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귀가 천화객잔으로 돌아오자 대문 앞에 나와 있던 대공자가 웃음을 터트리며 반겼다.
“하하하!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잠시 걱정했습니다. 그럴 리 없다고…… 다치셨습니까?”
말하는 도중 진가운의 웃음이 점차 작아졌다. 목을 감싸고 있는 붉은 천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뭐, 그 정도라면 상처도 아니지요.”
진가운은 조금 들뜬 기분을 감추고는 말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진천호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물론입니다. 그놈 따위가 송 호법님의 상대가 되겠습니까? 저는 당연히 이기실 줄 알았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강조하며 말했다. 송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송 호법이 그 사내를 처리한 것이다. 절대로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 같던 무시무시한 자였기에 기쁨은 더욱 컸다.
‘그런데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한 거지?’
진천호는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그는 죽었는데 처음 보았던 그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빨리 본문으로 가시지요. 괜히 다른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지 않겠습니까?”
진가운이 서두르려는 듯 앞서 걸어갔다. 추귀가 그 모습을 보고는 뒤를 따랐다.
차례로 진천호도 그들 뒤를 따라갔다.
한편, 객잔 안으로 들어온 유현승과 영삼은 어안이 벙벙했다.
방 안에 있는 사내에게 돈을 받으러 왔는데 사내는 보이지 않고 부서진 건물만이 자신들을 맞이했다.
더구나 상태는 이전보다 더욱 나빴다.
창문이 부서져 있었고, 창살이 거의 통째로 박살나 있었다. 대대적인 수리를 해야 할 정도로 파손의 상태가 심각했다.
유현승의 눈빛이 당연히 영삼에게로 돌아갔다.
“믿을 만한 녀석이라 하지 않았더냐?”
“…….”
“무언가 다르다고, 그 녀석은 다른 녀석들과 다른 특별한 뭔가가 있다고 네 뚫린 입으로 말하지 않았더냐?”
“그, 그것이……헉!”
유현승은 영삼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그의 눈은 평소보다 더욱 일그러져 있었다.
“이 시간부터 네놈은 생각 같은 것을 마라. 계획하지도, 예상하지도 마라. 그저 머리를 장식용으로 달고 다니며 행동해라. 만약 생각 같은 걸 하면 그날이 네 제삿날인 줄 알거라.”
영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로 외상을 해주지 않겠다고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다.
第五章 잠입
천의문의 문주인 진백양(眞白陽)의 집무실에는 세 명의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큰 문제를 상의할 때면 항상 참여하는 자들로, 오늘도 여지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진백양은 흥분해 있었다.
천의문은 최근 재정난과 더불어 불어나는 문도 수를 감당할 돈이 부족한 상태였다. 과도한 투자와 더불어 세를 늘리다 일이 잘못되어 빚만 잔뜩 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서화문이 협조를 요청했다.
서화문은 천의문과 달리 항주의 상단 대부분을 휘어잡고 있는 문파다.
한때 항주 제일의 문파였던 이곳은 성세가 쇠락해도 재력만큼은 건재했다.
천의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잠시 침묵 중이던 그들 사이로 선비처럼 온화한 인상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천의문 제자들을 책임지는 교관 황진(黃眞)이었다.
“기회가 있다고 무조건 밀어붙이기보다는 그것을 행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봅니다. 무턱대고 힘으로 밀어붙였다간 오히려 우리가 화를 입을 수 있습니다.”
서화문이 과거의 성세에 비해 위세가 줄어들었다곤 하나 그들 역시 항주를 대표하는 문파였다.
그런 자들이 문파를 합치려 드는데 가만히 있겠는가?
그때, 방 안에서 가장 젊어 보이는 노인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는 천의문의 내사를 담당하는 내총관 위구검(魏丘劍)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대공자와 서화문주의 딸인 소령 소저를 이어주기만 하면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닙니까? 그리된다면 서화문의 재력은 순식간에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고, 천의문은 명실 공히 항주 제일가는 문파로 올라설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황 교관이 반박했다.
“내총관, 나 역시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오. 여기에 모인 것도 그런 이유가 있지요. 하지만 그 방법이 문제요. 그동안 많은 문파가 서화문과 맺어지기 위해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소. 하지만 계속 거부를 하니 이렇게 된 것이 아니겠소.”
“정확히 말하면 절강에서 제일간다는 백영문(白映門) 때문이겠지요.”
백영문(白映門).
절강 제일의 문파로 알려진 곳이었다.
내총관이 백영문을 거론했던 것은 서화문이 백영문과의 연결을 은근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되면 되게 해야지요.”
잠시 고민하는 그들에게로 긴 수염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홍검백(洪劍白) 장로라는 자로, 천의문의 대외적인 일에는 항상 참여하는 자였다.
진백양이 눈에 이채를 띠고 물었다.
“홍 장로께서 무슨 생각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 말과 동시에 내총관과 황 교관은 홍검백을 바라보았다.
홍 장로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말했다.
“천의문이 백영문에는 못 미친다고 하나 항주에서는 제일가는 문파입니다. 차후 몇 년만 충실히 내실을 다진다면 능히 그들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서화문의 문주 역시 이 같은 사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소령 소저의 마음입니다. 대공자가 소령 소저의 마음만 얻는다면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자 황 교관이 반박했다.
“그 말을 몰라서 하는 것입니까? 지금 문제는 소령 소저의 마음을 어떻게 얻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홍 장로가 말했다.
“흥분하지 말고 내 얘길 들어보시지요.”
