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년 전 비연의 앞에 나타나 그녀의 방심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심어 준 이 사내를 그녀는 가가라 부르고 있었다.
기녀이기에 상대에 대한 호칭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대인이라 부를 수도, 공자라 부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연은 사내를 가가라 불렀다.
사내의 허락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가가라 부르는 비연의 행동을 사내는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사내가 비연을 품으로 안을 때의 열정은 오 년 전 단 한 번뿐이었다.
청루에서 잠자리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기녀의 생을 끝내는 것과 같은 일이었고, 또한 청루가 아닌 홍루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비연은 그날 밤 사내의 품에 안겼다.
깊은 잠에 빠져 본 적이 없던 비연은 처음 본 사내의 품에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어미의 품이 그러했을까?
비연은 사내의 품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느꼈다.
욕정의 대상이 아닌 부모와 같은 느낌.
비연은 지금도 그 느낌을 잊지 못했다. 처녀지신이 파괴되는 고통도 그 편안함 안에서 사라져 버렸을 정도였다.
그날 밤의 편안함은 날이 밝아 사라지는 달과 함께 사라져 버렸고, 그 후 오 년여 동안 단 한 번도 그와 같은 편안함을 느껴 보지 못했다.
‘마음속의 고리가 풀리는 날, 가가의 곁에 있는 사람은 분명 저뿐일 것입니다.’
그녀는 이 사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사내가 독백처럼 흘렸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 년간 사내의 독백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사랑이 피어났다.
또르르륵.
옥으로 만든 술잔에 죽엽청이 채워졌다.
이곳 화옥루에서는 죽엽청을 팔지 않았지만 이 사내에게는 예외였다.
그는 죽엽청을 원했고 여인은 그가 원하는 것을 항상 내어 놓았다.
차려진 안주가 황상의 주안상과 다를 바 없었지만 사내는 단 한 번도 안주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그것은 사내도 알고 여인도 알았으며 화옥루에 몸담은 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비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누가 문을 두드리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기다리세요.”
비연이 문밖을 향해 소리 내자 곧 인기척은 사라졌고 비연은 다시 사내의 얼굴을 아련히 바라보았다.
“과하게 하셨어요. 자리를 보아 두겠습니다.”
비연의 말에 처음으로 사내의 눈이 비연에게 향했다.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빛이었지만 비연은 사내의 그 눈빛 또한 좋았다.
“가가, 늦지 않을 겁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비연은 아쉬운 눈빛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
“오늘은 손님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늘 그랬다.
손님 같지도 않은 저놈만 이곳에 이르면 비연은 그날 손님을 받지 않았고, 또한 저놈이 무심하게 떠나고 난 후면 며칠이고 비연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비연아,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니?”
이곳 화옥루의 주인인 매염옥은 그런 비연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하지만 오늘은 어려워. 도지휘사사가 이곳을 찾았고, 이미 네가 있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다.”
도지휘사사라면 나라의 녹봉을 받는 최고의 권력자였다.
얼마 전 복건성의 도지휘사사가 좌천하고 남경에서 새로운 이가 부임을 한 뒤, 그는 꽤 자주 이곳을 찾는 편이었다.
“아프다고 말해 주세요.”
비연의 말에 매염옥이 난처한 기색을 하였다.
“힘들다. 다른 날은 모두 네 뜻대로 하더라도 오늘만은 불가능해. 이미 날을 잡고 오신 분이야.”
“하지만…….”
“비연아,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날을 잡고 온다는 것은 예의를 다 했다고 봐야 돼. 그 예를 저버린다는 것은 오늘 당장 우리 화옥루의 문을 닫자는 것과 같은 일이야.”
복건성의 도지휘사사로 부임한 곽승인은 비연과 이미 일면식이 있는 이였다.
헌앙한 외모에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중했고, 이미 본처를 먼저 떠나보내고 아들 하나만 둔 중년인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비연이었기에 더욱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비연에게는 지금 별실에 있는 사내가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욱 컸다.
그가 떠나면 언제 다시 자신을 찾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루도 그 사내가 그립지 않은 날이 없는 비연에게 그가 찾은 오늘만큼은 함께하고 싶었다.
물론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안아 준 적은 없었지만 곁에서 그의 체취를 맡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비연이었다.
지금 기녀로 살아가는 비연에게 유일한 즐거움이 바로 그것이었고 그 즐거움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려울 것 같았다.
매염옥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당부하는 것은 그저 아프다는 핑계로 돌려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사실을 비연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제 손으로 자리를 보아 드리고 곧 갈게요.”
비연의 말에 매염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너무 늦지 말고.”
매염옥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비연은 종종걸음으로 사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급히 문을 열어 방으로 들어간 비연의 눈에는 흩어진 술병과 비워진 잔만 보였다.
‘이제 언제 오실 건가요.’
조금 전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비연의 눈에는 습기가 아롱져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
금무혼.
그가 이곳 복건성에 닿은 것은 십여 년 전이었다.
복건성 혜안에 위치한 주명산에 초옥을 짓고 살아온 세월이 십여 년이었지만, 그가 복건성 혜안에서 이름 석 자라도 알고 있는 이는 채 세 명에 이르지 않았다.
