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늦은 오후, 마차는 투샤마의 성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리고 브리니는 성벽을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드높은 건물들에 적잖은 충격을 먹어야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고층 건물이라 하면 기껏해야 귀족의 저택이나, 국가에서 관리하는 아카데미, 혹은 대형 극장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광장으로 향하는 길목 빼곡히 높은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브리니는 그제 서야 아캄파니가 왜 시골 깡촌의 ‘마을’ 수준으로 불려야하는지 납득했다. 가로등도, 포장된 도로도 하나 없는 무성한 흙길의 아캄파니에 비하면 이곳은 놀랍도록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시골에서 온 티 안 내신다면서요.”
메드울이 마차 너머로 길게 목을 뺀 브리니를 향해 한마디 한다.
“이 정도면 황도보다 화려한 수준인데? 건물이 너무 높은 탓에 하늘은 코빼기도 안 보여.”
“크라수스 제국의 제도는 이제 대륙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예요. 이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어요.”
마차는 그대로 도로를 따라 광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브리니는 마차에 이마를 기대로 밖을 살피기에 여념 없었다. 군데군데 익숙한 분위기의 풍경이 눈에 띄었지만, 그것도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남겨진 수준이었다. 도시의 미관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저 광장만 넘으면 동제국 아카데미가 나옵니다. 백작 님은 버니니의 시종 자격으로 온 것이니, 지금부터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세요.”
“그러지요, 아가씨.”
브리니의 답에 메드울이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다. 그 말간 웃음에 브리니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홱 고개를 둘려버렸다. 대체 어느 부분이 저리도 뿌듯한 건지 그녀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물건은 어디에 보관되어 있습니까?”
“나도 잘은 몰라. 고대 마도구로 지정된 걸 보면 곧바로 최하층 보관소로 향했을 가능성도 농후해. 이제 가서 알아봐야겠지.”
“역시 제 생각보다 더 무모하시네요. 도대체 왜 생각도 없이 움직이시는 거예요? 아무리 백작 님이라도 보이지 않는 물건을 볼 순 없잖습니까.”
“참 나. 생각이 없다니? 나도 다 생각을 하고 움직인 거야. 내가 이곳을 잘 모르니, 당연히 아카데미에 해박한 사람을 이용해야지. 아마 내 얼굴 보면 바로 알아차릴 걸?”
“누가요?”
“에그라힘 교수. 아마 역사학을 맡고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순간 강한 흔들림이 마차를 둘러싼다. 벽에 머리를 박은 브리니가 고개를 들고 메드울과 마주했다. 그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제자리에서 멈춘 마차는 이후에도 더 이상 바퀴를 움직이지 않았다. 언뜻 주의를 집중하니 바깥이 다소 소란스러워 진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문을 연 브리니가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핀다. 지금 보니 그들의 사륜마차 앞을 또 다른 마차가 가로막고 있었다. 고급스런 적갈색 외향과 문 옆에 박힌 커다랗게 가문의 문양. 청록색의 매라니, 마치 어디서 본 것처럼 아주 익숙한 모양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저 익숙한 문양을 지닌 가문이 떠오르지 않았다.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사죄하고 갈 길 가시오. 이 마차에 얼마나 귀하신 분이 타고 계시는 지 아시오?”
“흥. 귀한 걸로 따지자면 이 마차에 계신 우리 백작……아니 아가씨야 말로 가장 귀하시고말고! 그쪽이야 말로 퍼뜩 사과하고 갈 길 가시오!”
브리니의 머리는 다투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활동을 멈추었다. 둘 중 하나는 분명 익숙한 목소리다. 바로 아캄파니 백작가에서 오랜 기간 마부일을 하던 터너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녀는 곧바로 몸을 돌려 마부석으로 다가갔다.
“이 양반이 내 말을 무시해? 당신 우리 백작…… 아니 아가씨가 얼마나 귀한 분이신 줄 알아? 우리 아가씨는 세계를……”
“터너! 무슨 일이야?”
브리니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터너가 고개를 돌린다.
“아, 아가씨. 이 마차가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이쪽으로……”
“이게 대체 무슨 소란입니까?”
그때, 터너의 목소리를 가로막고 또 다른 인기척이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면 열린 마차의 문 아래에 곱게 머리를 빗은 남자가 서 있었다.
‘시종인가? 그렇기에는 너무……’
브리니는 슬쩍 인상을 구기고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빗어 넘긴 백금발과, 바다처럼 깊은 푸른색 눈동자. 시종치고는 놀라우리만치 곱게 생긴 얼굴이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는 브리니의 마차를 슬쩍, 눈짓으로 확인한다. 아마 가문의 문양을 확인하려는 행동인 것 같았다. 그러나 마차에 박힌 상수리 나무는 노스 엘프족의 문양으로, 보통 사람의 눈썰미로는 절대 알아챌 수 없는 희귀한 문양이었다.
“흥. 어디 촌구석에서 왔나 보군.”
대놓고 비웃음을 흘린 시종이 브리니 쪽으로 한 발자국 다가온다.
“어디의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말로 할 때 먼저 길을 비키시오. 우리 도련님은 이따위 실랑이에 소비할 시간이 없으시오!”
