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사람을 데려오셨습니까? 제가 그놈의 동정심 좀 그만 발휘하라 말씀드렸었죠!”
브리니는 노기 띤 집사를 지나쳐 소파에 안착했다. 가죽 소파가 푹 소리를 내며 작게 꺼지자, 옆에 산처럼 쌓여있던 서류들이 카펫 위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소파 위의 것들이 무너지자 곧 그 영향을 받은 책상 위 서류들도 뒤따라 무너진다. 그 모습은 마치 도미노를 보는 것처럼 즐거워 보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뇌 활동이 정지된 인물에 한해서였다. 브리니는 결국 집사의 눈치를 보며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이번 일 역시 대수롭지 않은 척 넘어가기 실패다.
“내가 내 땅에서 사람 하나 못 거둬? 넌 사람이 어찌 그리 무정해?”
“방금 백작 님이 행동이 더 무정하다 생각되지는 않으십니까?”
집사는 이제 노기를 넘어서 차갑게 식어버린 낯을 하고 있었다. ‘크흠.’ 헛기침을 한 브리니가 무너진 서류들을 주섬주섬 주워 올린다. 첫 번째 종이는 영지 소속 농가에 대한 지원 관련. 두 번째 종이는 제국 국고 보유 현황. ‘―잠깐, 국고라고? 라슬란은 도대체 이런 국가 기밀을 어디서 훔쳐오는 거야?’ 브리니가 사색이 된 얼굴로 두 번째 종이를 책상 위에 덮어버린다.
“아, 그렇지. 이리로 오렴 로일.”
그녀의 부름에 이리저리 주위를 보던 로일이 어깨를 움찔한다. 이제 겨우 그녀의 허리쯤 닿아 보이는 소년은 시도 때도 없이 놀라느라 바빠 보였다. 잘 먹지 못해 안색도 누렇고, 옷도 낡고 냄새나고. 그래도 하녀에게 보내 빨래마냥 빡빡 씻겨 놓으니 이제야 좀 사람 같아 보였다.
“저 아저씨의 눈치는 볼 필요는 없어. 내 집사는 아마 황제를 데려와도 신경질부터 낼 걸? 걱정 말고 이리 와서 앉아, 네게 해야 될 말이 있단다.”
“아, 안녕하세요!”
힐끔힐끔 집사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소년이 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첫 만남도 그렇고, 브리니는 로일이 어디 가서 미움 받을 아이는 아니라 생각했다.
“그렇게 앞뒤 안 가리고 거두신다 하여 영지 사정이 나아질 것 같습니까?”
한참 기분 좋아지려는 시점. 또다시 집사의 타박이 이어진다. 브리니는 로일을 제 옆에 끌어다 앉히며 집사를 향해 뱁새눈을 떴다.
“무슨 소리야? 내 영지가 못 사는 건 순전히 네 탓이야, 라슬란. 잘 써먹으라고 제 작년에는 제국산 소드마스터까지 데려왔는데…… 어째 내 땅의 영지민들은 아직까지도 그 모양이니?”
“그거야 그 양반은 감자 심는 것 따위에 열을 내고 있으니까요.”
“그럼 뒷목이라고 끌고 가서 저어기기에 있는 댐 청소라도 시키든가!”
“어디 노동을 해본 위치입니까, 그 양반이? 제가 그래서 이왕 끌고 올 거 쓸 만한 인물만 좀 데려오라…… 하아. 됐습니다. 말해서 뭐하겠습니까, 제가. 그쪽에 있는 서류들은 이미 다 처리된 문건들입니다. 누락되지 않게 알아서 잘 정리해 놓으세요.”
한숨을 푹 쉰 라슬란이 등을 돌려 방을 나간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곧 아캄파니 백작의 집무실에는 로일과 브리니만이 남게 되었다. 브리니는 자리에 일어서 근처 책상의 서랍을 뒤적였다. 곧 엉망이 된 서랍 내부 사이에서 만년필과 잉크, 깨끗한 종이가 한 장 튀어 나온다. 그런데 그 종이의 상태가 사뭇 기이했다. 잡화들 틈에서 대충 구겨져 있던 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반듯한 형상이었다.
“이건 마도사가 만든 물건이야. 비가와도 안 젖고, 책장 사이에 꽂아 놓아도 안 구겨지지.”
묻지도 않은 물음에 저 혼자 지껄이자, 로일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아마 마도사 무엇인지 잘 모르는 듯 했다. 하긴, 그동안 먹고 살기에만 바쁜 아이었다. 입을 닫은 브리니가 다시 그의 곁에 앉아 무언가를 적기 시작하자, 소년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기……. 백작 님.”
“응.”
“저와 제 어머니를 왜 이곳으로 데려오신 건가요?”
소년은 이제서야 제 옆에 있는 자, 브리니가 아캄파니 백작이라는 것을 확신을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이전과 달리 내뱉는 문장 하나하나가 더 차분하고 바짝 굳은 상태다. 말끝에서는 옅은 떨림이 묻어나오기까지 했으니까.
