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동안 배운 보법과 봉법을 다시 수련하는 장호기로 인해 주명산의 정상에는 끊임없는 기합성이 울렸다.
이제 하루.
어느덧 보름의 시간이 지나고 내일이면 장 노인과 장호기가 징병이 되는 그날이었다.
“호기야.”
“예.”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뼈가 되고 살이 된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체득한 호기였기에 무혼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중요한 것은 상대를 베는 것이 아니라 네가 상대의 병기에 당하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순간에도 당황하지 말거라. 목숨이 위험할 것 같으면 차라리 팔을 하나 내어 주는 게 낫다.”
“명심하겠습니다.”
“비록 보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네가 배운 것이라면 웬만한 수적들에게 그리 쉽게 당할 수준이 아니다. 병기에서 파공음이 크게 일어나는 자를 피한다면 네 한목숨 보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알겠습니다.”
보름간의 수련은 장호기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무혼이 내심 만족할 정도이니 그 스스로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고, 지금 무혼은 무엇보다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전쟁터는 겪지 못한 사람에게는 크나큰 충격을 줄 수 있는 곳이었다.
인간으로 다른 이들의 피와 죽음을 본다면 그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전쟁에 임한 자는 그러해서는 안 된다.
그 충격 속에서 헤매다 보면 어느새 명부에 이름을 새겨 넣는 곳이 전장이었다.
장호기가 사냥을 통해 짐승들을 다루어 보았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짐승과 사람과의 차이는 있는 법이었고, 무혼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투에 임하면 상대를 사람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 네가 그를 죽이지 않으면 그가 너와 너의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돼. 단 한시의 망설임에 너의 생명이 오고 간다는 것을 잊지 마라.”
“예.”
***
밤이 아닌 낮에 주명산을 내려가기로 마음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장 노인과 호기의 소식이 궁금하기도 했고, 지난번 준비해 두었던 생필품이 바닥을 보이는 것도 한몫을 했다.
‘우선 장 노인 집에 들러 보아야겠구나.’
돌아왔다면 분명 자신을 먼저 찾을 이들이었지만 행여나 하는 생각에 장 노인의 집에 들러 볼 생각을 하는 무혼이었다.
주명산을 내려오는 무혼은 기감을 열었다.
새벽 운공을 할 때나 열어 두는 기감이었지만, 지금 무혼은 살기를 느꼈고 동시에 기감을 열었다.
‘어디인가?’
고개를 돌리는 무혼은 살기가 점점 짙어짐에 의문을 느꼈다.
채채챙!
그가 느낀 살기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꽤나 먼 거리에서 울리는 기성.
그것은 병기들이 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소리였다.
주명산에 오르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른 성도에 비해 무인이 많지 않은 곳이 바로 복건성이었고, 또한 이곳은 복건성에서도 변방이라 할 수 있는 혜안이었기 때문이다.
무혼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관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기성이 일어난 장소가 장 노인의 집이 위치한 곳이었다.
물론 장 노인이나 호기가 저러한 기운을 쏟아 내지는 못할 것이지만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무혼의 발이 미끄러지듯 소리가 일어난 방향으로 쏘아져 갔다.
채채챙!
‘개방의 제자군.’
거지 차림이라고 모두 개방의 제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내의 허리에 매여 있는 매듭을 알아보는 이라면 사내가 개방의 제자임을 알 수 있었다.
천하제일방을 자칭하는 개방.
또한 무림에 몸담은 무인들은 몇 가지에 있어서는 개방이 천하제일이라 인정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가 방도의 수였고, 두 번째는 그 방도의 수를 이용한 개방의 정보 수집 능력이었다.
삼결이면 분타주 바로 아래였다.
그렇다면 그 무공이 가볍지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개방의 제자를 공격하는 두 명의 흑의인 또한 무공이 가볍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풀어 주면 너희들은 놓아주마.”
개방의 걸개가 몸을 물리고 두 명의 흑의인들을 쏘아보며 말문을 열었다.