홍검백이 잠시 뜸을 들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소령 소저는 그간 뛰어난 미색으로 인해 많은 사건을 겪었습니다. 옛날에는 문파 내 호위무사조차 그녀를 범하려 한 사건도 있었지요. 그 사건 이후로 그녀는 남자라면 누구든 가까이 두지 않을 정도로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사파에서 노린 뒤부터는 그 증상이 더욱 심해졌고요.”
그는 말을 이었다.
“하여 이번에 우리 쪽에서 뛰어난 무사들은 파견한다 하더라도 서화문에서는 그녀의 호위무사를 따로 배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그녀의 거처 주위를 경계하는 정도의 선에서 마무리하려고 할 테지요.”
홍 장로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를 바라보는 주위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해서 저는 방법을 달리하려고 합니다.”
내총관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끼어들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그녀에게 호위무사로 붙이는 것이 아닌 우리 대공자에게 호위를 붙이게 하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소령 소저가 아닌 대공자의 호위라.”
흑련문의 목적은 소령 소저의 납치였다.
그러니 서화문 문주는 강한 고수들을 그녀 가까이에 배치하려고 할 터였다.
이때 천의문 고수들을 대공자와 함께 행동하게 한다.
그리한다면 문주는 어쩔 수 없이 여식의 거처 주위에 대공자의 거처를 잡아둘 것이다.
자연스레 경계는 허물어질 것이고, 친해질 기회가 많아질 것이다.
홍 장로는 말을 이어갔다.
“저는 기회만 마련해 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공자의 인품과 무공이라면 아무리 낯을 가리는 소령 소저라 하더라도 충분히 마음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대공자 진가운은 항주에서 손꼽히는 미남자였다. 거기다 무공도 뛰어나 같은 연령대에서 적수가 없었다. 풍류의 멋도 알고 있어 뭇 여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 정도의 사내에게 넘어오지 않을 여인이 없다고 홍 장로는 확신하고 있었다.
“꽤 괜찮은 생각입니다.”
회의적으로 바라보던 황 교관의 얼굴이 펴졌다.
억지스러운 계획인 듯했지만 생각해보니 제법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간 홍 장로의 행동을 보건대 단순히 ‘되겠지’라고 생각할 리 없었다.
대공자가 소령이란 여인 앞에 가기만 하면 해결될 계획을 가지고 있는 듯이 말했으니까 말이다.
문주 진백양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다. 이미 검수대(劍守隊)는 파견하기로 약속했고, 이제 정예고수로 누굴 파견할지 의견을 모으는 것이 어떻겠소?”
정예고수.
천의문을 대표하는 고수를 선별하는 작업이 남아 있었다.
황 교관이 말했다.
“호위하는 임무라면 송 호법이 좋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그가 갈 것이란 소문도 저잣거리에 이미 파다하니 막을 이유가 없지요.”
내총관이 말을 거들자 문주와 홍 장로가 동의했다.
지금 천의문에서 몸을 뺄 수 있는 최고 고수로는 송 호법밖에 없었다.
대외적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니 명분도 충분했다.
“좋소, 그리합시다. 자, 모두 이번 일에 각별히 신경 써 주시오. 일이 잘되어 혼례가 이루어지면 천의문도 이제 강호에 이름 있는 문파로 올라설 기회가 되지 않겠소.”
문주의 말에 다들 밝은 얼굴로 화답했다.
앞으로 뻗어 나갈 문파를 생각한 듯 다들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
“성대가 조금 베이긴 했는데 깊은 상처는 아닙니다. 관리만 잘하신다면 곧 말씀하실 수 있을 겁니다.”
추귀의 상처를 살피던 의원이 말하곤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는 항주 내에서도 이름난 자로, 천의문을 전담하는 의원이었다.
옆에서 경과를 지켜보던 진가운이 고개를 숙였다.
“고생 많았네. 난 또 송 호법님께 큰일이 난 줄 알고 노심초사했다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항주 내에서 어느 누가 송 호법님을 해한단 말입니까.”
의원이 웃으며 자리에 일어서자 진가운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쉬십시오. 저는 가보겠습니다.”
의원이 나가자 진가운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도 나가보겠습니다. 쉬십시오.”
이내 둘이 방을 나가자 그제야 추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송이란 자의 방을 둘러보았다.
단출한 데 비해 격식이 느껴지는 방이다. 학문에 제법 관심이 있었는지 커다란 책장에는 많은 서책이 꽂혀져 있었다.
추귀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송에게서 가지고 온 그의 도(刀)를 꺼내 살폈다.
넉 자에 달하는 길이에 폭이 꽤 넓었다. 크기 때문인지 일반적인 도보다는 상당히 무거운 편이었다.
무공에 약한 자들이라면 쉽게 선택하지 않을 대도였지만 왠지 모를 멋이 있었다.
거기다 커다란 날에서 새어 나오는 예기가 보통의 도가 아니라 말해주고 있었다.
추귀는 도자루를 들고 한 번 휘둘러보았다.
그그그극.
스릉.
주위가 요동치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추귀는 다시 도의 면면을 둘러보며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거추장스러운 초식이 많다 했더니 칼에 맞게 초식도 개량했던 것이로군. 평범한 도가 아니다. 생각보다 빠르고 날카롭다.’
그는 송 호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그의 초식들은 하나같이 거대한 파괴력을 지닌 초식이었다. 화려한 초식도 곳곳에 들어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무겁고 강력한 초식이 많았다.
‘정리를 해봐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