취기에 젖어 화옥루를 벗어나 관도를 걷는 무혼의 걸음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내력을 일으켜 주독을 몰아내려 마음만 먹는다면 두 걸음도 옮기기 전에 몰아낼 수 있지만 무혼은 그리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공명음이 울리는 것 같은 이 느낌.
세상의 모든 사물이 흔들리는 것 같은 이 느낌이 좋았다.
혼란한 가슴속과 같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야 일치가 되는 듯했다.
갈지자로 걷던 걸음을 멈추고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미 꽉 찬 만월이 무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보름달을 볼 때마다 폭주하는 자신의 마음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처음에는 만월이 뜨는 밤에는 자신이 기거하는 초옥에서 밖으로 벗어나지도 않았다.
만월을 대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잊었다고 생각한 그때, 초옥을 벗어나 만월을 보았다.
그 결과는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게 폭주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한 그날, 금무혼은 화옥루의 비연을 만났다.
폭주하는 마음과 육체를 그녀에게 실었고, 그녀는 마치 평생을 함께한 아내처럼 자신을 안아 주었다.
미안했다.
그 이후 그녀를 단 한 번도 안아 준 적이 없었다.
오 년 전 그날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욕구를 받아들여 주던 여인 비연에게 그 이후 자신의 행동은 잔인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안을 수 없었다.
다시 그녀를 안는다면 또다시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늪으로 빠져 들어갈 것 같았다.
금무혼은 그것이 싫었다.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 싫은 것이었다.
“어이!”
만월을 바라보는 무혼을 가로막고 부르는 사내들은 꽤나 험상궂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쏘아보는 사내들을 한번 훑어본 무혼이 관심도 없다는 듯 걸음을 옮기자, 한 사내가 오른발을 내밀어 무혼의 발을 걸었다.
철버덕.
무혼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짐과 동시에 사내들의 구타가 이어졌다.
“개새끼, 어디 얻어 처먹을 데가 없어서 몸 파는 기녀에게 빌붙는 것이냐!”
“저런 새끼는 아주 죽여야 돼.”
“그럼! 고자를 만들어 다시는 출입을 못하게 해야 돼!”
사내들은 그렇게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들의 체중을 실어 무혼을 짓밟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손짓 한 번이면 이승과 이별을 해야 될 사내들이었지만 무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퍽퍽!
사내들의 발길질에서 아프다기보다는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누구에게 맞아 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일었다.
한참 동안이나 이어진 발길질이 잦아질 때쯤 세 명의 사내들과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이지는 않으마. 화옥루의 비연이 네놈을 포기하지 않거나 네놈이 다시 이곳에 나타난다면 그때는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 오극이 필히 너를 죽음에 이르게 해 주마. 명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엄포였다.
목숨을 담보로 한 엄포는 일반이라면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스산한 목소리를 동반했지만 무혼에게는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크하하핫!”
만월을 향해 무혼이 광소를 터트렸다.
인위적인 웃음.
진정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터질 것만 같은 속을 털어 버리려 하는 금무혼의 몸짓이었다.
***
동이 터 오기 전에 초옥을 벗어나는 무혼은 어젯밤의 과음으로 인한 숙취와 뒷골목 건달패에게 매를 맞은 자리가 욱신거리고 아파 왔다.
내력을 전혀 일으키지 않은 채 술을 먹고 매를 맞았으니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오 년을 지내 왔음에도 처음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이다.
짐작해 보건대 화옥루의 주인의 명을 받았을 가능성이 가장 농후했다.
화옥루를 찾을 때 곱지 않은 시선으로 자신을 쏘아보던 중년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럴 만도 하지.’
비연을 입장을 생각해 맞아 준 것이었다.
자신이 손을 쓴다면 화옥루에서 비연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 때문에 곤란할 때가 적지 않을 것인데 어설픈 주먹에 맞아 주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인가?’
무혼의 눈이 지게를 지고 산등성이를 올라오는 노인에게 향했다.
한 사람이 지고 오기에는 많은 양의 물건을 지고 오는 장 노인이었다.
장 노인에게 물건을 받아 든 무혼이 초옥 앞에 내리는 동안 장 노인은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휴. 이제는 늙었나 봐. 이곳을 오르는 것에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니.”
의자에 앉아 다리를 두드리는 장 노인 모습에 무혼이 말문을 열었다.
“제가 한번 봐 드리겠습니다.”
“아니네. 병이라면 몰라도 늙어서 그런 것이니 괜한 수고 할 필요가 없어.”
무혼은 장 노인에게 늘 은자를 건네주기는 하였지만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십여 년 동안 이곳으로 생필품을 가져다준 장 노인.
그는 오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명산 일대에서는 이름난 사냥꾼이었다.
하지만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세월은 그에게 나이를 가져다주었고 예전의 근력과 날렵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호기는 어쩌시고 혼자서 오십니까.”
“좀 그럴 일이 있어.”
아들에 대한 대답을 꺼려 하는 느낌이 들어 더 이상 묻지 않는 무혼이었다.
“많이 준비했네. 이번에 다녀가면 꽤나 오래 오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오랫동안 오지 못한다는 말에 의문을 느낀 무혼이 장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