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니가 실의에 빠진 작은 뒤통수를 품에 안는다. 그녀의 말마따나 세기의 미녀 속에 든 본성은 흉악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비초월자의 상식선에서 따지자면 메드울은 겉만 번지르르한 고령의 노인과도 다름없다. 그러니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버니니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 상황이었다.
소란스러웠던 백작의 집무실은 버니니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며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그녀는 브리니의 허리에 꼬옥 붙어 긴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안타깝게도 브리니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결정이었다. 그녀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면 좋은 일도, 해야 할까싶은 일도 아닌 반드시 해야 할 일. 물론 그토록 비장한 목표가 단순히 동제국 아카데미에 감으로써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과정 중 하나가 그곳에 있음은 명확했다. 그 귀한 기회를 브리니에게 선사한 것이 바로 어린 엘프이자 그녀의 손님인 버니니였고.
“편지는 오늘 안에 도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신이 확인되면 제가 그쪽으로 편지를 보내도록 하지요.”
누구의 편지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아는 일이다. 고개를 끄덕인 브리니가 곧 책을 덮고 저택을 나섰다. 이제는 메드울과 함께 영지를 벗어날 차례였다. 외출이란 것이 너무 오래간만의 일이라 기분이 묘하기도 하였지만.
“커즈는 어떻게 된 게 고용주가 출장을 나가는데도 코빼기가 안 보여?”
“이게 다 그분께 괴상한 취미를 찾아드린 백작 님 탓입니다. 정말이지……. 메드울 님보다 쓸모없는 사람이 될 줄은 예상치 못했었는데 말이지요.”
라슬란이 한숨을 쉰다. 옆에 따라 걷던 메드울이 그에 대한 정직한 반응으로 얼굴을 구겼다.
“모두가 나를 까내리는 데에 거리낌이 없네. 제가 그렇게 인생을 잘못 살고 있었습니까? 예? 그렇습니까, 백작 님?”
“그런 건 본인 스스로나 후대가 판단할 일이지. 내 생각에는 아마 그런 것 같아.”
브리니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고용인들이 짧게 허리를 숙인다. 그들의 정수리에 대고 손을 흔든 브리니가 곧 메드울과 함께 마차 안으로 올라탔다. 동제국 아카데미가 있는 제국의 대도시, 투샤마까지는 아캄파니에서부터 만 하루가 걸리는 거리다. 서쪽 끝과 동쪽 끝의 거리가 대공정으로 한 달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그 물건’이 투샤마에 있다는 것 자체가 브리니에게는 아주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답답한 걸 못 참는 브리니의 성정 상 마차와 공정, 기차에서 때우는 시간이 매우 버겁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전 레인우드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던 탓이었다.
“이번일은 운이 좋았네요. 이동시간을 제외하면 무려 5일이라는 기회가 주어진 거니까.”
“투샤마에 가봤어?”
“이 나이 먹고 투샤마에도 못 가봤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문제가 있는 겁니다.”
메드울의 표현대로, 이번 일은 운이 좋았다. 그것도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굉장히, 상당히, 매우 좋은 편이었다. 마치 모든 상황이 브리니를 위해 맞춰진 것 마냥 느껴질 정도였다. 버니니가 왕립 퀼랜드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는 것과, 그런 버니니가 아캄파니 영지를 방문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동제국 아카데미의 교류학생으로 떠나야 된다는 시기가 아주 환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네? 그 말은 즉, 백작 님께서 지금 당장 제 신분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럼 저 대신 교류학생 노릇을 해주시는 거예요? 정말요?’
버니니가 아캄파나로 돌아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퀼랜드의 교류학생으로서, 동제국 아카데미로 떠나고 싶지 않았기에. 그 말을 들은 브리니는 한참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이유가 너무나도 그녀다웠고 또 그러한 연유가 결론적으론 브리니에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본래라면 기함을 하며 다시 아카데미로 돌려보냈겠지만, 이번에는 차마 그리할 수 없었다. 마침 브리니가 찾던 ‘물건‘이 동제국 아카데미의 소유가 되었단 정보를 들은 참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다소 찝찝한 기분으로 버니니의 대리 노릇을 해주기로 하였다. 물론 그마저도 라슬란이 없었더라면 모두 불가능할 일이었다.
“백작 님은 얼마 만에 영지에서 벗어나시는 겁니까?”
“대충…… 7년 정도가 흐른 것 같네. 이번에는 간격이 조금 길었지.”
“조금? 7년이라면 현대에는 강산도 변할 시기인데. 깡촌에서 올라온 티 내지 마시고 거기서도 잘 적응하세요. 괜히 버니니만 욕 먹이지 마시고.”
말을 마친 메드울이 제 짐 안에서 신문을 꺼내 건넨다. 오른쪽 위를 살펴보니, 동부 끝자락의 아캄파니까지는 유통되지 않는 신문사였다.
