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니는 외부인 기숙사로 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이곳 동제국 아카데미에서 교류 학생의 시종은 편하게도 고용주와 동일한 층의 방을 사용할 수 있었다. 책자를 살펴보면 퀼랜드 왕국 출신은 기숙사의 3층을 사용하기로 되어있었는데, 4층 전체가 더스트 황자를 위해 비어진 것을 감안하면 꽤 좋은 취급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여러 생각에 잠겨 아카데미 내부를 누빈 후, 그녀가 다시 도착하게 된 장소는 정문에 위치한 메인 홀이었다. 정문에 위치한 메인 홀. 그러니까, 브리니는 자신이 도망쳐 나온 그곳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아니. 여기는 구조가 왜 이리 복잡……”
“시종 분! 저기요, 앞에― 헉헉, 시종 분!”
처음에는 그녀 본인을 부르는 소리인지 눈치 챌 수 없었다. 그러나 여자의 목소리는 일관성 있는 고성으로, 꾸준히 한 방향을 향해 소리쳤다. 브리니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을 때에는 이젤이 거친 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종 분!”
“말씀하세요.”
숨에 찬 이젤이 힘겹게 브리니의 앞으로 다가온다.
“버니, 버니니 노스…… 님께서 쓰러지셨어요!”
여자의 발언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잠시 턱을 쓸어내리던 브리니가 이젤을 앞세우고 홀 내부로 뛰어 들어간다. 앞세웠다기 보단 이젤이 그녀를 끌고 갔다는 소리가 더 정확할 것이다. 브리니는 여태 학생들로 가득 찬 홀의 옆길로 빠져, 기나긴 통로를 지나 대기실로 들어섰다. 소파 위로 쓰러져 있는 금발의 소녀. 그리고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걱정스런 표정의 낯선 이들. 이젤이 그들에게 시종이 왔다고 소리치자, 원을 두르고 있던 자들이 부랴부랴 길을 비킨다.
“노, 노스 양의 시종 되십니까?”
“네. 버니니 아가씨께서 쓰러지셨다니, 무슨 소리인가요?”
“개회사가 끝나고 잠시 숨을 돌리시다가 갑작스레……”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브리니는 성큼성큼 걸어가 인파를 제치고 메드울 앞에 섰다. 그는 마치 동화 속에 잠든 공주처럼 고고한 자태로 누워 있다. 깃털처럼 내려앉은 금빛의 속눈썹과, 사과처럼 발그레한 뺨.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짙은 걱정에 물들만 하다. 아무리 충격적인 개회사를 진행했다 하더라도, 세기의 미인은 세기의 미인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메드울이 아닌 버니니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다. 브리니는 잘 단련된 오른 다리를 이용해 드러누운 메드울의 옆구리를 거침없이 후려 쳤다. 그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헉!’ 숨을 들이 삼키는 소리가 천장을 울린다.
“야. 빨리 일어…… 아가씨! 빨리 일어나세요. 이제 곧 수업에 참석해야 합니다!”
“아, 아니 시종이 이게 무슨!”
“아가씨! 그만 주무시고 일어나시라고요!”
눈치를 살피던 브리니가 결국 다리를 내리고 팔을 사용했다. 잠든 어깨를 수없이 흔들자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서서히 들어 올려짐이 보인다.
“버니니 아가씨!”
최근 들어 잘 버틴다 했더니, 그놈의 기면증이 다시 도진 것 같았다. 아캄파니 내에서야 상관없다지만 이렇게 외부에서 잠들게 되면 일이 피곤해진다. 애초에 마법이란 것 자체가 시전자 뿐만이 아닌 영향을 받은 당사자의 인식에도 큰 영향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만약 지금처럼 메드울이 잠든 상태에서, 브리니가 근처에 없다면 변신 마법이 취소될 확률이 높다.
“……제가 얼마나 잤죠?”
“십 분 남짓.”
부스스 일어선 메드울이 엉망이 된 머리칼을 가다듬는다.
“크흠. 아,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최근 몸이 안 좋아 정신을 놓는 일이 허다하네요.”
“괘, 괜찮으십니까? 제가 타 종족의 안위를 살피는 것은 처음이라, 함부로 옮길 수 없었습니다.”
의사로 보이는 자가 걱정스런 눈길로 메드울을 바라봤다.
“감사해요.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냥…… 제 시종을 불러주세요. 저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거든요.”
부드럽게 웃는 낯짝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역시 저 얼굴이라면 충격적인 개회사를 잊을 만 했다.
“브릴. 네 말대로 곧 수업이 시작되겠구나. 이만 가도록 할까?”
바닥으로 전해지는 웅성거림이 점점 짙어진다. 아무래도 이제 막 환영식이 끝난 것 같았다.
브리니는 홀을 나와 수업 건물로 향하는 내내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시끄러웠으면 주변 시선의 전부가 모아질 정도였는데, 개회사의 여파가 적잖았는지 그 누구도 시선을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덕에 브리니의 잔소리는 더욱 길어졌다. 나중에는 듣다 지친 메드울이 신경질을 부릴 정도였다.