언제 다가왔는지, 마차에서 내려선 메드울이 브리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화려한 금발의 뒤통수를 본 브리니의 인상이 사뭇 구겨졌다. 그는 지금 제가 쓴 뒤집어 쓴 껍질이 엘프 버니니의 껍질이란 것을 잊고 있는 모양이다. 그의 드레스를 뒤쪽으로 슬쩍 잡아당긴 브리니가 이어 메드울의 앞으로 나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건방진 시종의 면상에 대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우리 아가씨는 퀼랜드에서 교류학생 신분으로 오신 노스 산맥의 엘프, 버니니 엘 노스 아가씨이시다.”
브리니는 일부러 ‘교류학생’과 ‘엘프’ 부분에 힘을 주어 말했다. 대륙에서 엘프라는 종족보다 희귀한 종은 드래곤뿐이니, 그 취급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동시에 크게 뜨여진 시종의 눈이 메드울을 향했다.
“……엘프?”
“그쪽은 얼마나 귀하신 분이시길래, 여왕님의 명을 받고 온 우리를 가로막는 거요? 크라수스는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무례하군!”
브리니의 노성에 시종이 천천히 뒷걸음질 친다. 두 마차의 대치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고, 바쁘게 제 갈길 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원을 그릴 정도였다. 그러나 곱상한 시종은 난처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기만 할뿐 그 어떠한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고귀한 가문의 시종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리숙한 행동이었다.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브리니가 한마디 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시점. 마차의 문이 다시 열렸다.
“죄송합니다.”
열린 문 안에서 내린 자는 아주 젊은 청년이었다. 잿빛 머리칼과 청회색 눈동자. 적발과 흑발이 대부분인 제국 내에서는 보기 힘든 조합이다. 그제야 브리니는 그들 역시 버니니와 같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 시종이 나이가 어려, 아직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무례합니다. 잭? 이분들께 사과드려라.”
브리니의 앞에서 뻔뻔하게 소리치던 시종은 남자가 내려오자 그 낯이 사색으로 변해버린다. 시종은 곧바로 브리니와 버니니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제 주인의 타박이었다지만, 이전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태도였다.
“죄송합니다. 도련님의 말씀대로 제가 아직 시종 노릇에 어리숙하여 이런 결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다시 고개를 든 시종의 얼굴이 새파랗다. 제 주인이 그리도 무서운가 생각하던 시점에, 잿빛 머리칼의 남자가 차분히 입을 연다.
“저는 힐더 제국에서 교류학생 신분으로 방문하게 된 더스트 멕프레이 힐더입니다. 첫 만남은 다소 소란스러웠지만, 각자의 국가를 대표하여 온 만큼 좋은 교류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부서진 마차의 수리비는 제가 아카데미에 도착하는 즉시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이 외에도 제가……”
청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메드울이 재빨리 할 말을 내뱉는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교류학생 환영식에 늦어 지금 당장 이동해야 될 것 같아서요. 저희 측 역시 실수가 있었으니, 수리비는 따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이만.”
당황스러움에 굳은 몸을 메드울이 이끈다. 버니니를 흉내 낸 것 치고는 지나치게 차분한 어투였지만, 그래도 그 나잇대 소녀라 생각하기엔 충분히 활기찬 어조였다. 마차에 오른 메드울이 벽을 쿵쿵 두드리자 멈춰있던 바퀴가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브리니는 창 너머로 슬쩍 고개를 뺐다. 멀어져가는 적갈색 마차가 어느새 저 멀리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브리니가 가시 의자에 앉아 메드울의 정면을 응시했다. 그 역시 그녀 못지않게 다소 굳은 얼굴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브리니였다.
“동제국 아카데미가 힐더 제국과도 교류를 한다고? 그것도 무려 황가와 직접?”
남자의 이름, 더스트 멕프레이 힐더. 멕프레이는 힐더 제국에서 명실상부한 권력을 지닌 멕프레이 공작가의 성이고, 힐더는 직계황족만이 받을 수 있는 황가의 성이다. 남자는 많이 봐주어도 스무 살이 겨우 넘은 듯 보였다. 그 말은 즉, 힐더 제국의 후계자 중 한 명이라는 소리였다.
“아니요. 이번 일은 선례가 없는 일입니다. 상당히 놀랍네요.”
크라수스 제국과 힐더 제국은 각각 대륙의 서쪽과 동쪽을 양분하고 있다. 역사가 800년에 다다르는 힐더에 비해 크라수스는 이제 겨우 400년을 넘은 실정이고, 애초에 크라수스 자체가 힐더에 반하여 성장했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대륙 내에서 가장 좋지 않은 편에 속했다. 게다가 지난 400년 동안 단 한 번도 학술교류 따위는 이뤄진 적이 없었다. 그건 비단 학술뿐만이 아닌 대부분의 영역에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더 제국의 황자가 이곳까지 온 걸로 봐선, 몇 년 사이에 두 제국의 관계가……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크라수스 제국은 아직 힐더 제국과의 외교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그것도 최악을 겨우 면하는 수준에서요. 그런데도 심지어 황실의 후계자가 중앙 제국 아카데미가 아닌, 동제국 아카데미에 교류학생 신분으로 오다니…….”
동제국 아카데미는 크라수스에 위치한 다섯 개의 제국 아카데미 중에서 세 번째 명성을 지니고 있다. 절대 무시당할 위치는 아니었지만, 힐더 제국의 황족이 발을 들이 밀기에는 그 크기가 중앙 아카데미에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복잡하게.’
딱 거기까지 생각한 브리니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차피 우리는 필요한 물건만 몰래 챙기고 가면 될 일이야.”
마침 창 너머로 동제국 아카데미의 정문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