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13층에서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등교 시간은 7시 50분까지. 출발시각은 7시 30분. 20분 남짓한 시간뿐이 되지 않지만, 등교에 대한 부담은 없다.
아파트 단지에서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자리한 탓에 지각한 일이 없는 까닭이다.
사거리 건널목에 서서 녹색 등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아파트와 길 어귀에서부터 삼삼오오 모여드는 학생들로 인도가 가득가득 메워졌다. 편의점에서 빵과 음료를 사 먹고 있는 학생, 교문 통과용으로 서둘러 명찰을 다는 이도 있었다.
같은 교복 속에 있는 온갖 모습들. 그들의 일부가 되어 교복을 입고 도로를 걷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어려지다니. 거참.’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던 중 그들을 볼 수 있었다.
23일의 의미가 될 그녀.
나의 절친한 친구. 아니, 절친하다 착각했던 나의 태진이와 녀석의 여동생 현화였다.
“역시.”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는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꽃 중의 꽃이라 해야 할까.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리다가 자기도 모르게 두 번 세 번을 더 돌아볼 정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미모의 여학생 김현화. 평범한 교복이 맞춤복인 양 느껴진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가 아닌 영국에 있다는 유서 깊은 학교의 것처럼 기품까지 느껴질 정도다.
다른 여학생들의 머리칼이 어깨선을 넘기지 못하는 것에 반해,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매력적으로 뽐냈다. 현재 대형 연예기획사의 연습생이자 유명 잡지의 표지 모델이며 학생들 사이에서도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학생이 그녀였다.
‘자랑스러운 내 친구의 아름다운 여동생.’
중학교 때 친구와 노래방에서 찍은 동영상을 올려 단숨에 인터넷 스타가 되고, TV 프로그램에 출연. 놀라운 기타 솜씨와 깜찍한 매력을 선보인 화제의 주인공이다.
‘고등학교까지는 졸업해야 한다. 소중한 학창시절을 버릴 수는 없다’는 부모의 강경한 의지 덕에 저렇게 학교에 다니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모델 활동도 겸하고 있기에 현화는 누가 봐도 아이돌이며 스타였다.
“23일의 주인공.”
손바닥의 고통을 느끼며 떠올릴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고통과 연관되는 작은 기억이었다. 허공에 괜스레 추임새를 넣고 키득키득 웃으니 주변의 학생들이 나를 이상하게 본다.
개의치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무관심하듯 저들도 나를 곧 잊을 테니까.
‘오는군.’
저 너머에서 오는 한 뚱뚱한 학생이 보였다.
힐끔 그를 보고 날카롭게 시선을 돌리는 태진이를 확인했다.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이다.
내 기억과는 분명하게 다른 과거의 너다. 실성한 듯 웃는 내가 과거에는 없었듯이, 투지에 찬 태진이도 과거에는 없었다.
역시, 회귀의 주인공이 녀석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펼쳐질 장면도 눈에 선했다.
‘한편의 삼류 드라마.’
태진이의 매서운 두 눈에 인파를 헤치며 달려드는 이가 포착되었다.
“현화야! 내 사랑을 받아 줘!”
유치찬란한 대사를 외치며 달려드는 그를 보고 현화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순간, 주먹을 꽉 쥐며 준비 중이던 태진이가 성큼 나섰다. 뚱보의 손을 쥐어 뒤로 꺾는다. 영화 속의 경호원이 그런 것처럼 능숙하게 제압했다.
육중한 몸이 쿵 소리 나게 쓰러진다.
“으그그극! 아파. 아프다고! 넌 뭐야!”
“나? 얘 오빠다. 그러는 넌 뭐냐?”
“나… 난… 난…”
말을 뭐라 잇지 못하던 녀석이 현화를 보더니 반색하며 말했다.
“현화 친구라고! 진짜 친한 친구. 오늘 고백하려고 했을 뿐이야!”