흑의인의 뒤로 바닥을 뒹굴고 있는 보자기가 무혼의 눈에 들어왔다.
‘납치라도 한 모양이군.’
“웃기는 놈이군. 지금 자기 목 하나 간수하기도 어려운 놈이 어디서 허세를 부리는 거냐?”
“네놈들이 더 웃기는구나. 오가장의 놈들임을 뻔히 알고 있는데 감히 오가장이 개방과 일전을 벌여 보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개방의 걸개는 상대를 오히려 더욱 핍박하고 있었고, 그의 말에 두 흑의인의 몸이 흠칫했다.
“네놈이 죽어야 할 이유가 늘었구나.”
스스로 오가장의 사람임을 확인시켜 주는 말이었다.
“내 예상이 맞았군. 또 그 오극이라는 놈이 지시한 일이겠지. 하여튼 그놈, 인간말종이라니까. 퉤!”
개방의 걸개가 짜증이 치미는 듯 손바닥에 침을 뱉고는 타구봉을 더욱 굳게 말아 쥐었다.
흑의인을 향해 쏘아져 가는 걸개의 봉은 마치 개를 때려잡듯이 흑의인들의 아랫부분을 찔러 갔다.
‘타구봉법(打狗棒法)이군.’
무혼은 한눈에 걸개의 봉법을 알아보았다.
개방의 제자들이라면 누구라도 수련을 해야 하는 봉법이 타구봉법이었고, 그중 삼십육 개의 투로를 가진 봉법이 바로 지금 무혼의 눈에 보이는 삼십육로 타구봉법이었다.
두 명의 흑의인을 밀어붙이는 타구봉의 흐름이 유연하고 현묘했다.
하지만 두 흑의인 또한 상대의 봉법을 잘 알고 있는 듯 절묘하게 피해 내며 연수를 통해 개방의 제자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 모습을 바라보던 무혼의 눈에 위급한 상황에 처한 개방의 걸개가 보였다.
관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개방이라면 과거에 절친했던 지인이 몸을 담고 있는 곳이었다.
쿵!
가볍게 진각을 밟는 무혼.
그에게 있어서는 가벼운 진각이었지만 그것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땅거죽이 균열을 일으켰다.
기묘하게도 개방의 제자를 스쳐 지나가는 균열은 두 명의 흑의인 앞에서 굉음을 만들어 내었다.
콰쾅!
혼비백산.
그렇게 두 흑의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또 한 번의 파공음이 허공을 갈랐다.
피핑!
“큭!”
“윽!”
단말마의 비명이 일고, 오가장의 무인이라는 두 흑의인은 마치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개방의 걸개가 급히 고개를 숙이며 포권지례를 취하였다.
“누구신지 알 수 없으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개방의 이결제자 초립이라 합니다. 모습을 보이시어 오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십시오.”
그렇게 인사를 하는 초립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
혜안(惠安)현은 바다의 인근에 있어 그 저잣거리는 내륙의 다른 성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비릿한 냄새가 늘 저잣거리를 덮고 있었지만 그것을 싫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비릿한 냄새로 인해 이곳 혜안현의 사람들은 다른 여타의 성도들보다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물전이 형성된 저잣거리를 걷는 무혼에게 활기에 찬 사람들의 모습은 어색하게 다가왔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떤 물건이 어느 상점에서 파는지, 또한 그 상점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 물어도 가르쳐 주기야 하겠지만 무혼은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행여나 눈에 보이지 않고 찾지 못하면 다음에 내려와 구입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시장함을 느낀 무혼이 국수를 파는 가게를 발견하고는 멈추어 섰다. 흔히 팔고 먹을 수 있는 국수였지만 그에게는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국수를 삶는 향이 무혼의 시장기를 더욱 부추겼기에 안으로 들어 자리에 앉았다.
“국수 드릴까?”
“예.”
이름난 국수집인가?
