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소리의 크기는 물론 손과 몸을 움직이는 행동 역시 선이 매우 굵었다. 이는 스스로 자신감이 있음을 알려준다.
“가끔 이거 먹다 보면 음식점이랑 맛이 똑같아서 궁금해져. 혹시 음식점에서도 나처럼 이거 사서 밑반찬만 추가해서 해 주는 건 아닐까 말이지.”
“오 홀~ 하긴, 여기저기서 똑같은 고향의 맛이 나긴 하더라.”
“농담이야, 농담. 그런데 너 몸 보니까, 전보다 엄청나게 좋아진 것 같은데? 운동이라도 하냐?”
껄렁한 물음에 태진이가 신나서 답했다.
“말도 마. 너 자퇴하기 전에 현화한테 이상한 놈이 달려들었던 거 기억나지?”
“물론이지. 히어로~ 태진이.”
“그 일 겪고 나서 제대로 호신술이라도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요즘 검도에 태권도 배우고 있거든. 그런데 생각보다 이게 힘들더라고.”
나는 우물우물 씹고 있던 것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고3이 두 가지 무술을 배운다고?”
“어. 오전에는 공부. 오후에는 도장에 나가는 거지. 담임한테 가서 ‘오빠로서 동생을 지켜주고 싶습니다!’ 하며 말했거든. 이번 모의고사 성적 보고 나서 야자에 끌려갈지 계속 도장에 나갈 수 있을지가 결정되겠지만, 뭐 지금은 그렇게 지내고 있어. 하하하!”
이에,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주자 녀석이 별것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런데 넌 어떻게 된 거야? 안 그래도 너 이사했다고 온갖 소문이 다 돌았었거든. 크크. 이제 진실을 밝혀봐.”
“무슨 소문?”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었지. 세계 일주를 갔을 거다. 카지노에 가서 도박하고 있다더라. 깡패한테 걸려서 다 뜯겼을 거다 등등.”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는 녀석에게 내가 크게 웃어 보였다.
“무슨 영화 얘기 같은데?”
“반면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거다, 라는 소문도 있었지.”
“그 소문은 조금 전에 급조된 거 같다.”
“믿든지 말든지~ 아무튼 어떻게 지냈냐?”
“나? 별거 없어. 너도 내가 갑자기 돈이 많이 생긴 거 알지?”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자퇴할 때 선생님께서 내준 과제가 있었거든. 그게 바로 차용증 천장 쓰기다.”
“차, 차용증?”
“어. 팔 빠지는 줄 알았다니까. 아무튼, 그런 일도 있다 보니 내가 가진 돈을 잘 써야겠다고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우선은 돈에 대해서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졌어.”
“그래서 이사한 거냐?”
“어. 몰랐는데 아파트라는 게 관리비가 필요하더라구. 게다가 이것저것 불필요한 것이 나가서 말이야. 어차피 학교도 그만둔 거. 그 집에 있을 필요가 없잖냐. 더군다나 나 혼자 살기에는 좀 크기도 하고. 그래서 집부터 아담한 곳으로 옮긴 거지.”
소박한 세간을 보는 녀석의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돈들은 통장에 그냥 넣어뒀어. 그리고 여기서 하나씩 몸으로 부딪쳐가며 겪어보는 중이야. 덕분에 안게 꽤 있지. 학교 다니면서 스쳐보던 거 중 하나. 너 폐휴지 1kg 모아봐야 100원밖에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었어?”
돼지고기 볶음을 한 입 집어 먹었다.
“100원이 뜻밖에 큰돈이더라. 매점 빵값조차도 안 되지만, 그 100원이면 방글라데시 같은 곳에서는 한 끼 값도 된다던데? 뭐, 그런 걸 알고 나니까 내가 가진 돈이 참 크구나 싶더라고. 그리고는 신문 배달하는 형 도와주기도 하고 사회복지사 아주머니를 돕기도 했어.”
“아아~ 조금 전에 봤던 것처럼?”
“아는 사람 오면 제대로 대접하고 싶어서 이 정도 돈은 썼지. 접대비용, 예상외로 꽤 나가는데 이렇게 하면 싸게 먹히거든.”
내가 웃으며 물을 마실 때였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녀석의 표정이 묘했다. 자신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이유라 짐작해본다.
“후유. 이거 오래간만에 포식할 겸 해서 6개 골랐더니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네.”
무어라 혼자 중얼거리던 녀석이 웃으며 대꾸했다.
