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알고 있는 미래를 이용해 성공해서 행복하게 가족과 살아갈 수도… 아!’
그때 달력의 의미가 떠올랐다.
가족! 그래, 가족이다.
내가 부모님을 잃은 날. 혼자가 된 날.
황급히 달력을 보았다.
그날은 3월 9일. 그리고 오늘은!
‘23일.’
그 순간, 즐겁기만 했던 망상이 냉정하게 어긋나버렸다.
내가 바꾸고 싶은 과거는 9일이다. 그러나 오늘은,
“23일!”
허탈함으로 힘이 쭉 빠졌다. 이어, 나에게 이런 꿈을 꾸게 해준 누군가가 원망스러워졌다.
‘며칠만 더 돌려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진정으로 바꾸고 싶은 것은 딱 하나였다. 바로, 부모님의 사고. 그것을 바꾸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기회가 없다. 망상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사고로 돌아가신 때는 보다 이전이었으니까.
“딱 보름이면 됐는데…….”
3월.
혼자라는 공허함에 몸부림치던 달이 이때였다.
만일 부모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계실 때 잘 해드렸더라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뒤늦은 두 분의 사랑을 깨닫고 후회하던 시기.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시점은 그마저도 어긋나 있었다.
(1)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외로움으로 감각이 곤두설지라도 나는 꿈에서 깨지 못했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과거의 집이고 옛날의 나였던 것이다.
내가 미쳤는지 아닌지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 했다.
‘39살의 패배자, 이상현은 없어졌다.’
실패한 나의 삶들. 과연 이 기억들이 진실로 사실일지는 조금 더 살며 겪게 될 일들과 비교하면 해결될 것이다. 그러니 진실 여부는 그때 가서 가늠해도 될 일.
현재 내게 중요하고 반드시 선행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 된다.
원인 파악.
세상에 원인 없는 과정 없고 과정 없는 결과는 없는 법. 내가 이런 개꿈을 꾸게 된 이유. 혹은 미래를 경험하게 된 까닭을 알아야 했다.
나는 기억을 곱씹어 보았다.
‘신의 장난이라든가 SF영화에서처럼 내 기억이 조작됐다든가 세상 전체가 가상의 게임 공간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부분들은 내가 안다 해도 어찌할 수가 없고 이해도 버겁다. 그러니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범주에서 찾는 편이 최선이리라.
왜 느닷없이 과거로 돌아온 걸까. 혹은, 미래를 알게 된 걸까.
그 이유나 계기가 대관절 뭘까.
내가 직면하고 겪은 단서들만으로 한정해서 추렸다.
‘자살한 태진이. 녀석의 일기. 악마의 문장.’
정말이지 어린아이 동화와도 같은 우스꽝스러운 가설이 툭 튀어나왔다.
그것은 바로 ‘게임 폐인 태진이가 악마와 계약하고 게임에서 성공하고자 과거 회귀를 이루었는데 녀석의 피와 문신을 접했던 내가 곁가지로 딸려왔다.’라는 것이다.
‘설마.’
웃기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추론 외에는 내가 감당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설이 없었다. 저 유치찬란한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가장 현실성 있다는 궤변이다.
‘……백번 양보해 이걸 진짜라고 생각해 보자.’
이 가설에 힘을 실어주면 어떤 선택지가 나올까.
나는 생각을 이어 보았다. 회귀한 내게 펼쳐질 삶이 어떠할지를.
첫째.
‘곁가지로 딸려온 것도 행운이니 지식을 이용해서 이번에는 성공하자.’
속물적이기는 하지만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나는 도전보다 포기의 의미를 아는 어른이다. 적당히 타협할 줄 알고 부끄러움보다는 이익을. 꿈과 낭만보다는 현실을 우선시하는 속물이다. 내일보다는 오늘이 중요하고, 굶어 죽는 먼 나라 이웃 나라 사람들에 대한 걱정보다 한 끼 굶은 내 몸, 한 달 누진세 붙은 전기료를 더욱 생각하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러니 이번엔 성공해서 잘 살아본다.
이것이 첫 번째였다.
둘째.
‘태진이와 계약 맺은 존재를 찾아. ‘재계약을 맺자’ 하고 소원으로 빈다.’
보름만 더 과거로 돌려달라고 요청해본다. 어차피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났으니 그 기적에 조금 더 기대보는 거다. 기왕 성공하는 거, 잃었던 가족도 되찾으면 실로 금상첨화이지 않겠는가.
태진이의 일기장도 읽은 덕에 계약 내용도 제법 알고 그 수단 역시도 확실하게 알았다. 일기장에 적힌 32개의 조항은 간단하게 축약하면.
