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 없어?’
남자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내려다본다. 그의 금빛 동공 속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져 있지 않았지만, 브리니는 그것이 남자의 진심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표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며 또 그만큼 자신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다. 때로는 날카우리 만큼 차가운 이성이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브리니에게 있어 남자는 레인우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당장 마주한 그의 얼굴 근육이 조금 더 웃는 모양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보면 내가 죽는 줄 알겠어. 조금 긴 잠에 드는 것뿐이잖아.’
‘그게 1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네가 어떻게 알아.’
‘으음. 틀린 말은 아니네. 그렇다면 내 마지막 말은……. 수 년 후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 침대 옆에 커다란 딸기 케이크가 놓여 있음 좋겠어.’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이다. 브리니는 입 꼬리를 추욱 늘어뜨리고 잠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저리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 지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옅은 신경질은 자연스레 입 밖으로 새어 나갔다.
‘황제가 된 레인우드를 앞에 두고 낮잠이나 즐겨야 한다니. 나는 역시 운이 안 좋아. 네 권력을 등에 지고 제국 좀 휘두르려 했건만, 전부 한낮의 꿈이었나봐.’
레인우드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저 금실로 장식된 소매를 걷어내고, 제 팔을 뻗어 브리니가 덮고 있던 솜이불을 좀 더 높이 올려 두었다. 오늘따라 그답지 않게 이죽거림 하나 없이 얌전하기만 했다. 브리니는 그의 그런 모습이 새삼스러우면서도 내심 우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가 없는 레인우드는 여전히 빛나고 아름답지만, 레인우드가 없는 브리니는 한참이나 볼품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일어났을 때. 내 옆에는 아무도 없겠지?’
‘그 까다로운 레드 드래곤은 천 년이 지나도 네 옆에 남아있을 거다.’
퍼쉬울그 말고 널 말하는 건데. 그리 답하고 싶지만, 어째선지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왜인지 레인우드의 말은 브리니가 다시 깨어났을 때 곁에 없을 것이라 단언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린 브리니가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시야 아래의 저 끄트머리에서 레인우드의 새까만 머리칼이 파도처럼 찰랑였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여명처럼 예쁜 적발이었는데, 시간이 유수처럼 흐른 지금은 밤보다 까맣게 산화되어 버렸다.
‘내가 잠에 들 때까지 아무런 말이나 해줘.’
‘나는 이제 곧 가봐야 해. 널 보러온 것도 억지로 시간을 빼서 온 거야.’
‘그럼 더 빼. ……마지막일 수도 있잖아.’
꼭 하고 싶지 않았던 마지막 한마디까지 하게 만든다. 그녀의 말에 레인우드는 속 깊이 숨을 삼켰다. 들리지 않지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에 브리니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늦여름. 그리고 그보다 더 늦은 밤. 브리니는 창 너머로 흘러 들어온 산들 바람에 제 머리카락이 나부는 것을 느꼈다.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던 레인우드가 다시 입을 연다.
‘네가 잠들면 난 아텐베르그 공작의 여식를 황비로 맞이할 거야.’
‘―뭐어?’
그게 무슨 소리야? 깜짝 놀란 브리니가 상체를 벌떡 일으킨다. 그런 그녀를 마주한 레인우드의 표정은 한여름의 태양처럼 밝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황당함에 입만 뻥긋거리던 브리니가 손을 뻗어 남자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세계를 구한 영웅치고는 너무나도 손쉽게 이끌려온다.
‘농담이지? 그 어린 게 무슨 죄를 지었다고 너 같은 홀애비에게 시집을 가!’
그녀의 노성에 레인우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설산의 한기가 풍겨오던 직전의 표정과는 아주 상반되는 분위기였다.
‘네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짐은 크라수스 제국의 황제야. 그러니 까라면 까는 거지’
브리니의 손이 남자의 무릎 위로 툭, 떨어진다. 그 모습이 마치 화살에 날개를 꿰뚫린 새 한 마리와도 같았다. 그녀는 뭐라 반박할 구석이 없어 입술만 꾸욱 닫아 버렸다. 그런 중대한 말을 하필이면 잠들기 직전에 하다니, 그녀를 엿 먹이려는 속셈인 것일까?
그러나 레인우드의 폭탄선언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첫째 아이의 미들네임은 네 이름으로 해줄게. 그 정도의 정쯤이야 이 몸에게도 남아있으니까.“
어지럼증이 머리를 잠식한다. 황당함을 넘어선 당혹스러움에 브리니는 결국 침대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 수 없는, 아니 그 이유가 확실한 배신감에 손끝이 벌벌 떨리는 기분이다. 까딱 잘못하다간 애먼 속을 게워낼 것 같기도 했다. 부들부들 입술을 떨던 브리니가 팔을 올려 레인우드의 얼굴을 삿대질 했다. 동시에 가슴속 깊이 끓어오르던 용암이, 격한 감정과 함께 세상으로 튀어나온다.
“이 나쁜 새끼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리고 눈이 떠졌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눈이. 아주 활짝.
‘쏴아아―’
어디선가 침엽수림의 향을 실은 바람이 풍겨온다. 그 산뜻한 바람에 사그락이는 커텐 소리가 브리니의 귓등에 살포시 올라앉았다. 그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이질감에 브리니의 상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이곳은 자신이 서 있던 그 방이 아니었다. 방 내부를 둘러싼 고요하고 안온한 공기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팔자 좋군. 이곳까지 찾아와선 잠꼬대나 하고 있으니.”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 갑작스레 끼어든 타인의 인기척에 브리니가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시야가 안착한 곳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남자가 있었다. 드넓은 창 아래로 쏟아지는 늦은 오후의 햇살. 태양빛에 비춰 보석처럼 반짝이는 금안. 부드러우면서도 무감각한 표정을 짓는 부드럽고도 단단한 턱선. 남자를 알아 본 브리니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진다. 그처럼 수려한 선의 미남은 브리니 생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왼쪽 눈 아래 찍힌 새까만 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그녀의 레인우드를 제외하고는.