“걱정 붙들어 매둬. 운동 시작하니까 내가 10인분도 먹더라. 그런데…”
크게 밥숟갈을 뜬 녀석이 한참을 우물우물 거리다 결심한 듯 꿀꺽 삼키며 물었다.
“만약에 말이야. 이런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좋을 거 같냐?”
“뭔데?”
“어떤 게임에서 나온 퀴즈거든. 그런데 너라면 왠지 다른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자신도 모르게 슬쩍 좌우를 살피는 태진이였다.
* * *
“어떤 남자가 큰돈을 주면서 누군가를 죽여 달라는 부탁을 했어. 빚에 쪼들리던 한 사람은 그 남자에게서 우선 돈을 받아서 빚을 갚는 데 우선 써버렸지. 그런데 돈을 쓰고 나서 사람을 죽이려고 하니까 왠지 무서워진 거야.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약속대로 죽이는 수밖에 없을까?”
그 물음에 나는 숟가락을 멈추고 녀석을 보았다. 태진이는 나를 보지 않고 음식을 보고 있었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
‘이 얼간이가…….’
태진이가 과거 회귀를 하는 것에는 여러 조건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과거 회귀 후 3개월 안에 성륜의 주인 3명을 죽일 것.’이 있다. 추측하건대 녀석이 계약한 악마와 대립하는 존재에게 속한 이들이 ‘성륜의 주인’이라는 이들일 것이다.
게임답게 생각하면 선악의 대립구도인 셈.
성륜이 무엇인지. 그것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나로서는 해결해주고 싶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간간이 태진이의 행보를 살피며 관찰해 왔다.
그런데 내게 저런 물음을 한다는 건.
‘아직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거로군.’
우회적으로 묻는 물음. 불안과 초조를 보이는 행동으로 능히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녀석은 많이 고민했음이 틀림없었다. 누군가에게 묻기도 어렵겠거니와 조금이라도 악마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게끔 가볍게 물어야 했을 터. 그러니 진지하게 대꾸해준 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질문 자체가 답이 한정되어 있기도 하고 말이다.
‘계약을 맺은 뒤 돈은 다 썼다. 이후의 선택은 계약 이행 혹은 파기뿐이지.’
갚아 줄 여력이 없다면 살인 혹은 계약 파기뿐이 답이 없다. 그러나 살인이라는 금기를 침범할 용기가 빠져 있었다.
이대로 둔다면 녀석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하다. 기한이 다 되는 시점까지 어떻게든 회피하다가 일을 저질러 버리는 것.
하긴, 내 이런 일이 생길 줄 진작 알았다. 죽기 전까지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 게임에 목매달았던 지난 과거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진정한 어려움을 외면하고 꿈만을 갈망한 삶. 지금 그가 보이는 용기와 자신감은 미래를 알고 있다는 여유 속에서 피어나오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거 간단하잖아.”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짜?!”
반색하는 태진이를 보노라니 입맛이 참으로 쓰다.
나는 너에 대해 잘 안다. 하지만
‘너는 나에 대해 정말 모르는구나.’
절친하다 착각했던 친구에게 나는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 전에 확인할 게 있는데, 그 사람은 남자가 죽이고 싶어 하는 이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거야?”
“후후. 물론이지. 마음만 먹으면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어.”
“그럼 잘됐네. 생각해 봐. 남자가 누구랑 원한이 생겨서 죽이고 싶어졌단 말이지. 하지만 남자는 직접 나서지 않고 한 사내를 시켰어. 그리고 사내는 갈등하고 있다~ 그러면 우선 알아야 할 것. 그건 바로, 원한을 맺은 이유를 찾을 것.”
숟가락을 들어 보였다.
“예를 들어서 이게 내 보물이야. 이걸 누가 훔쳐간 상황이란 말이지. 찾다 찾다가 짜증이 나서 도둑을 죽이고 싶어진 거야. 하지만 냉정하게 보았을 때 그 남자는 이 보물을 찾고 싶은 마음이 먼저일까, 도둑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먼저일까?”
“당연히 보물을 찾고 싶겠지.”
“마찬가지야. 그 남자가 누군가를 죽여 달라고 했다면 무슨 원한을 맺을 만한 사건이 있었다는 거야. 절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이 증오스럽거나 한 건 아니라는 거지. 묻지 마 살인이라는 것도 우선 죽일 사람과 마주했다는 사건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 아니겠어?”
‘잘 생각해.’
“그 남자가 얽히게 된 사건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예로 든 이 보물 같은 거라면 굳이 죽일 것 없이 이것만 훔쳐 오면 되는 거 아닐까?”
‘악마가 내 건 조건은 성륜의 주인을 죽이는 거야.’