헤벌쭉 웃으며 하는 말에 누런 치아 사이에서 침이 산탄총처럼 튀었다.
오물을 피해 태진이가 물러났다.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 소스라치게 피했고 그것은 정면에 있는 현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는 사람이니? 혹시 사귀던 사람?”
“오빠! 절대 아냐!”
설마 하는 주위 학생들과 황당하다는 표정의 현화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뚱보는 엎드린 채로 소리쳤다.
“마, 말도 안 돼! 분명히 반갑다고, 잘 지냈느냐고! 다음에 또 보자고 했었잖아!”
절대로 아니라고 부정하는 모습에 뚱보가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태진은 슬쩍 그의 발을 걸어 나자빠진 녀석을 제압한다.
“말도 안 되긴. 인마,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나중에 또 봐요.’ 가 넌 사랑 고백으로 들려?”
혹여 유언비어라도 퍼질까 주위를 보며 또렷하고 웃음기까지 섞으며 배우처럼.
“그, 그건 아니지만, 현화는 분명히 달라! 다르다고!”
“아하~ 그래?”
태진은 ‘후’ 웃더니만 제압한 손에 힘을 주었다.
“아으으읔. 아파! 놔! 으아악!”
구슬픈 비명이 더욱 커졌다.
관람하고 있는 내 입에서는 절로 웃음이 나올 일.
맞다. 이것은 지독하리만큼 유치한 이야깃거리다. 애정 결핍인 남학생이 꿈꾸던 이상형에게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평범하지만 너무도 달콤하게 들리는 인사와 관심. 이에 흥분한 남학생은 이상형에게 깊이 빠져들고 집착하게 된다.
그 친절함. 그 관심이 그에게는 ‘유일’했기에 그런 것이다.
‘누구에겐 일상이지만 누구에겐 처음이자 전부인 추억이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 ‘정상인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감정적으로 심각하게 결핍한 상태일 때 이런 과대망상적인 행동이 일어나게 된다. 왜,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하지 않던가.
쥐어봐야 똑같이 빠져 죽을 지푸라기를 말이다.
“좋구나.”
회귀 전에는 그랬었다.
스토커가 열렬하게 사랑하는 여자 앞에 나섰다. 내 사랑을 받아달라며 온갖 유치한 짓거리를 하다가 안으려 들고 주위에 있는 태진이와 학생들과 마찰을 빚었다. 종국에는 커터 칼로 자기 사랑을 증명하겠다며 자해하는 소동을 벌이게 된다.
이는 유머 게시판에서 읽었을 법한 사건이었다.
‘이게 3월 23일의 전부지.’
오늘은 그녀가 스토커의 난동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는 날이었다.
오전의 사건 이후, 현화는 학교에서 태연함을 가장하며 불안하게 지내다가 점심 식사 때 뜨거운 국그릇을 쏟아 다리에 화상을 입게 된다.
이로써 트라우마(trauma)가 생기는 것.
그녀는 다리의 상처를 볼 때마다 스토커의 광란을 떠올리게 되고 활달하던 성격이 내성적으로 바뀌게 된다. 소심해진 것이 아니라, 예전처럼 타인의 시선을 즐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예민한 여고 시절을 그렇게 보낸 그녀는 결국 화려한 데뷔를 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렇게 평범하게. 스타가 아닌 아름다운 학생으로서 생활하게 된다. 이후 직장을 갖고 보통의 연애를 하며 상처도 받았다가 극복하여 결혼한다.
즉, 23일의 오늘은 한 여인의 인생에서 그런 분기점이 되는 날이었다.
짝짝짝…
손뼉 칠 일이다. 오늘은 그런 날이니까.
녀석의 가족이 상처받는 날.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한 태진이가 자신에게 실망한 날.
사랑하는 동생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게 되는 역사적인 날이 오늘이었다.
“이야! 멋있다!”
