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일은 어제 송림에서 만난 개방 제자의 정체를 알게 되고는 자신들이 당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개방의 방주이자 중원무림의 기인으로 통하는 구지개가 말년에 받아들인 유일무이한 제자가 바로 평지풍파개 냉북두였다.
거지로서 계집질은 물론이고 안휘 남궁세가의 장자를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팬 사건은 중원에 몸담은 무림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일화였다.
차기 개방의 방주가 되어야 할 평지풍파개가 왜 이곳 복건성에 있는지, 그리 간단히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자신도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하는 상부의 일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갔고 어제 일어났던 일이 개방의 의도적인 행동이었다면 그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일이 꼬이고 있어.’
마종일은 평지풍파개가 이번 일에 관련되었다는 정보를 상부로 보냈고 이제 자신은 상부의 명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평지풍파개라면 자신들로서는 섣불리 행동할 수 없는 이가 분명했다.
***
화옥루의 주인 매염옥은 가장 먼저 비연을 숨겼다.
오극이 그런 꼴을 당하고 돌아갔으니 앞으로 일어날 일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고, 게다가 비연까지 화옥루에 있다면 더욱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일이 필요했다.
이번 일이 안정될 때까지 비연을 숨겨 두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었다.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며칠 전 다녀간 오가장의 사람들에게 오극을 상하게 한 사내의 용모를 알려 주었고 오가장의 사람들은 화옥루에 어떤 제제도 가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번 일이 일단락되어 간다고 생각한 매염옥에게 또 다른 사내들이 찾아들었다.
이들이 오가장의 사람들이라면 이해할 만한 일이었지만 매염옥이 알기에 이들은 분명 보기당의 무사들이었다.
“정말 모르고 있습니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는 보기당 일원대 소속의 곡칠이라는 자였다.
상부의 명을 받아 수하들을 이끌고 무혼을 찾아 나선 이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혼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다.
그 시작이 바로 화옥루였고 주인 매염옥이 알지 못한다는 말을 믿고 돌아간다면 무혼을 찾을 방법은 더 이상 없는 것이었다.
“사실입니다.”
“문을 닫고 싶다는 말로 들리는군.”
매염옥은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알고 있는 보기당은 오가장과 그 성질이 다른 문파였다.
비록 보기당이 악한 행동을 일삼고 있지는 않았지만 일단 손을 쓰면 화옥루 정도의 기루는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하고도 남을 곳이었다.
최소한 오가장은 민심을 생각했지만 보기당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 일이 있은 후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매염옥의 말에 곡칠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끝까지 나를 기만하는군! 얘들아!”
곡칠의 명이 떨어지자 일원대 대원들이 화옥루의 각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매염옥에게 겁을 주기 위한 방법이었다.
험악한 사내들이 방문을 열고 고함을 지르자 기녀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진정 모릅니다. 제 목숨을 걸어도 좋습니다.”
“그래, 믿어 주지. 그 대신 네년의 목숨은 내가 취하마!”
채챙!
곡칠의 예기 서린 검이 뽑혀져 나오자 매염옥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오랜 기녀 생활로 수많은 경험을 한 그녀였지만 눈앞에 드러난 검이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팟!
검이 허공을 가르는 동안 그 광경의 지켜보던 기녀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고 매염옥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곡칠의 검이 그녀의 목을 스쳤다.
혈선이 그어지며 피가 흘러나옴에도 매염옥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아니, 너무 큰 두려움에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매염옥의 큰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다시 묻는다. 대답을 하지 않아도 네년은 살려 주지. 하지만 화옥루의 기녀들을 하나씩 죽이겠다. 데려와!”
곡칠의 명에 기녀 하나가 앞으로 끌려 나왔고 그 모습에 매염옥은 더욱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알지 못하니 만들어서라도 이야기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매염옥은 모든 기억을 꺼내고 있었다.
‘아! 주명산.’
그의 거처가 주명산에 있다는 말을 들은 듯했다.
그 기억이 자신과 기녀들을 살릴 수 있는 기억이 되기를 바라는 매염옥이 급히 입을 열었다.
“주명산이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매염옥이 입을 열자 곡칠의 눈 끝이 떨렸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이제껏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주명산이 어디더냐!”
“그것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단지 그 사내의 거처가 주명산이란 이야기만 들었을 뿐입니다.”
“만일 거짓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겠지?”
“그것이 제가 알고 있는 모두입니다.”
매염옥의 대답에 곡칠이 검을 거두었다.
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라도 거짓을 말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가자!”
곡칠이 몸을 돌리자 일원대의 대원들이 뒤를 따랐다.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매염옥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기녀 하나가 급히 달려와 상처에 천을 가져다 대었다.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경황이 없어서 기억하지 못하였지만 분명 그 사내는 떠나기 전 주명산이 거처라 일러 주었던 것이었다.
화옥루를 벗어나는 곡칠에게 수하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대주, 오가장에서 현상금을 걸어 용모파기를 뿌리고 있다고 합니다.”
수하가 전해 주는 용모파기를 쏘아보는 곡칠.
오가장이 용모파기를 뿌리고 있다면 그들도 아직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한다.”
곡칠이 몸을 돌리자 일원대의 대원들이 뒤를 따랐다.
***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전 대지는 충만한 기운으로 가득 찬다.
더군다나 산과 해면이 인접한 주명산은 다른 곳보다 더욱더 기운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상쾌함을, 무공을 익히고 내력을 수련하는 이라면 원활히 유입되는 내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고, 그 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늘 이른 새벽, 무혼이 좌정하여 연공을 하던 바위는 한 명의 식구를 늘였다.
