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악!”
무인에게 있어 팔은 생명이었다.
자신의 팔을 보는 곡칠의 눈에 핏물이 가득 고였다.
하지만 잘려진 팔에 대한 고통이 멈추기도 전에 다시 무혼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크아악!”
남아 있던 팔마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곡칠의 눈이 흰자위로 덮이는 듯했다.
“컥!”
무혼의 검이 곡칠의 허벅지를 파고들면서 새로운 고통이 잃어 가는 의식을 일깨웠다.
“돌아가서 전해라! 오늘의 빚을 갚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또한 네놈의 목숨은 다시 찾아갈 때, 그때 거두어 주겠다.”
곡칠의 허벅지에서 검을 뽑아낸 무혼이 허공에서 검에 묻은 선혈을 털어 냈다.
촤악!
검신에 묻어 있던 선혈이 곡칠의 얼굴에 뿌려지며 곡칠의 붉은 눈동자에는 장 노인을 안아 드는 무혼의 등만 보일 뿐이었다.
***
‘금무혼. 금무혼.’
냉북두는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고 정확한 기억을 끄집어낼 수 없는 이름에 속이 답답하였다.
“추몽아.”
“예.”
“너 혹시 금무혼이라고 들어 봤냐?”
“아니요.”
건성으로 대답하는 추몽을 보는 냉북두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이 자식은 생각도 해 보지 않고!”
“생각해 보고 말 게 뭐 있습니까? 들어 본 적이……. 잠깐!”
추몽이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말을 멈췄다.
“뭐야! 아는 이름이야?”
냉북두가 치솟은 눈썹을 내리고 기대가 담긴 눈으로 추몽을 바라보았다.
뿌웅!
“어, 시원하다!”
“이 개자식이 죽으려고!”
냉북두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바닥을 뒹굴며 피해 내는 추몽이었다.
“아니, 자연적인 현상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이놈이 요즘 완전히 기어오르네. 오늘 너, 오뉴월 개 잡듯이 한번 잡아 주마. 피할 테면 피해 봐!”
“잠깐!”
쏘아져 오는 냉북두를 보고 추몽이 다시 손을 들며 소리를 질렀지만, 어느새 냉북두의 주먹은 추몽의 턱을 갈기고 있었다.
“큭! 진짜 생각났는데…….”
쓰러지는 추몽의 말을 들은 냉북두가 급히 추몽을 부축하고는 다시 물었다.
“정말 생각났냐?”
“섬전단혼(閃電斷魂) 금무혼(錦舞魂)!”
추몽이 기억해 낸 금무혼이라는 자는 진정으로 놀라운 자였다.
십여 년 전 약관의 나이로 섬전단혼(閃電斷魂)이라는 별호가 지어질 만큼 대단한 이가 바로 그였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소문이 분분하였지만 세월이 흘러 더 이상 그를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냉북두도 어린 시절 귀동냥으로 들어 본 별호와 이름이었기에 시간이 흘러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아가 찾는 이가 그 금무혼일까?”
“가능성이 농후하죠. 섬전단혼의 고향이 이곳 바로 옆인 선유(仙遊)현이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
“어허. 그래도 제가 복건성의 분타주인데 그것 정도야 모르겠습니까?”
“그것까지 아는 놈이 그 이름을 그렇게 기억을 못해!”
“참, 가르쳐 줘도 난리십니까?”
추몽이 그렇게 투덜대는 동안 냉북두의 머리는 빠르게 굴러갔다.
십사 년 전 홀연히 사라져 버린 사내를 찾는 소녀.
그리고 그 뒤를 쫓는 사마세가의 무인들.
뭔가 구미가 당기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좋았어. 한번 파고들어 보자고.”
“뭘요?”
“알 것 없어.”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냉북두는 내실의 문이 부서져라 달려 나갔다.
“수아야, 들어가도 될까?”
설수아가 기거하는 내실의 문 앞에 서 있는 냉북두는 마음이 바빴다.