내가 대중 속에서 소리치자 구경하던 다른 학생이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웅성웅성하던 것이 왁자지껄 해졌다.
멋쩍었는지 주위를 보던 태진이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발악하는 뚱보에게 준엄하게 말하자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이를 본 나는 고개 돌려 교문으로 향했다. ‘저 오빠 누구야?’ ‘야 무슨 일 있었냐?’ ‘그게 뭐냐면…’ 시시덕거리는 이들과 함께 웃었다.
하지만 마음은 차갑게 식어만 갔다.
‘보름이다.’
딱 그만큼만 더 과거면 됐다. 여동생뿐이 아니라 30년을 알아온 친구의 부모까지 구해줄 수 있었던 시간이.
“겨우 보름이었다.”
교문을 지났다. 입가에 짓고 있던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네 녀석에게 있어 나의 비중은 그 정도도 되지 않았더냐.’
참으로 쓰디쓴 웃음이었다.
* * *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브라질에 있는 갈매기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부를 수도 있다는 말에서 출발하여 시적인 표현, 나비의 날갯짓으로 변천하게 된 원리다. 물리학의 카오스 이론의 원리가 되기도 한 이 이론은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 때문에 도출되는 결과물의 변화를 말한다.
‘일기장에 적혀 있었지.’
회귀를 준비하며 태진이가 알아본 이론인 듯했다.
나비효과는 어렵게 풀어놓자면 한없이 어렵지만, 간단히 말하면 정말 쉽다.
인생의 작은 갈림길. 예를 들어 오늘 본 것을 따르면 현화와 태진이에게 있어 저 스토커는 사건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미래의 그들의 모습이 달라진다.
가정주부 김현화와 연예계의 스타 김현화로.
‘고맙다.’
걱정 많이 했었다. 회귀했다는 것을 들키면 어쩌나 하고.
회귀 사실을 숨기는 것은 내가 ‘과거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준비되지 못한 채 과거로 와버렸다. 만약 태진이가 나조차도 모르는 내 습관을 안다면. 예전에 하지 않았던 행동을 내가 해버리면 빼도 박도 못하고 잡히는 것이다.
그런데 회귀를 대비하며 나비효과를 일기장에까지 적은 녀석이 오늘 아침에 저런 변수를 만들다니.
“진심으로 고맙다, 이 새끼야.”
삶을 변화시킬 핑곗거리를 간절히 바라는 이 마당에 울고 싶은 아이 아주 제대로 뺨을 후려쳐준 격이다.
웃자. 얻어맞고 풀 죽어 있어야 할 녀석이 영웅적인 행보를 걸었다.
그래서 녀석은 내가 돌발적인 행동. 과거와는 다른 행보를 걷는다 할지라도 ‘나 때문에 미래가 바뀌고 있구나. 조심해야겠어.’라고 생각하지, ‘설마 저 녀석도 과거로 온 것일까?’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왜? 녀석이 ‘다른 짓’을 이미 벌였으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사실 그럴듯해 보이는 소재인 나비효과는 써먹기 좋은 핑계에 불과하다. 세상만사 원인에 따른 결과가 있으며 미처 알지 못한 원인이 그에 따른 결과를 불러올 때. 인간의 무지함은 이를 ‘신비’라 부른다. 작용한 만큼의 반작용이 존재하며 변화된 원인분자가 변형된 결과를 불러올 뿐인 당연한 일을 말이다.
그러나 게임 폐인이자 나비효과를 맹신하는 태진이는 이러한 현실적인 원리에 무지하다. 고작해야 영화나 게임을 통해서 본 ‘과학’이 전부일 테니까.
그렇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오늘 일을 핑계로 엄한 짓을 해도 돼.’
생각을 정리한 나는 나의 삶을 바꾸기 위해 움직였다.
정문을 넘어서 내가 향한 곳은 교무실이었다.
“상현이구나. 담임선생님을 찾아온 거니?”