(1) 절대적인 비밀 엄수.
(2)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는다.
(3) 3개월 안에 성륜의 주인 3명을 죽여야 한다.
(4) 대적자로부터 승리를 쟁취하라.
- 이를 어길 시 육신과 영혼이 모두 강탈당하며 영원히 노예가 된다.
가 된다. 후자가 조금 찝찝하고 선뜻 이해도 되지 않았지만, 만나서 얘기해보면 어찌어찌 해결될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악마라는 존재를 부르는 방법은 복잡하지도 않았다.
피로서 악마의 문장을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면 되니까.
“해보자.”
결단을 내렸다.
나는 부엌으로 달려가 과도를 들고 손바닥을 베었다. 깊이 베여 주르륵 쏟아지는 피. 섬뜩한 통증을 억누르며 친구가 미친 듯이 그렸던 그 문양. 악마의 문신이라 여겼던 것을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뭐였지?”
이상했다. 떠오르지가 않았다. 녀석이 수도 없이 그려대던 문양이라 눈을 감고도 따라 그릴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 문양은 복잡하지도 않았다. 아주 단순한 도형 몇 개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려지지가 않았다. 전혀 떠오르지가 않는 것이다. 너무나도 간단하다는 것을 아는데 나는 그것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주르륵 피만 바닥에 흐를 뿐.
“아프다.”
말 그대로 살을 에는 통증이다. 나는 손을 움켜쥐고 심장보다 높게 올렸다.
“정말로…… 아파.”
밀려드는 공허함에 고개를 숙였다.
* * *
욕조에 냉수를 가득 받았다. 심호흡한 뒤 몸을 담근다.
피부로 파고든 냉기가 뇌리를 한 단어로 가득 메웠다.
‘춥다!’
정말 추웠다. 시리고 아릴 만큼 추웠다. 스며드는 냉기 탓에 몸이 저절로 떨려왔다. 치아가 딱딱 부딪치고 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다 미친 듯이 숨죽여 웃었다.
다시 생각해도 내 모습이 정신병자 같았기 때문이다.
‘자고 일어나서 바로 하는 짓이 이따위라니.’
아직 3월.
찬물에 몸을 담그기에는 너무도 이른 시기였다.
그러나 나는 계속 버티고 있었다. 꿈이라면 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현실이라면 자각하고 제대로 몰입하기 위해서.
‘거지 같아도 내 인생이잖아.’
39살의 실패한 삶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나’였다. 지금에 와서 이를 전면부인하고 그냥 사는 것은 마약에 취해 환각 속에서 죽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농락당하는 것만큼 최악은 없을 터.
나는 거짓된 행복보다는 진실을 알고자 했다.
욕조에 머리까지 처박았다.
춥다. 몸이 떨리는 만큼 손바닥의 통증이 줄어들었다. 몸부림치던 감각이 둔해질 즈음 복잡하던 머리가 진정됐다.
‘이래도 안 깬다 이거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추워 본 적은 내 인생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미래들도 너무나도 또렷하게 떠올려졌다.
어른거리고 사라질 꿈결이 아니라 확실한 경험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
‘인정하자.’
추위에 떠는 나의 모습. 이것은 진실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인제 어찌할까?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모든 일의 원흉을 찾아갈까?
‘태진이한테 가서 악마를 부르라 하고 시간을 보름만 더 역행하자고 말해 볼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정말로 좋을 것이다. 깨끗하게 새로 시작하는 삶일 테니까.
하지만 태진이의 일기장이 생각에 고삐를 채웠다.
‘위험해.’
가장 최근의 일까지 적혀있던 일기장에는 녀석이 게임을 하며 겪었던 이러저러한 일들. 바로 게임 속 NPC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생각과 좌절했을 때 영혼을 저당 잡겠다는 악마를 만났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잘 떠올려 보자.’
이맛살 찌푸려가며 꼼꼼하게 되새겨 보았다. 32개나 되는 그것들은 비밀을 발설하거나 배반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내용의 다른 표현들이다.
그런즉.
- 위반할 시 노예가 되니 복종해라.
이게 핵심이 된다. 구태의연하기 그지없는 악마의 계약인 셈이다.
악마가 ‘갑’이고 태진이가 ‘을’이다. 아울러 나는 ‘을’인 태진이의 곁다리로 회귀했다. 그러니 태진이에게 가해진 제약들이 내게로 공통적으로 발휘된다고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 계약 위반 시 육체와 영혼을 강탈당한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실감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섣불리 다가갔다가는 나 역시 악마의 노예가 되어 종사하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비밀 누설이 됐건 다른 이유건 간에 나 같은 것쯤은 한 방에 죽을 수도 있지.’
