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를 보느라 뻑뻑해진 눈의 피로를 풀 겸 나는 푹신한 이불에 누웠다. 팔과 다리를 쭉 펴고는 가만히 쉬노라니 긴장이 스르르 풀어졌다.
‘편안하구나.’
산동네의 작은 집. 작은 옷장 하나와 컴퓨터 하나가 세간 전부.
보험금과 집을 판 돈 18억으로 주식을 한 결과, 현재 나의 재산은 70억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결단코 내가 뛰어나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라서 이것밖에 벌지 못한 것이었다.
지난 삶에서 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부단히도 노력했다. 주식 관련 공부도 당연히 하였다. 물론 돈을 모조리 날려버렸지만 말이다. 내게는 엄청난 수익을 창출해낼 재능이 없었다.
나는 흔하디흔한 실패자다. 그러나 책 사이사이에 나온 예문 몇 가지를 기억할 정도는 된다. 이는 나처럼 평범한 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책에서는 말해준다. 지표. 차트. 추세. CCI, RSI, DMI 등 수많은 정보.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 사례를 곁들여 준다. 하지만 어렵고 난해한 설명들은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았다. 대신 남는 것은 곤두박질쳤다가 무섭게 치솟아 오르는 자료들이었다. ‘이것은 5년 전에 있었던 모 기업의 차트입니다.’하며 곁들여지는 설명. 책은 말한다. 이론이 적용된 실용 사례라고. 그러나 나 같은 놈이 그 차트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은 이거다.
- 내가 저 때 사고 그때 팔았더라면……
지난 자료를 보며 저점에 사고 고점에 팔아야 한다는 생각은 수없이 한다. 간절히 기대하며 머리를 굴리고 주식을 산다. 그리고 참패.
그 때문에 책 속의 성공사례는 더욱 신기루처럼 각인된다.
“안전하게 가자.”
나는 그 기억을 떠올렸다. 확실하지 않은 기억은 모두 지웠다. 모호한 추측성 자료도 지운다. 오로지 내가 제대로 기억하는 것만을 되새겼다.
나는 패배자였으니까.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렇게 주식을 사고판 결과가 지금이다. 분명하게 오를 것을 사고 오르면 파는 것.
이것이 보름 뒤 마무리될 나의 준비다.
‘녀석이 게임 할 준비를 한다면, 나는 그 회사의 주식을 사고팔겠다.’
태진이에게 게임은 곧 삶이다. 녀석은 게임 속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과거로의 회귀를 갈망했다. 그리고 지금 돌아와 있다.
나에게 있어서 녀석과 게임은 이렇다.
‘계륵(鷄肋).’
확실치는 않으나, 나는 태진이와 같은 조건으로 계약된 입장이라 볼 수 있다. 확인하고자 목숨을 걸 수는 없기에 그리 단정하고 움직이고 있는 마당이다.
그 때문에 녀석의 근황에 대해서 알아야 했다.
무섭다고 도망치는 일은 한 치 앞만 내다본 얕은 생각일 뿐. 만일 국외로 나가서 태진이나 신진권 회장과 부딪치지 않는다손 쳐도, 태진이가 계약 조건을 어겨 죽게 된다면?
‘나 역시도 그리될 수 있어.’
그렇기에 너무 멀어져서는 안 된다.
반대로 녀석의 삶에 큰 간섭을 해서도 곤란하다. 과거 회귀를 알리지 말아야 한다는 계약조건을 위반할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하거니와, 내가 덤으로 딸려 왔다는 사실을 악마가 알게 된다면 어떤 조치를 할지 모르는 탓이다.
즉, 답은 간결해진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위태로운 줄타기.
나는 이번 주까지 돈을 모을 예정이다. Z&F의 주식을 적당히 살 것이다. 그런 뒤 게임이 출시되어 어마어마한 반향을 일으킬 때. 고공 행진을 기록할 그 주식을 모조리 팔 계획이다.
자칫 주주가 되어 버리면 여러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어린 나이에 자사의 주식을 대량 보유한 내게 신진권 회장이 관심을 보이는 것이 될 터.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명의를 사용하기에는 믿을 사람이 어디에도 없는 상황인 데다가, 불필요한 소문을 스스로 일으키는 격이 된다.
그러니 전 재산을 다 퍼부어 사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적당한 이익을 볼 생각이다.
여기까지가 일단락.
남는 돈은 과거 회귀 전에 본 내가 아는 주식들. 지금으로서 확실하게 저평가되어 있지만 20년 후 확실하게 보장해줄 주식에 묻어둘 예정이다. 큰 기업의 주식이니 중간마다 배당금도 나올 터. 이 정도면 생활에 지장이 없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몇 년 단위로 기억나는 큰 건수들. 부동산 경매 따위의 것에 돈을 쓴다.
계획대로만 잘 마무리하면 나는 충분한 자산가가 되니 ‘돈’과 ‘일’로부터 해방된다.
“제대로 살아보자.”