교무실에 들어서자 한 여선생이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누구더라?’
티 나지 않게 위아래를 훑었다. 키는 160cm 정도에 둥근 안경을 쓴 귀여운 스타일의 젊은 여성인데… 가만히 보노라니 그녀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름은 이미란. 영어 선생이며 나이는 20대 중반쯤이다.
‘더는 모르겠군.’
그녀에 대한 정보는 이 정도가 전부였다. 지난 내 삶을 통틀어서도 그다지 추억할 것이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그녀 역시도 나에 대해 이름 정도만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평범한 학생인 까닭이다. 원래, 어중간한 애들은 이렇다. 특별히 사고를 치지도. 사건을 저지르지도 않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학생은 평범함으로 인해 잊힌다.
이는 선생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의 스승과 현재의 선생은 그 의미가 차이가 난다. 지금의 선생은 직업이다. 더 비하할 이유도. 더 가치를 부여할 어떤 이유도 없다.
“네. 자퇴 절차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아, 자퇴……응?”
멈칫했다 되묻는 이미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담임선생이 있는 자리로 향했다. 그래도 담임이었다고 얼추 생각이 나기는 했다. 나이 42살에 남자 선생인 공영호. 고 3학생을 압도하기 충분한 그는 투박했고 뚱뚱하며 키가 177㎝에 달한다. 현재 내 키가 168㎝니 차이가 상당히 나는 셈이다.
그는 출근한 지 오래지 않은 듯. 이제야 서랍을 열어 시간표 따위가 있는 종이를 꺼내고 있었다.
“선생님. 자퇴 절차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뭐라고?”
심드렁하게 그가 되물었다.
다시 똑똑히 발음하여 말했다.
“자퇴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큰 목소리였다. 교무실은 제법 넓기는 하지만 목소리가 차단될 정도로 장애물이 있지는 않은 곳이다. 넓은 공간에 책상과 의자 여러 개가 있는 것이 전부이니 내 목소리는 구석구석 울렸다. 일과를 준비하던 선생들과 다른 볼일로 왔던 학생들마저도 나를 보았다.
학생의 관점에서 선생을 보면 높아 보이고, 또 어른이라는 생각 때문에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회귀를 겪은 나다. 지난 내 나이와 비슷한 연배를 보이는 교사에다 앳되기까지 한 신임 교사들을 보고 주눅이 들 이유가 없었다.
“자퇴한다니, 쟤 뭐야?”
“3반에 걔 아냐?”
“너 쟤 알지?”
저 한편에서 두 여학생이 소곤소곤 얘기했다.
“어. 2학년 때 같은 반이었거든. 얼마 전에 부모가 죽어서 학교도 안 나왔었어.”
“둘 다 죽은 거야?”
“아마 그럴걸?”
“한 방에 갔네. 일 타 쌍피?”
왜 그런 목소리 있잖은가. 분명히 약하게 하는 말인데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 말이다. 아나운서 뺨치게 발음이 좋은 탓일까. 원래 목소리가 큰 탓일까. 아주아주 잘 들리는 그녀들의 대화였다.
“그래서 자퇴하는 거야? 불쌍하다.”
안 그래도 적막한 교무실이다. 그곳에서 저들끼리 수군거린다고 하는 이야기가 내 귀에까지 또렷이 들리니 어쩌겠는가. 그들 옆자리에 있던 남자 선생이 버럭 소리 질렀다.
“이 녀석들이, 어디 죽었다 어쨌다 말을 막 하는 거야! 존칭할 줄 몰라? 게다가, 뭐? 한 방에 가?!”
“그게… 저…”
“당장 따라와!”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푹 숙이는 그녀들을 담임으로 보이는 남자가 데리고 나갔다.
보노라니 실소가 절로 나왔다.
‘곧 소문이 쫙 돌겠구나.’
생각하는 그때 인상을 확 찌푸린 공영호 선생이 내게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그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