그러니 숨어야 했다.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도 숨겨야 했다.
지금 움켜쥔 기회마저 송두리째 날아갈 수 있으니까.
‘이 중요한 내용을 일기장에 대놓고 적다니.’
새삼 태진이의 부주의함에 한숨이 나왔다.
(2)
나는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흐으으.”
신음이 절로 나온다. 나는 물기를 닦지도 않고 이불 속으로 몸을 날렸다. 전기장판이 켜져 있는 터라 이불 속은 따뜻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이불에 누워 곰곰이 앞으로의 일을 떠올렸다.
행동방침은 정했다.
나의 회귀를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산다. 이 방침을 1조 1항으로 두고 모든 사태에 대비하는 거다. 하지만 과거와 똑같은 미래를 산다면 나는 또 실패한 삶을 살아야만 하니, 티 안 나게. 태진이가 이해할 수 있게끔 성공도 거머쥐고자 했다.
고로 ‘생존하고 성공한다’가 된다.
‘외줄 타기가 바로 관건이지.’
균형을 잘 잡아야 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은 바로 돈이다.
“빈곤한 건 전생이면 충분해.”
일자리에 고민하지 않으며 굶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낭만을 찾을 수 있는 법. 사랑과 행복도 모두 다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우선 그걸 목적으로 하자.’
나는 앞으로의 일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그때.
-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2)
* * * *
평범하기 그지없는 초인종 소리가 나에게는 천둥처럼 느껴졌다.
과거 회귀라는 믿지 못할 일을 겪은 상황이라 순간 오만 생각이 다 든 것이다.
달력을 노려보았다.
3월 23일.
과연 이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선뜻 떠오른 기억이 없었다.
‘난 덤으로 딸려 왔으니까.’
그랬다. 이날은 내게 있어 별 의미가 없는 날이다. 나보다는 녀석. 자살한 친구에게 있어 무언가 의미가 있는 날일 터다. 그렇다면 밖에서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은 이 사태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한 가닥 의구심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만약.’
계약도 안 했는데 딸려왔다고 호통치는 악마가 있지는 않을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며 처단하러 온 퇴마사라도 있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성륜의 주인이란 자들일 수도 있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일기장에 쓰인 기록 중 하나였다. 석 달 안에 성륜의 주인 3명을 죽일 것이라고 말이다.
‘썩을. 그러고 보니 그들을 못 찾으면 나 역시 끝나는 거로군.’
쓸데없는 상념이 점차 이상하게 비약되고 있었다. 무엇하나 정리되는 것 없이 실타래가 점점 꼬여가며 엉켜간다. 그와 더불어 초인종 소리가 악마의 웃음소리처럼 들리고 문자체가 두렵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크윽!”
나도 모르게 움켜쥔 손 탓에 베였던 상처가 쓰라려 왔다. 간신히 지혈된 손과 그 통증을 느끼며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겁내고 어찌할 줄 모르는 바보스러운 내 모습이라니.
일부러 손을 더욱 움켜쥐었다. 아릿한 통증으로 나를 수습했다.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랬다.
집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만약 문 앞에 있는 이가 악마나 퇴마사 같은 초인적인 능력자라면 저렇게 오래도록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겠는가? 말 그대로 귀신처럼 들어와서 말을 걸지 않겠는가.
그렇다.
백번 양보해서 실제로 악마가 정중하게 초인종을 눌렀다손 치자.
어쩌겠는가?
평생 이 안에서 웅크리고 살 것인가?
초자연적인 존재라면 한낱 인간으로서. 이깟 아픔에 몸부림치는 나로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을 끌어안고 나는 불필요하게 괴로워하고 있던 것이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가능한 일에만 집중해야 할 때다.
나는 심호흡을 마치고 벗어 두었던 옷을 다시 입었다. 잠옷 삼아 입는 회색 면바지에 흰 면 티셔츠를 입고는 핏자국 난 상처를 감추고자 휴지로 둘둘 손을 감쌌다.
시계를 보았다. 지금은 오전 7시 14분.
나는 긴장을 풀어보고자 제법 실없는 생각을 해 보았다.
‘굉장히 부지런한데?’
이 정도면 매우 근면 성실한 악마가 아니던가. 악마들 사이에도 성실성으로 평가하여 직급을 올리는 제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중에 평가 전화라도 오면 ‘매우 만족’이라고 높이 점수를 줘야겠다.
그리고 아직도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 누군가를 당당하게 불렀다.
“누구시죠!”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내 손으로 문을 열어 맞이하겠다. 그리 결심하고 들려오는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