진정한 내 삶의 목표를 위해 움직여야 함도 잊지 말자.
돈은 수단이지 목표가 아님을.
스트레칭을 이리저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마쳤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구불구불한 판자촌을 다니노라면 사회에 다른 모습들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항상 욕했던 정부에 대해서도 뜻밖에 나쁘지 않은 점이 있음을 본다.
한 예를 들자면, 한국의 복지정책은 매우 잘 되어 있었다. 생활보장 대상자들은 보조금은 물론이거니와 주기적으로 사회복지사가 관리하며 편의를 보아준다. 작게는 반찬이나 우유. 쌀과도 같은 먹을거리에서부터 홀몸노인은 목욕이나 이발을 직접 정기적으로 해주기까지 하니까.
장애인은 전용차량을 시에서 지원하여 이용할 수 있게끔 한다. 그뿐만 아니라 교육에 관한 지원도 있고 크게는 거주지에 관한 것까지 있다. 영세민 주택이라는 편견 어린 시선이 있으나 이는 살만해지니 하는 말에 불과한 일.
먹고 살 곳을 저렴한 금액으로 지원해주며 마련해준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마운 제도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정부 보조금이나 지원을 노리고 이혼 상태로 만드는 이들도 있고, 부모를 잃은 아이를 친척에게 데려와서는 아이 보육비로 나오는 돈을 가로채는 일도 있다. 허위로 등록하여 혜택을 받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잔머리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돈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말 그대로 이익이 있으니 이런저런 편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부모가 있으나 외려 남보다도 무자비하게 자식을 대하는 경우. 자식이 있으나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 노인의 경우가 있다. 그들은 부양할 가족이 있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노부모는 그렇게 잊힌다.
‘사람 사는 모습이야 제각각이지.’
아무리 애써서 제도를 만든다 할지라도 완벽할 수는 없다. 제도를 개선하지 않고 부정에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은 분명히 정부의 잘못이다.
그래서 이들을 돕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것을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이들. 그들은 반찬가게 주인이나 슈퍼마켓의 주인과도 같은 소상인이자 평범한 사람들이다.
지역 사람이기에 서로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속속들이 아는 탓에 김장철이면 김치를. 명절이면 떡을 나눈다. 큰 것은 되지 않을지언정 십시일반으로 나눔을 실천한다.
내가 산동네로 와서 한 일은 바로 그들과 안면을 튼 것이었다.
“좋은 사람들.”
동사무소에 가서 작게나마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저마다 가진 것으로 후원해주는 이들을. 그리고 그들에게 찾아가 작은 일손이나마 도우며 안면을 텄다. 이후, 대화하며 정말로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사람.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직접 방문하여 사정을 재삼 확인했다.
이타적인 마음으로 하는 순결한 봉사?
결단코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내 삶을 위한 것이니까.
‘나는, 사람을 얻고 싶다.’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친구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내가 한눈에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런 안목이 있다면 과거 내 삶이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 회귀라는 기적을 경험한 지금조차 마찬가지였다.
한눈에 친구를 알아보는 안목 같은 것은 내게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믿고 신뢰할 만한 사람을 구하는 것에 원칙을 세웠다.
그 잣대로 사람을 찾고자 한다.
‘자신의 길을 찾고 그 길을 걷고자 노력하는 사람.’
그러나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힘겨워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 재능을 빚낼 노력이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이들. 넘치는 열정이 있지만, 생활고 때문에, 부양할 가족 때문에 자신의 꿈을 접어둬야 하는 사람.
나는 그들을 찾았다.
지금의 나는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부자가 계속해서 부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돈이 돈을 부르는 까닭이다. 수십억이라는 큰돈을 굴리면 떨어지는 가루는 수백만 원에 이른다. 그 돈은 쓰기에 따라서 하룻밤의 유흥비가 될 수도. 지치고 힘든 이에게 서광이 되어 줄 수도 있다.
바라는바.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은 노력한다. 더불어 다른 이의 열정을 인정해 줄줄 안다. 이유는 바로 그 자신이 그러한 열정을 품고 있기에 그렇다.
그들을 도우며 지켜볼 것이다.
만약 사정이 나아졌다고 하여 사람이 바뀌게 된다면 나 역시 관심을 끊겠다. 반면, 초심을 잃지 않고 외려 타인에게 나눌 수 있는 마음을 유지한다면 나는 그의 친구가 되고자 할 것이다.
설혹, 친구가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
순수하지 못한 나이기에 저들의 순수함을 지켜주고 보고 싶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 * *
5월 22일 오후.
사회복지사 아주머니를 만나 돕고 있던 때였다. 여름을 대비하여 구멍 난 방충망을 새것으로 교체해 주던 도중 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하하. 오랜만이지? 너 찾기 어렵더라.”
돌아보니 교복 차림의 태진이가 서 있었다.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더웠던 탓인지 셔츠 단추를 몇 개 푼 모습.
녀석이 나를 보며 웃었다.
