 봐라!’
마치 무혼을 기다리는 듯하던 다람쥐가 그의 기운을 느꼈는지 달리기 시작했다.
‘정말 빨라.’
지금 무혼의 경공법이면 강호에서 따라올 이가 몇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지만, 저놈의 속도는 믿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반치도 되지 않을 법한 네 다리를 놀리는 모습이 무혼의 영민한 눈에도 다 잡히지 않을 정도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반 시진 가까이가 지났음에도 무혼은 저 녀석과의 거리를 줄이지 못했다.
늘 그렇듯이 주명산의 산등성이를 한 바퀴 다 돌고 저놈은 자신의 은거지인 뚫린 바위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물론 잡으려면 입구를 막고 바위를 깨면 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혼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가끔 외로움을 잊게 해 주는 좋은 친구의 안식처를 파괴하고 싶지도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 저 귀여운 놈을 경공으로 잡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미소를 지으며 초옥으로 돌아온 무혼은 반가운 얼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았다.
장씨 부자(父子).
그들은 주명산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금무혼을 찾은 것이었다.
그동안 치열했던 수적과의 전투를 한참이나 이야기하던 장호기는 분위기가 무르익자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예.”
“말해 봐.”
무혼의 말에 호기는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정식으로 무공을 배우고 싶습니다.”
호기의 말에 무혼이 약간은 의외라는 듯 다시금 물었다.
“무인이 되겠다는 말이냐?”
“예.”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이유가 무엇이지?”
“전부터 그런 생각은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 마음을 굳혔습니다.”
“이유를 물었다.”
조금 전과 달리 무혼의 목소리가 차가워졌음에 호기는 자신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지금의 삶이 싫습니다.”
“무인이 되면 무엇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예.”
“무엇이?”
“최소한 자신이 지키고 보호해야 할 것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지키고 싶은 것이냐?”
“제 삶입니다.”
장호기를 바라보는 무혼은 뇌리 속에 빛살처럼 지나가는 기억을 되새겼다.
그 옛날 자신이 무공을 배우게 만든 이유, 그것이 장호기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자.”
장호기의 표정이 밝아졌다.
최소한 거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거절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장호기였다.
수십 번 거절을 당한다 하더라도 부탁을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지금 무혼의 대답은 자못 긍정적이라 장호기는 가슴이 뛰었다.
만일 장호기가 대의명분이니 큰 뜻을 품었다느니 하는 이유로 무공을 익히려 한다 하였다면 아마 단박에 거절당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닌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 그리고 그것이 제 삶이라는 말이 무혼의 마음을 흔든 것이었다.
“준비하겠습니다.”
“뭘 말이냐?”
“저와 아버지도 무사히 귀환하였으니 잔치라도 벌여야지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장호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곧바로 산 아래로 달려갔고, 그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
제3장 운명은 나를 숨기려 했건만
천주현 오가장.
혜안현의 지척에 있는 천주현의 오가장은 이곳 복건성에서도 위세가 등등한 세력 중 하나였다.
혜안과 마찬가지로 염전과 수산물을 유통하며 오가장이 만들어 내는 수익은 천문학적이었다.
현 오가장의 장주이자 복건성에서는 남해검객(南海劍客)이라 불리는 오위맹은 오가장에서 일으키는 수익의 상당 금액을 강호의 유력 인사와 관부에 투자하여 자신들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이 그러했듯이 슬하에 있는 아들들을 일찍이 강호의 명문무파로 보내 무공을 익히게 하고 인간관계를 넓게 가지도록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