“이건 갑자기 왜? 크라수스 해산물 레스토랑, 식재료 원산지 표기 논란에 대해 입장 표명……”
“저기요. 그딴 것 보지 마시고 이걸 보십시오, 이걸.”
신문을 뺏어간 메드울이 종이를 여러 번 넘겨 헤드라인을 펼친다. 그 안에는 황좌에 앉은 여성의 사진과, 이름 모를 남자의 얼굴이 흑백으로 박혀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살펴본 브리니가 기사의 제목을 천천히 읽어 내린다.
“‘레인우드 2세, 써드 커넥터로 폴렘 남작을 임명’? 이게 무슨 개소리야. 현황제가 벌써 노망이 들었나?”
말도 안 되는 기사에 브리니가 헛웃음을 뱉는다.
써드 커넥터란 마도사에게 마나를 일방적으로 갈취당하는 존재로, 오랜 기간 국제 사회에서 엄격한 통제를 받아왔다. 마도사에게 있어 커넥터란 제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존재. 그들은 서로의 마나를 공유하고, 감정을 공유하며, 유대감을 쌓아 궁극적으로는 한 단계 발전된 마법을 구사하게 된다. 커넥터가 없는 마도사는 마나를 통제하지 못해 종국엔 그 힘에 먹혀 자멸하기 마련이었다. 종종 커넥터 없이 온전한 힘을 내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건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나는 불세출의 천재이니 비교할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써드 커넥터는 일종의 마나창고와도 같은 취급을 받아왔다 표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주로 귀족과 같은 상류층에게 팔려가 커넥터가 있는 부유한 마도사의 도구로 부려졌다. 생명과도 같은 마나를 수시로 갈취 당하니, 써드 커넥터의 수명은 30년을 겨우 웃도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써드 커넥터의 존재가, 결국 합법이 되어버리다니. 브리니는 도무지 제 머리 위에서 노는 윗분들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그 그 신문도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발행된 신문입니다. 봐요, 제국력 402년이지요?”
그녀는 신문의 발간일을 확인헀다. 제국력 402년이면 메드울의 말대로 3년 전의 날짜가 맞았다.
“백작 님은 정치에 관심이 없으셔서 모르셨겠지만, 써드 커넥터가 황법으로 인정된 받은 지 벌써 5년이나 흘렀습니다. 그것도 무려 에일 황자가 직접 법안을 발의를 했었지요. 최근 들어선 제국을 선례로 삼아 전 세계적으로 합법화되어가는 추세입니다. 특히나 인권운동가들은 좋아서 난리가 났어요.”
인권운동가들이 좋아서 춤을 추든, 콩을 심든, 브리니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 중점은 따로 있다.
“왜 에일은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
“말을 못했던 것이겠죠. 극구 반대하실 게 분명한 일이니까.”
“에일은 써드 커넥터로 오랜 시간 감금을 당했던 애야. 그런데도 어떻게……”
말을 채 잇지 못한 브리니가 이마를 짚는다. 그만큼 에일 황자의 행보가 그녀에겐 충격적이었다.
“황자도 이제 나이가 스물을 훌쩍 넘었습니다. 10년이라면…… 오래된 과거의 찌꺼기 따윈 극복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지요. 어찌되었든 간, 역사적인 발자취를 남기는 데엔 성공한 것 같네요.”
브리니는 쥐고 있던 신문을 의자 뒤편으로 집어 던졌다. 그녀의 생각이 어찌되었든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그것도 벌써 5년 전이 훌쩍 지난 사건이라니, 저 혼자 난리쳐봤자 의미 없는 일이었다.
“아카데미 내에도 써드 커넥터들이 아주 판을 치고 있겠군.”
“그래서 제가 보여드린 겁니다. 가서 괜한 일로 난리법석을 피우지 마시라고요.”
“넌 내가 그렇게 눈치 없고 멍청한 사람으로 보여?”
“다 예방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사람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맞아. 다 부술 거야. 그 안건 통과시킨 새끼들 전부 다…….”
브리니의 상체가 의자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린다. 별 의미 안 두려 노력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떨쳐내려 해도 서운함과 아쉬움이 동반되어 그녀를 덮쳐왔다. 아무리 그래도 언질 하나 없이 일을 진행시킨 건 너무하다 느껴진다. 심지어 자신만 모르고 레인우드만 알았을 거라 생각하니 더욱 그러했다.
‘이래서 자식새끼 키워봤자 의미 없다더니,’
물론 생물학적 부모는 아니었지만, 키운 마음이 부모라면 다 부모 아니겠는가? 그리 생각한 브리니가 천천히 눈을 감고 담요를 덮었다. 더 이상 생각이라는 바퀴를 돌리기가 귀찮았다. 어차피 이 시점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부수냐, 마느냐가 전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