궁금증이 일면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에 문을 부수고 들어가지 않은 것만 하더라도 참을성이 많이 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들어오세요.”
대답이 들리기 무섭게 내실로 달려 들어간 냉북두는 곧 좌정해 있는 적자강을 보았다.
“은인에게 일어나서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일어나신 줄 알았다면 진즉에 찾았을 것인데.”
“방금 전에 일어나셨어요.”
설수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적 숙부가 잘못될까 마음을 졸인 것이 얼마였던가?
“적자강이라 합니다.”
“냉북두입니다.”
냉북두가 자신을 소개하자 적자강이 적지 않게 놀라는 빛을 보였다.
의식을 잃기 전 냉북두의 무위를 견식한 그였기에 개방에서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였다.
하지만 설마 그가 차기 개방 방주로 내정되어 있는 평지풍파개 냉북두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냉 소협이셨군요. 제가 눈이 어두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우선 요양을 취하셔야지요.”
냉북두는 마음속에 궁금증이 가득하였지만 방금 전 의식을 차린 사람을 통해 궁금증을 풀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아가 이야기를 했다고 말을 하더군요. 결례임을 압니다만 도와주시면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적자강의 부탁에 냉북두가 의자를 빼내어 자리에 앉았다.
“그럼 우선 찾고 계신 금무혼이라는 분이 과거 섬전단혼이라 불렸던 금무혼 대협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연을 여쭈어 보아도 될는지.”
냉북두의 물음에 적자강의 얼굴이 굳어졌다.
‘평지풍파개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구나.’
“휴…….”
한숨을 내쉬는 적자강을 보고 냉북두가 자신의 질문이 과했음을 알고 급히 말문을 열었다.
“제가 곤란한 질문을 하였나 봅니다.”
“아닙니다. 금 대형은…….”
적자강은 왜 금무혼을 찾는지 하나씩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금 대형의 용모를 그려 둔 것입니다.”
적자강은 자신이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해 금무혼의 용모파기를 그려 두었던 것을 꺼내어 들었다.
십여 년 전의 외모를 그려 둔 것이었지만 그의 외모가 크게 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고, 냉북두가 금무혼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건네주었다.
용모파기를 받아 들고 그 그림을 본 냉북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사람이 섬전단혼이었단 말인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의 용모파기가 저잣거리에 널려 있으니 그것을 냉북두가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의 내실로 돌아온 냉북두의 표정은 사뭇 진중해졌다.
그저 자신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듣고 지나갈 이야기들이 아니었고, 냉북두는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사마세가. 그런 일을 숨기고 있다, 이 말이지? 내 귀에 들어온 이상 절대 그냥 넘어가지 못하지. 그럼!’
“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추몽의 목소리가 냉북두의 사색을 깨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지난번에 알아보란 일은 알아보았냐?”
“알아보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습니까? 이름도 몰라 달랑 이 용모파기 한 장과 주명산 근처에 산다는 것만으로 뭘 알아볼 수 있습니까?”
추몽은 짜증이 일었다.
오가장의 그 둘째 공자 놈이 인간말종이라는 것은 세상이 모두 알고 있음에 그놈을 만신창이로 만든 사내에게 박수라도 쳐 주고 싶었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런 사내를 찾아서 오가장에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추몽아, 그 사람이 금무혼이다.”
냉북두가 적자강에게 전해 받은 용모파기를 내어 놓았고, 적자강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의 일부를 추몽에게 알려 주었다.
“당장 애들을 모두 풀겠습니다.”
제6장 세상에 두 번이란 없다
수하들이 주명산에서 실어 온 아홉 구의 시신을 바라보며 구사성의 눈에는 불길이 일었다.
일원대(一元隊).
곡칠을 포함하여 열 명이라는 적은 숫자로 이루어진 일원대지만, 그들의 능력은 보기당에서 상위에 속했다.
