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전, 한(翰)국.
“죽여라!! 죽여!!”
“이 세상에 마녀 따위는 필요 없다.”
“당장 저 년을 불에 태워 죽여라!!!”
시끄러운 소리. 나무에 묶인 해랑은 천천히 눈을 떴다.
“마녀가 눈을 떴어!!”
“우리한테 저주를 걸기 전에 얼른 죽여 버려야 해!!”
“주 선님, 얼른 저 마녀를 죽여 버려요!!”
‘주 선’ 이란 이름에 해랑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그녀의 시선이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남성에게 닿았다. 왼쪽 팔에는 날렵한 매가 그려진 완장을 차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해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길 바랐는데, 다른 마녀들의 착각인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구나. 이미 죽어버린 마녀들에게는 어떤 식으로 사죄를 해야 할까.
“해랑.”
해랑의 앞까지 다가 온 주선이 불렀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외면했다.
휙
주 선의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붙잡고는,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뭐 하는 거야?”
해랑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길 바랐어.”
“........”
“헛된 소문이길 바랐고, 마녀들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게 사실이 아니길 바랐어. 근데...”
“아니야. 난 아니라고 계속 이야기했어. 그걸 안 믿은 건 너야. 이렇게 된 거 속 시원히 얘기 좀 해보자. 네 심정은 어때? 그렇게 거슬리던 마녀들을 싹 다 잡아 죽였잖아.”
주 선이 뭐라고 대꾸하려는 찰나,
“주 선님.”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해랑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해원군.”
“오랜만입니다. 해랑님. 아니, 오랜만이라고 하면 좀 그런가요. 꼴이 말이 아니십니다.”
속을 뒤집어놓을 정도로 얄미운 말투였다. 해원군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마녀들을 잡기 위해 유약한 자신의 주군을 이용한 것까지는 좋았다. 설마 마녀가 인간에게 홀려 본거지를 알려줄 줄이야. 10년이 넘게 걸렸지만, 이제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 선님. 이제 마지막입니다. 화형대에 불을 붙이시기를.”
그는 주군의 손에 횃불을 쥐어주었다. 마지막 남은 마녀를 죽이라는 사람들의 함성이 점점 커졌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이딴 개 좇같은 세상에 할 말 따위가 있겠냐? 그래도...”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주 선의 모습이 비쳤다.
“굳이 남기라면, 다음 생에서는 절대 만나지 말자. 우리.”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몸과, 나무 제단에 불이 붙었고 함성이 더욱 거세졌다. 1000년 전, 한(翰)국. 마지막 마녀인 해랑은 그렇게 죽었다.
*
그리고 21세기 한국.
“그게 끝이에요?”
“뭐야, 시시하게.”
육교 위에 서 있던 젊은 커플이 투덜거렸다.
“떽!! 시시하긴. 자, 이야기 해 줬으니까 물건 하나 사 줘.”
가판대를 깔고 물건을 팔던 노파가, 버짐 핀 손을 내밀었다.
“웃기지 마요. 마녀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해준다고 해놓고, 다 아는 얘기만 했잖아. 할머니한테 살 건 없어요.”
“오빠, 그냥 가자.”
커플이 자리를 뜨자 노파가 혀를 찼다.
“에잉, 쯧쯧 하여간 요새 젊은 놈들은 어른 이야기를 귀 담아 들을 줄을 몰라. 끝이라곤 한 마디도 안 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인 걸.”
그때, 가판대에 놓여 있는 거울에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는 솔라의 모습이 비쳤다.
현재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인구는 구루마 60%, 마녀 30%, 씰 5%, 제로5%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마다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구루마들의 숫자가 많다. 구루마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씰은 능력 발현의 가능성이 있는 구루마를 일컫는다. 제로는 말 그대로 실패작. 씰과는 달리 능력 발현의 가능성 조차 없는 이들을 뜻했다. 마녀들끼리 결혼해서 낳은 자식들 중에 드물게도 제로가 있는데, 그들은 마녀의 능력을 전혀 갖지 못한 채 태어났다. 구루마에도 속하지 못 하고, 마녀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쌍한 녀석들이다.