잠시 제 턱을 톡톡 두들기던 브리니가 입을 열었다.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그야 널 내 저택에 고용하기 위해서지.”
“저, 저 같은 애를요?”
“너 같은 애? 어떤 아이를 말하는 걸까……. 판자촌에 살고,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친구 한 명 없으면 되나?”
로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그러나 브리니의 말을 부정하거나 변명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직설적이고 무례한 화법을 받은 이는 보통 노성을 터트리거나, 쿵쾅대며 도망치기 일쑤였는데. 우습게도 그들 중에서 가장 어릴 게 분명한 소년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야 어찌 되었든 브리니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단지 그녀는 그러한 로일의 성정이 ‘그 일‘에 조금 더 안성맞춤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만약 네가 값비싼 양털로 짜인 베스트를 입고, 초콜릿 몽블랑을 씹으며, 내 얼굴에 토마토를 떨어뜨렸다면. 그렇다면 이 방에 이렇게 나와 앉아 있진 않았겠지.”
로일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진다. 고민과 걱정이 많은 눈치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 어깨와 허리를 쭉 펴고 그녀를 바라봤다.
“제게 시키실 건 무엇인가요?”
굴러 들어온 호박을 아주 야무지게 들어 올릴 만한 표정이다. 브리니는 그 활기찬 표정에 맞대응하여 웃어주었다.
“내 드래곤을 관리해주면 된단다.”
“……예?”
“관리라는 표현은 딱딱하니, 친구라고 정정할게. 그 아이는 지금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어. 야생의 짐승처럼 예민해졌다고 해야 하나?”
로일의 턱이 떡 벌어진다. 그건 노란지붕 할아범이 점점 젊어지는 모습을 볼 때와는 또 다른 표정이었다. 그보다 백 배는 더 충격 받고, 이백 배는 더 정신을 못 차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드, 드, 드래곤 말씀이십니까? 그건 전설에나……”
“생각해보니 순서가 뒤바뀌었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로일. 나와 일하기 위해선 반드시 지켜야할 규칙이 몇 가지 있단다. 못 지킬 수도, 깜빡할 수도 있는 것이 절대 아니야.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
브리니가 책상 위에 던져 놓았던 종이를 로일 쪽으로 밀어낸다. 그 옆에는 함께 꺼내왔던 만년필이 곱게 올려 있었다. 곧이어 그녀가 종이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기묘한 주문을 읊자, 새까만 무언가가 표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로일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까만 기름방울들은 서로서로 응집되어 무언의 형상을 그려나간다. 처음에는 단어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단어가 아니다. 새하얀 종이 속, 빼곡하게 자리 잡은 것은 이름들이었다. 그래. 주인 모를 가지각색의 이름이 그 안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이 종이에 쓰인 이름들은 전부 그 규칙을 지키기로 맹세한 자들이야. 우리는 모두 강력한 마법의 힘으로 얽혀 있고, ᄄᆞ라서 약속을 위배한 자들은 커다란 대가를 받게 될 거다. 그건 아마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겠지.”
소년이 듣기에는 다소 두려운 설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브리니는 늘 그래왔듯 어쭙잖은 사탕발림으로 사람을 꼬드길 생각 따윈 없었다. 자신이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야 할 만큼 힘이 없거나 무능한 존재는 아니었으니까.
“네가 그 규칙을 지킬 수 있다고 내게 약속할 수 있다면. 이 종이에 이름을 적으렴.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란다. 허나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해야만 해.”
“그 규칙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실 수 없으신가요?”
“안타깝게도.”
브리니는 로일이 조금 더 고민할 거라 생각했다. 보통 소중한 존재가 곁에 있는 자들은 중요한 갈림길에서 고심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로일은 브리니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곧장 만년필을 집어 종이에 제 이름을 갈겼다. 성 없이 이름만 덩그러니 놓인, 로일. 판자 아래에 사는 소년 치고는 지나치게 깔끔한 글씨다.
“글을 배웠니?”
“아니요, 저는 문맹이에요. 그래도 제 이름만은 알아요. 어릴 적 어머니가 알려주셨거든요.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이름 정도는 쓸 줄 알아야 된다고.”
말하는 게 똑똑해서 마음에 든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차피 일주일이 지나면 소년의 일거리는 사라질 것이다. 이후에 맡겨질 일이란 저택의 잡일 정도가 전부겠지. 그러나 브리니는 자신의 생각을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내 저택에서 지켜야할 규칙은, 다행히도 단 하나뿐이야. 그리고 매우 쉽지. 이곳에서의 이야기를 외부로 발설하지 말 것.”
로일은 정말 그게 전부냐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가 맞았다.
“좋아. 그럼 맹세도 했겠다, 이제 귀여운 내 아기 드래곤을 보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