오극의 능력이 가볍지 않고, 특히 두 호위의 무공을 익히 알고 있던 구사성이었기에 그 한 명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일원대를 투입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구사성의 눈앞에 드러난 결과는 놀라운 정도가 아니라 처참한 것이었다.
“어디 한번 보지.”
구사성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급히 돌아서며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고, 구사성으로서는 감히 고개도 들 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오가장의 도발에 대비하기 위해 흑맹에서 귀빈으로 초청한 노도권(怒濤拳) 백방생(白方生)이 구사성을 스쳐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초식을 사용했는지 흔적으로는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구사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검을 사용하는 이들은 상흔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아홉 구의 시신에서 구사성은 상대의 검식을 알아낼 만한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아, 초식은 무슨 초식인가! 쾌검을 사용하는 자일 뿐이야. 단, 지독하도록 정확하고 빠른 쾌검이야. 복건성에서도 변방인 이곳에 이 정도의 쾌검을 사용하는 이가 있다니, 궁금증이 이는군.”
노도권(怒濤拳) 백방생(白方生).
그의 권력이 비바람에 화가 난 물결과도 같다고 해서 지어진 별호가 바로 노도권이었다.
중원무림에서 일절에 꼽히는 수준은 아니라 하지만 그의 권은 흑맹에서도 서열을 정한다면 오십 위 안에는 손쉽게 들어갈 무인이었다.
흑맹에 있어 보기당은 중요한 재정 지원처였다.
보기당이 복건에서 자리를 잡아 감으로써 흑맹의 재정은 전보다 나은 실정이었다.
그러했기에 보기당의 생각을 알고 있는 흑맹에서는 백방생을 이곳 복건성으로 보낸 것이었다.
보기당과 대립하고 있는 오가장에서 백무련을 이끌고 있는 사마세가를 등에 업고 도발을 취한다 하더라도 백방생이라면 별무리 없이 중재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전쟁이 일어났다면 불가한 일이었지만 아직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니 강호에 경험이 풍부한 백방생을 보낸 것이었다.
물론 오가장과 보기당이 전면전을 벌인다면 그것은 보기당과 오가장의 전쟁이 아닌 흑맹과 사마세가의 전쟁이 될 터, 흑맹이 전쟁을 원했다면 백방생 하나만 복건성으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흑맹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최소한 현 보기당에서 흘러들어 오는 재정에 대한 안전장치만 해 두고 싶은 것이었다.
“흠…….”
시신들을 자세히 살펴보던 백방생은 나지막이 침음성을 흘렸다. 아홉 구의 시신과 아홉 개의 상처가 시사하는 바는 큰 것이었다.
더군다나 한두 구를 제외하고는 시신에 난 상처들이 제각기 위치가 다르다는 것 또한 그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일검을 펼치면 최소한 서너 명의 목숨은 거두었다는 뜻이었고, 상대는 이미 사람의 목숨을 수없이 다루어 본 무인이라는 백방생의 판단이었다.
“살아 있는 이가 있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만나 보아야겠군.”
두 팔을 잃어버린 곡칠은 이미 무인으로서의 생명이 끝이 났다. 백방생이 그를 통해 상대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인상착의와 나이뿐이었다.
“아무래도 쉽지 않은 적을 만든 것 같아.”
백방생의 말을 구사성 또한 인정하고 있었다.
일원대를 저토록 쉽게 무너트릴 수 있는 인물인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이러한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 사람의 뒤를 지원해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정도의 무위를 지닌 사람과 반목한다면 오가장이 입을 피해는 상당할 것이고, 그것이 오히려 보기당에서는 기회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바닥으로 뿌려진 물을 다시 담을 방법은 없었다.
“오가장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쉬쉬하였으니 아직 모를 거라 생각합니다.”
“알 수도 있다는 말이군.”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정확하게 알아보게. 그들이 과연 알고 있는지, 그것이 매우 중요하네.”
“조사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