“정신 차렸으면 얼른 일어나. 곧 수업 시간이라 나가봐야 하니까.”
“……나 왜 여기에 있지?”
소파등에 느릿하게 기댄 그녀가 제 이마를 짚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이 관자노리를 짓눌렀다.
“에그라힘의 표현을 빌리자면, 멀쩡하던 네가 그의 앞에서 갑작스레 픽 쓰러졌다더군.”
브리니는 거칠게 숨을 들이 쉬었다. 분명 자신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남자의 존재감 그 하나만으로도 안온한 안정감이 찾아온다. 약간의 평온을 되찾은 브리니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남자를 마주했다. 그녀의 시선을 인지한 남자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천천히 입술을 연다.
“그래서. 문제가 뭐야.”
“너 결혼해?”
설마. 브리니의 갑작스런 물음에 건너편의 남자, 레인우드가 옅게 인상을 찡그린다. 그는 곧 책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브리니를 응시했다.
“내가?”
“응.”
“너 나랑 결혼하고 싶어?”
결혼했냐는 물음이 왜 거기로 튀는지 모를 일이다. 브리니는 마땅한 대답 대신하여 짜증 서린 표정으로 레인우드를 쳐다봤다. 그래도 방금 전 그 발언 덕분에 한동안 멍했던 정신이 되돌아온 것 같았다.
“―아니야, 순간 내가 잠깐 꿈과 현실을 혼동했나봐. 나도 지금 꽤 당혹스럽긴 한데, 이렇게 갑작스레 정신을 잃은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퍼쉬울그.”
책을 덮은 레인우드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는 곧장 등을 돌려 소파 뒤편에 위치한 책장에 책을 꽂아 넣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 성체가 된다고 했나? 그 레드 드래곤.”
“지금이 딱 그 전환기야. 아무래도 성체가 되는 여파가 나한테까지 미친 것 같아.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인데. 하필 영지를 벗어나고 나서 알아채다니……”
피곤함을 참아내지 못한 브리니가 슬쩍 눈꺼풀을 닫는다. 레인우드와는 무려 3년만의 재회였다. 길었다면 길고, 또 짧았다면 짧은 그 시간동안 그녀 혼자 쌓아뒀던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이제 겨우 5일이 남았는데, 그 안에 다 뱉어낼 수 있을싸?허나 속을 들쑤시는 두통에 말을 잇기조차 버거운 기분이다.
“레인. 어떻게 여기서 교수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너무 놀라서 꿈속에 꿈인 줄 알았잖아.”
“왜겠어. 내가 직접 몸을 움직일 일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지.”
레인우드의 말이 맞다. 이제는 역사의 뒤편에 서 세상을 내려다보게 된 그는, 브리니가 오랜 동면에서 깨어난 이래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바로 세계에 흩어진 ‘그 물건’들을 모으는 것. 그것들을 모아 오랜 숙원을 풀어내는 것.
“안 그래도 그에 관한 이야길 들으러 에그라힘을 찾아가던 중이었어.”
“그럴 것 같았다. 이제는 내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궁금한 게 생기면 날 찾아오도록 해.”
브리니가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르지만 슬슬 자리를 떠야 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조금이라도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무거운 몸은 둘째 치고 그녀 없이 싸돌아다니고 있을 메드울이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언제 어느 장소에서 또 잠에 들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야지……. 우선 지금은 메드울에게 가봐야 될 것 같아. 시간이 생각보다 더 많이 흘렀네.”
메드울, 메드울. 그의 이름을 여러 번 입에 담던 남자가 책장에서 다시 몸을 돌린다. 천천히 걸음을 이동해 소파위에 안착하는 자세가 아주 느긋했다.
“금방 질려서 떠날 줄 알았더만. 네 곁에 꽤 오래 붙어 있는군.”
그의 말에 브리니는 먼지에 쌓여있던 오랜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고 보니 메드울이 아카파니에 오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레인우드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애를 내게 보냈던 게 너였지? 왜 갑자기 초월의 탑 현자를 아캄파니 영지로 보낸 거야?”
그는 대답이 없다. 찻물을 들이킨 레인우드가 지루한 낯으로 소파를 두들겼다. 어찌 보면 할 말이 있을 것 같고, 또 어찌 보면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얼굴이 되어서. 브리니에게는 이미 충분히 익숙한 반응이었기에, 제 자리에 얌전히 앉아 그의 말을 기다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둘 사이의 침묵이 제 자신이 가장 그리워했던 순간들이기도 했다.
“잠시 이리로.”
허리를 일으킨 레인우드가 브리니를 향해 손을 내민다.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그의 손바닥을 응시하다가, 잽싸게 팔을 들어 마주 잡았다. 그리고 그 자리 그대로 일어서 레인우드 옆에 다가갔다. 그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핀다.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에 덩달아 웃음 짓는 사이, 레인우드는 브리니의 손을 제 입가로 끌어갔다.
“브리니.”
“응.”
“3년 만에 만나서 첫 이야기를 나누는데, 죄다 쓸데없는 소리뿐이야. 내게 다른 할 말 없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