나 역시 이즈음 보게 되리라 짐작하고 있던 참이니, 놀라는 기색 없이 답했다.
“오랜만인데? 무슨 일이야?”
“에이~ 야아. 친구끼리 이유가 있냐? 그냥 보고 싶어서 온 거지. 하하하.”
손부채 질을 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한창 방충망을 교체하며 떨어진 흙먼지를 치우던 사회복지사 아주머니가 내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현군 덕에 수월하게 끝냈어. 나머지는 내가 정리할 테니까 친구랑 가봐.”
“그래도 기왕 돕던 건데, 마저 끝내야죠.”
“나야 월급 받는 거니까 당연하지만, 상현군은 아니잖아.”
“에이~ 그러시면 섭섭하죠~”
계속 일을 하여 얼추 마무리되어갈 즈음, 안에 있던 할머니가 나오셨다.
“응? 상현이 친구라고?”
보청기를 끼지 않은 탓에 거듭 내게 묻는 할머니였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는 ‘어디 보자.’하며 두리번거리시더니 부엌으로 들어가 봉지를 꺼내오셨다.
안에는 살구가 담겨 있었다.
“상현이 친구는 처음 보는구마. 이거 맛있응께 노나 먹거라. 우리 밭 옆에서 내가 직접 딴 거여.”
“우와. 이거 너무 많이 주시는 거 아네요?”
“그려. 경찬이 애미한테도 반찬 고맙다고 전해주고.”
동문서답하는 할머니에게 나는 함박웃음을 보였다.
“예. 그렇게 할게요.”
아주머니 역시 손을 흔들어 보이셨다. 할머니가 무슨 말을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니 그냥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다. 나 역시 크게 인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은 뒤 태진이를 데리고 나왔다.
봉지 속에서 살구 두 개를 꺼낸 뒤 남은 것은 아주머니의 경차 안, 조수석에 두었다.
“저녁 먹었냐?”
하나를 태진이에게 던지자 녀석이 이를 받는다. 예상 밖의 모습을 본 탓인지 약간 어색한 얼굴이다.
“그럴 리가. 어휴. 여기 찾느라 한참 걸었더니 엄청나게 배고프다. 도 닦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런 데 사는 거냐?”
“글쎄. 아무튼, 잘 됐어. 나도 안 먹었으니까 같이 먹자. 웬만한 건 종류별로 다 있거든.”
골목길을 돌아 삐걱거리는 문을 열어 들어갔다. 컴퓨터 한 대. 이불과 옷장이 전부인 방을 둘러보는 녀석.
“자 종류별로 있으니 골라봐.”
음식들을 꺼내 보였다.
“헐~ 뭐야 너. 코너 하나를 다 털었냐?”
쌀밥. 현미밥부터 시작해서 돼지고기 볶음. 치킨 카레. 짜장. 오삼 불고기. 쇠고기볶음. 크림 스파게티 등등 동서양을 넘나드는 50여 가지의 식품들이 좌르르 깔리자 녀석이 웃었다.
“내가 요리해서 먹는 것보다 이게 백배는 더 맛있더라.”
“흐흐. 말 그대로 고르는 재미가 있는데? 난 이거랑 이거.”
한 번에 5가지를 고르는 태진이었다.
“역시 한창 성장기라 그런지 무지하게 먹으려는구나. 좋아. 질 수 없지. 난 6개다.”
“대신 너저분해진 건 내가 정리해주마.”
“그럼 안 하려고 그랬냐?”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포장요리들을 탑처럼 쌓아 부엌으로 향했다. 큰 냄비에 물을 하나 가득 받아 놓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점화한다.
딱딱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녀석의 표정을 힐끔 보았다.
‘안심되나 보지?’
평상복 차림으로 방충망을 갈던 모습. 허름한 집과 볼품없는 내부를 보며 슬쩍 찌푸려졌던 인상이 지금은 풀려 있었다.
속내가 충분히 짐작되는 나로서는 웃음이 절로 나올 뿐이다.
‘내가 빈털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다 어필해줄까.’
끓는 물에 포장요리를 넣고 작은 상을 꺼냈다. 그리고 그 위에 놋그릇이 아닌, 고급음식점에서 쓰일 화려한 접시와 그릇을 꺼내어 배치했다.
밥을 담고 짜장 소스를 부었다. 다른 그릇에 보기 좋게 오삼 불고기를 담으며 김치 역시 작은 그릇에 옮겼다. 그리고 그 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자 녀석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이 그릇들은 뭐냐?”
“어때, 이러니까 나름 폼나지 않아? 역시 음식 세팅은 그릇이 중요하다니까.”
“진짜 그럴듯한데? 하하.”
비로소 녀석이 안심했다.
나는 한 숟갈 크게 먹으며 녀석을 보았다. 딱 봐도 단단해진 몸. 셔츠 너머로 근육의 굴곡이 보이고 얼굴선 역시 갸름해져 있었다. 지방은 빠지고 근육은 늘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