“핵심은 사람이 아닌 보물이라는 거지.”
상황을 알 수는 없으나 ‘성륜’의 ‘주인’을 죽이는 것이 조건이라 했다. 그렇다면 성륜이라는 것은 주인에게 속한 것이 아닌 어떤 물건이라는 의미가 된다. 혹, 최악에는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신체 일부라는 뜻으로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성륜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표현할 이유가 없으니까.
즉, 악마가 바라는 것은 ‘성륜이 다시금 활동하지 않게끔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악마가 약간의 융통성을 너그럽게 보아줄 정도여야 한다는 소망이 있기는 하지만.’
녀석이 어설프게 살인을 하는 것에 비한다면 이 방법이 더욱 성공 확률이 높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만약 아니라면?’
…어쩔 수 없다. 나는 현 상황에서 최고의 선택을 한 것이니까. 빗나간다면 노력의 부족이 아닌 능력의 한계일 테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나는 태진이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건 아닐까.
‘만일 이조차 알아듣지 못한다면 넌… 죽어도 싸다.’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맞아!”
한고비를 넘겼음에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쉰 나는 손뼉을 짝 쳤다. 이제 멍해 있는 녀석에게 준비된 도움을 줄 차례.
“우스갯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리고는 상을 한 편으로 쭉 밀어 버리고는 서랍에서 A4용지를 꺼내며 말했다.
“내가 어르신들이랑 있으면서 늘어난 눈치가 9단이야. 너 돈 필요해서 온 거 맞지?”
“어? 그, 그걸 어떻게 알았냐?”
녀석이 엉겁결에 대답했다. 나는 능숙하게 백지에 ‘차용증’이라 쓰며 말을 이었다.
“이 외진 곳까지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다 같은 이유였으니까.”
녀석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건 말건 내 할 말을 했다.
“‘돈은 빌려주지도 말고 빌리지도 말라. 빌린 사람은 기가 죽고, 빌려준 사람도 자칫하면 그 본전은 물론, 그 친구까지도 잃게 된다.’라고 셰익스피어가 말했다지. 그동안 찾아오는 친척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서 돌려보내곤 했어. 하지만 너한테까지 그럴 순 없지. 우리 우정은 변치 않는 우정이니까.”
“짜식. 고맙다!”
나는 그렇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에게 다른 A4용지를 건네주었다.
“브리핑해봐.”
“뭐? 그게 무슨 말이냐?”
종이를 받아들고는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는 듯 반문한다. 나는 팔짱을 껴 보이며 답했다.
“여기까지 찾아와서 나한테 돈을 빌린다는 건 몇만 원 수준이 아니라는 거겠지. 꽤 많은 액수니까 여기까지 왔을 거야. 그러니 그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 그리고 반환기간은 언제까지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말해 봐.”
“…”
그러자 입을 떡 벌리고는 나를 멍하니 보는 태진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보던 녀석은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웃더니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그것은 익히 알고 있는 new century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상현실 게임? 헛소리 하냐?”
“진짜 거짓말 아니고, 가상현실 게임이 곧 나온다고. 국내는 물론 세계를 석권할 초대작 게임이.”
“그래서 게임하게 돈 달라는 거야?”
“정말 나온다니까! 나, 그 게임에서 일인자가 되고 성공할 거다.” “…밥 먹었지? 잘 가라.”
“야. 진짜라니까! 나 못 믿냐? 이거 진짜로 되는 게임이야!”
허황스럽게 들리지만, 체계가 잡힌 그의 게임 라이프와 계획이 이어졌다. 핵심을 빼고 가상현실 게임으로 성공하겠다고만 반복하는 녀석. 그리고 우정만 강조하는 태진이에게 나는 어쩔 수 없다는 기색으로 져주었다.
“징한 놈. 딱 한 번만 져주마. 우정으로 믿어본다.”
“후회하지 않을 거야. 너도 이참에 같이 하는 건 어때?”
“나중에 너 성공하는 거 보고.”
“후후. 그때는 늦을 텐데?”
“친구 덕 보면 되지, 뭐.”
객쩍은 소리를 하며 돈을 빌려주었다. 이어, 쓸데없는 잡담들을 더 나눈 뒤 녀석을 배웅했다.
이후, 모자를 쓰고 안경을 쓴 뒤 조용히 녀석의 뒤를 쫓았다. 먼발치에서 아주아주 조심히.
그리고 새벽녘에 돌아오는 내 손에는 타고 남은 재 뭉치가 들려 있었다.
태진이가 제거한 성륜의 흔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