“수업에는 같이 참여 못하나 봐.”
강의실에 도착한 메드울이 내부를 살핀다. 자리에 착석되어 있는 자는 전부 교복을 입은 학생들뿐이었고, 시종으로 보이는 자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 넌 이만 가봐.”
“……널 혼자 두고요?”
“너라니? 쯧, 아가씨께 말버릇 하고는. 이 몸은 이 몸 알아서 할 테니, 브릴 넌 아카데미 구경이나 하고 있으렴.”
생각보다 더 얄밉다. 그것도 그냥 얄미운 게 아니라 상당히 얄밉다. 브리니는 어쩔 수 없이 메드울을 홀로 두고 건물을 벗어나야 했다. 다른 시종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수업이 시작된 이후에는 그녀와 비슷한 복장을 한 자만이 건물 내외를 거닐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거 에그라힘에게 찾아가 볼까.’
시종이 개인적으로 교수를 찾아갈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그녀는 우선 생각보다 몸을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책자를 보면 대충 강의 건물의 북쪽으로 교수 건물이 위치해 있는데, 문제는 어느 방향이 북쪽인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가장 그럴까한 건물로 발을 들이밀었다. 명예의 냄새가 고고하게 나는 방향. 그 아래에서 좀비처럼 기어 다니는 학생들. 그곳이 아마 교수 건물일 것이다.
“브리니님?”
일층을 내부를 확인하던 차. 오른쪽 통로 어귀에서 그녀의 이름이 들려왔다. 동제국 아카데미에서 그녀의 이름을 아는 자는 단 한 명뿐이다. 역사학 교수 에그라힘 멜튼. 브리니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개의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서서히 가까워진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 이런 식으로 오셨을 줄은……”
눈앞에 남자는 채도 낮은 금발과 그보다 더 어두운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에 더하여 보는 이가 다 쳐질 정도로 우울한 분위기까지. 5년 만에 봐도 에그라힘이 지닌 그 특유의 느낌은 여전했다. 반가움을 참지 못한 브리니가 이를 드러내며 웃자, 에그라힘의 옆에 있던 여자가 두 손을 들어 입을 가린다. 환영식 내내 그녀와 함께했던 이젤이었다.
“교, 교, 교수님? 정말 이 분이 그 브, 브, 브리니님―”
“하아. 이젤 양은 먼저 가보세요. 저도 곧 뒤 따라 가겠습니다.”
넋을 빼고 있던 이젤이 한 호흡 늦게 고개를 끄덕인다. 시선을 브리니에게로 고정시킨 채 서서히 멀어지던 이젤은 곧이어 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브리니를 아는 자만이 보이는 행동 패턴이다.
“그녀에게 나에 대해서 얼마만큼 알려줬지?”
브리니의 물음에 에그라힘이 답했다.
“이름만 아는 수준입니다. 그리고 이젤 양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 괜한 걱정은 거두셔도 됩니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가 곧 마뜩찮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오시려면 얌전히라도 오시지, 버니니 양의 상태는 왜 그런겁니까? 몇 년 사이에 조증이라도 도졌답니까?”
“조증!!”
적절한 단어선택에 입꼬리의 들썩임을 참지 못한 브리니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그 앤 버니니가 아니야. 푸흐흐― 버니니의 껍질을 빌린 메드울이라고.”
“메드울? 초월의 탑의 그 메드울 말입니까? 칩거에 들어갔다는 황혼의 현자?”
황혼의 현자라니, 크라수스의 검에 비견될 만큼 쪽팔리고 낯부끄러운 별명이다. 그러나 정작 그 별명을 입에 담은 당사자는 놀라울 정도로 진지한 표정이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딱 그를 가리키는 말 같았다.
“칩거를 하고 있긴 하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온종일 숨만 쉬거든. 다른 말로 백수라고나 할까.”
“세상에. 저 나중에 싸인 받으러 가도 됩니까?”
그딴 돈을 줘도 안 받을 물건을 사서 받으려 하다니, 역시 모르는 건 약이 아닌 죄다.
“지금 메드울의 싸인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너는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알지?”
에그라힘이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아주 잠시라지만 자신이 그를 붙잡고 있던 건가, 하는 미안함이 들었다. 말없이 입술을 축이던 에그라힘이 곧 비껴두던 시선을 다시 마주했다. 분위기만 봐선 고심 끝에 대답하는 느낌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계십니다. 아무래도 그 분께 가보시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 지금은 수업 시간이 아니니, 아마 개인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그 물건’에 대해 아는 자가 이곳에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브리니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설마 그 사이에 여기저기 떠벌이고 다닌 건가 싶었지만, 그녀가 아는 에그라힘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 물건’에 대해 안다는 소리일까? 존재 자체가 비밀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범위의 인물들은 이곳에 있을 수가 없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답이 안 나오자, 결국 그녀는 마지막까지 아껴두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게 누군데?”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놀라우리만큼 깔끔했다.
“레인우드님. 그러니까 선황 폐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