무혼이 조심스레 바위에서 일어나 장호기를 보았다.
자신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좌정해 있는 장호기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장호기를 절정의 무인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나 바람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삶을 지키고 싶어 하는 호기의 바람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일었던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장호기가 수련하는 심법은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행기연형(行氣練形).
기운을 움직여 세력을 만든다는 가벼운 뜻을 가진 심법을 깊이 파고 들어가면 그 근원은 천우선사의 천공무진심공(天空無盡心功)에서 찾을 수 있다.
무혼은 이십여 년 전 천우선사와 닿은 인연으로 천공무진심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었고, 그것에 변화를 가미해 만들어 낸 운기행공이 바로 행기연형이었다.
무혼의 눈이 자색으로 물들었다.
눈자위에서 눈동자까지 자색으로 가득 물들었다는 것은 천공무진심공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과거의 기억을 지워 버려서인가?
무혼은 최근 자신의 진전이 예전과 다름을 느꼈다. 그것은 번뇌가 사라짐으로 상단전이 맑아지고 명상의 깊이가 깊어졌기 때문이었다.
“휴우∼.”
장호기가 내부에 쌓인 탁기를 몰아내며 눈을 떴다.
“좋아졌구나. 이제 뛰어야지.”
지난번 보름이라는 시간만으로도 장호기는 상당한 진전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지난 한 달.
무혼의 가르침을 흡수하는 장호기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본디 탁한 빛은 아니었지만 호기의 눈에서 조금씩 기광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전이 제대로 자리를 굳혔다는 표시였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장호기가 산등성이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사냥을 하면서 자라 왔기에 호기의 체력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특히 호기는 달리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물론 내력을 운용하여 경공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저 달리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무혼도 오랜만에 시원한 바람을 맞아 보고 싶었다.
장호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무혼의 몸이 움직였다.
부신약영(浮身躍影).
강호의 고수가 그 모습을 본다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절정의 운신법이 바로 부신약영이었다.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무혼은 곧 초상비를 밟으며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오늘 주명산은 바람 한 점 없었다.
하지만 무혼의 움직임은 그 주위로 바람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요놈!’
무혼은 마치 자신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다가 오 장의 거리쯤 이르자 내달리기 시작하는 다람쥐를 보았다.
백색의 다람쥐는 분명 영물이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저놈을 따라잡지 못했던 무혼이 용천혈에 더욱 강한 기운을 밀어 넣었다.
휘휭!
다람쥐도 달라진 무혼의 기운을 느낀 것일까?
예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뒤를 따라붙는 무혼의 기운에 백색의 다람쥐는 더 빨리 발을 놀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이미 무혼의 손아귀에 잡혀 버린 백색 다람쥐는 빠져나가려는 듯 몸을 뒤틀었지만 무혼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무혼의 안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요놈! 그동안 잘도 도망 다녔겠다.”
무혼이 엄포를 놓고 두 눈을 노려보자 백색의 다람쥐는 앞발로 무혼의 손을 마구 긁었다.
날카로운 발톱이었지만 무엇 때문인지 무혼의 손에 상처가 날 만큼 깊이 긁지는 않았고, 그 행동이 너무 귀엽게만 보였다.
“돌아가거라! 더 연습해서 다음에 다시 겨루어 보자.”
무혼이 손을 풀어 다람쥐를 놓아 주자, 다람쥐는 무혼을 한번 흘깃 쳐다본 후 사라져 버렸다.
***
“오늘은 내가 올라간다고 전하거라.”
장 노인은 아침에 수련을 위해 무혼의 거처로 오르는 아들 장호기에게 자신도 그곳으로 향할 것임을 당부했다.
“저잣거리에 다녀오시게요?”
“그래.”
“같이 가시죠. 짐이 적지 않으니 아버지 혼자서는 힘드실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다리도 불편하신데.”
“아니야. 시간 낭비하지 말고 넌 어서 가서 수련이나 하거라. 지난번에 무혼 그 친구가 다리를 보아 주어서 이제 다 나은 것 같다.”
장 노인은 바닥을 차며 자신의 다리가 튼튼함을 아들에게 보여 주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무혼으로 인해 무공을 배우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고, 아들의 수련 시간을 빼앗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장호기였다.
“괜찮으시겠어요?”
“이놈아! 아직 네놈 하나쯤은 거뜬할 정도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아버지도 참.”
장호기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서 가거라. 늦겠다.”
“예.”
호기가 무혼의 거처로 향하는 동안, 장 노인도 은자를 챙기고는 지게를 등에 졌다.
무혼이 직접 저잣거리에 나가서 필요한 것을 사겠다고 하였지만 장 노인은 그것을 만류하였다.
어차피 자신이 저잣거리에 나가 보아야 했고 자신의 물건을 사면서 같이 사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무혼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사실 무혼이 보아 준 뒤로 다리가 많이 나아 그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었다.
저잣거리에 들어선 장 노인의 눈에 평소에 자주 보이지 않던 무인들이 많이 띄었다.
“이봐, 유씨.”
장 노인이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장사꾼인 유씨를 불렀다.
“예.”
“저잣거리 분위기가 왜 이리 흉흉한가?”
“모르셨습니까?”
“뭘 말인가?”
“얼마 전에 화옥루에서 오가장의 둘째 공자가 만신창이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잡는다고 오가장의 무인들이 아주 난리가 아닙니다요.”
“그런 일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