무혼이 앉기 전까지 간간이 비어 있던 자리는 곧 사람들로 가득 찼고 국수를 삶는 할머니의 손길은 더욱 빨라졌다.
부옇게 올라오는 수증기 사이로 국수의 면발이 담기고, 곧 무혼이 앉은 탁자에 놓였다.
“많이 드시게.”
넘칠 듯한 국수의 양만큼이나 주인 할머니의 정이 가득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했지만 이내 돌아서는 할머니의 등을 보고 무혼은 그 말을 삼켰다.
스스로 멋쩍음에 곧 국수의 면을 입 안에 넣는 동안 무혼의 눈에 세 명의 남자가 보였다.
‘그놈들이군.’
피식.
가벼운 미소를 지은 무혼은 사내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얼마 전 화옥루를 벗어나는 자신에게 주먹다짐을 했던 사내들이었다.
‘저놈은 장부덕!’
무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십 년이 넘은 세월과 그날 저녁의 취기가 만만치 않아 알아보지 못했지만 사내의 얼굴은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장부덕이었다.
혜안의 인근 선유현에서 꽤나 부잣집의 아들이었던 장부덕은 과거 무혼의 손에 사경을 헤맨 적이 있는 이였다.
콰르르르.
장부덕의 손에 전을 펼쳐 두고 장사하는 이의 좌판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돈을 주고 장사를 해야지!”
장부덕이 좌판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인을 죽일 듯 쏘아보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또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어. 누가 저놈들 좀 안 잡아가나.”
국수집 노인이 행패를 부리는 장부덕과 그 일행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가장은 돈도 그리 많다면서 어떻게 저런 놈들까지 동원해 세를 거두는지, 내 원!”
보기 안타까운 듯 노인이 몸을 돌려 주방으로 가 빈 그릇을 치우고 있었다.
‘쓸데없는 매를 맞았군.’
무혼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국수집 노인의 말로는 오가장이라 했고, 그 말은 곧 화옥루와는 어떤 관계도 없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오호, 요놈 보게!”
가장 먼저 무혼을 발견한 장부덕이 묘한 표정을 만들어 내며 다가왔다.
만일 장부덕이 과거를 기억하고 상대가 금무혼임을 알았다면 그의 앞으로는 다가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십여 년이 넘은 그 세월 동안 변화된 무혼의 얼굴을 장부덕이 기억할 수는 없었다.
“다시는 눈에 띄지 말라고 했을 텐데.”
깍지를 말아 쥐고 소리를 내어 위협을 하던 장부덕이 금무혼이 앉은 탁자를 걷어찼다.
쾅!
“크헉!”
당연히 탁자가 뒤집어지고 국수 그릇이 깨어져야 했지만 그릇에 담긴 국물 한 방울도 바닥에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발을 감싸 안고 바닥에서 비명을 지르는 동료의 모습을 나머지 사내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라져. 그날 한 번으로 족해.”
스산한 목소리에 사내들은 잠시 움찔했지만 얼마 전 자신들에게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던 무혼을 떠올렸다.
물론 그 생각이 실수였지만.
“이 새끼……. 큭!”
채 말을 다 잇지 못하는 사내였다.
자신의 어깨에 닿아 있는 손가락.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손가락은 닿아 있었고, 그저 닿아 있을 뿐인데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물론 다른 한 명의 사내와 자신의 발을 만지던 장부덕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모두들 상체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그들을 내버려 두고 국수를 먹던 무혼이 그릇을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부덕, 네놈의 행실은 변한 게 없군.”
장부덕은 금무혼이 자신의 이름을 꺼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금무혼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으으으…….”
고통에 말을 잇지 못하고 신음만 흘리고 있는 장부덕을 한참이나 쏘아보던 무혼이 걸음을 옮겼다.
‘저놈들이 왔으니 그놈도 왔겠군.’
얼마 전 바닥을 뒹굴던 자신을 위협한 사내를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만들어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