도심 곳곳에는 ‘21세기에 마녀가 웬 말이냐’, ‘사탄의 자식은 꺼져라’ 와 같은 플랜카드들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빌딩 전광판에서는 최근 들어, 마녀와 구루마. 서로 간을 향한 테러가 더욱 심해졌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솔라의 시선에 빗자루를 운전하는 마녀와 뒤에 탄 구루마들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친 그들은 멋쩍은 웃음만 지어보였다.
구루마를 빗자루에 태우고 하늘을 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빗자루에 맛 들린 그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횟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자, 관련 업계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정부가 선택한 방식은 간단했다.
구루마들을 빗자루에 태우고 날지 말 것.
방법을 찾는 대신 법으로 금지해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참으로 단순했다. 그 단순함이 결국 자기들을 멸망시켜 버린 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속으로 혀를 차던 솔라는 이윽고 베란다로 내려섰다.
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솔라야, 솔라야!!!”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요란스런 발소리가 들렸다. 쾅, 하는 소리를 내면서 박력 있게 방문이 열렸다. 앳된 얼굴에 교복을 입고 있는 소녀였다.
“너, 내 카드 정지했어?!”
“내가 방에 들어올 때는 어떻게 하라고 했지?”
솔라가 쳐다보지도 않고 싸늘하게 되묻자, 소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똑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얌전하게 문이 열렸다.
“내 카드 정지 했어?”
“어.”
“왜?!”
“야, 유선영. 니가 그 카드로 한 달에 얼마나 긁고 다니는 지 알아? 그게 네 돈이면 말을 안 한다. 네가 쓰고 다니는 거, 죄다 내 돈이잖아.”
“치, 쩨쩨하게 그거 가지고 그러냐? 신세 진 거 갚는다고 생각하지.”
“네가 쓴 돈의 액수를 생각하면 이미 갚고도 남은 것 같은데.”
“......”
“네 할머니한테 이르기 전에 말까지 마라.”
“겉보기엔 나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면서...”
툴툴거리던 선영은 솔라와 눈이 마주치자,
“네, 안 깔게요. 죄송합니다.”
라고 했다. 그리고,
“고조할머니 제사 날인 거 알지..요? 할머니가 가능하면 꼭 와 달라고, 전해 달랬어..요.”
솔라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
.
.
“할머니!!! 솔라 또 도망갔어!!!”
선영의 우렁찬 외침에, 제사상 앞에 서 있던 유 노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한 번쯤은 같이 제사를 지내줬으면 싶은데. 그녀는 영정 사진을 향해 말을 걸었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아직은 무리인가 봅니다.”
그 심정을 안다는 듯, 흑백 영정 속의 노인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
콰아앙---
어두워진 하늘을 날아가던 솔라는, 느닷없이 들린 굉음에 밑으로 향했다. 제사에 참여하기 싫어 무작정 나왔더니, 교통사고를 목격하네.
뒤집어진 흰색 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덤프트럭과 가드레일에 처박힌 채 연기를 뿜고 있는 미니 승용차 한 대.
덤프트럭의 목적은 흰색 밴이었던 것 같았다.
트럭의 문을 열고 내린 사내는 망설이지 않고, 흰색 밴을 향해 다가갔으니까.
“괜찮으십니까?”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차에 깔려 있었고, 목에는 유리 조각이 박혀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피가 흥건했다. 당장 숨이 넘어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라휘님. 당신 때문에 죄 없는 사람 하나 죽었잖아요.”
충돌할 때의 충격으로 튕겨나간 운전기사는 목이 꺾인 채 그대로 절명해 있었다.
“얌전히 미국에 계셨으면 좀 좋아요. 왜 한국에 들어와서 이런 꼴을 자초합니까. 당신이 여기 돌아오는 거, 누가 반긴다고 그래요.”
바깥으로 기어 나가려고 했지만, 구루마인 그의 능력으로 차를 들어 올리는 것은 무리였다. 라휘의 발버둥을 지켜보던 사내가 피식, 조소를 흘렸다.
“확실히 목숨을 끊어달라고 했는데, 꼴을 보니 제가 손을 쓸 필요는 없겠군요. 발버둥치지 말고 그냥 죽으세요. 그게 덜 괴롭습니다.”
사내가 덤프트럭에서 휘발유가 담긴 통을 들고 왔다.
그는 휘파람을 부르면서 뒤집어진 밴에 휘발유를 뿌린 후 불을 붙였다. 화악— 거세게 불길이 치솟는 것을 확인한 사내는 빈 통을 가드레일 너머로 던져버린 후, 덤프트럭을 몰고 자리를 떴다.
내일 신문 1면에 나겠군, 신원 미상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라휘는 숨을 골랐다. 화재가 나면 인명피해가 많은 이유가 연기 때문이라더니,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차오르는 연기 때문에 숨 쉬기 힘들어졌고, 차에 깔린 하반신에는 감각조차 없었다. 이딴 식으로 죽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울어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헛된 감정이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울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그때,
“웬만하면 참견 안 하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불 태워 죽일 게 뭐야.”
기적이 발생했다.
검은 염색약을 한 통 들이부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까만 머리카락.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와 붉은색 눈동자. 인상적인 것은 한 손에 들고 있는 빗자루와 그녀를 배경으로 떠 있는 둥근 보름달.
“넌, 마녀?”
“그러는 넌 병신? 사람 알아볼 정신이 있고, 말 할 정신이 있으면 어떻게든 빠져 나올 생각을 해야지. 죽어 달랬다고, 자기 인생 포기하는 사람이 어딨어. 발버둥이라도 쳐 봐야 할 거 아냐.”
억울했다.
네가 갇혀 본 적이나 있냐고, 목숨을 위협받아 본 적이나 있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반신에서 불같은 고통이 일었지만, 이내 잠잠해졌고 점점 의식이 흐려져 갔다. 내가 뭘 어쨌다고, 구루마로 태어난 게 그게 그렇게 잘못이야? 그게 죽어야 할 이유가 되는 거냐고.
“살고 싶어?”
“.........”
“한 가지 말해주자면, 넌 구급차를 불러도 확실하게 죽어. 어쩌면 병원 문턱을 밟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라면 널 살릴 수 있어.”
산다.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근데 살아서 뭘 어떻게 하려고? 언제 죽을지 몰라서 타인을 경계하며 사는 것 보다, 차라리 이렇게 죽는 게 낫지 않나.
“억울하지 않아? 널 이렇게 만든 놈들은 끝까지 잘 먹고 잘 살 텐데, 어딘지도 모르는 장소에서 혼자 이렇게 뒈지는 게.”
“........”
“멀쩡하게 살아서, 그 놈들 눈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 놀라는 표정 보고 싶지 않아? 제대로 복수 한 번 해 봐야지.”
복수? 단 한 번도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지난 10년 동안 외면 받고, 경멸 받아 온 삶에는 너무 익숙하니까. 라휘는 그런 거에 복수할 만큼 속이 좁은 인간은 아니다. 그래도 놀라서 일그러지는 표정은 보고 싶네. 그 정도 권한은 있다고 생각한다.
“..싶어. 도와 줘. 살고.. 싶어.”
마지막으로 힘껏 짜낸 목소리였다.
“좋아.”
작은 주머니칼을 꺼낸 솔라는 망설이지 않고 왼쪽 손바닥을 길게 찢었다. 생각보다 깊게 찢은 것인지 금방 피가 고였다.
“입 벌려.”
설마, 저걸 나한테 먹이려는 거야. 마녀의 피가 지독한 독이 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라휘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네가 뭘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내 능력 특성 상 너한테는 절대로 해가 되지 않아. 진짜야.”
거짓말은 아니네. 붉은 색 눈동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라휘의 입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갔고, 이내 찾아온 것은 온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컥... 커허헉!!”
입가에 피를 묻힌 채 온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는 라휘의 모습은 심히 그로테스크 했지만, 지켜보는 솔라의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괜찮아. 보통은 ..려고...하지..는데... 겉..니라...도...이야...는..거....거야”
뭐라고 말 하는 거야.
급격하게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띄엄띄엄 말이 들려왔다. 의식을 잃으면 안 되는데,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좋은 꿈꾸기를.”
그게, 라휘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