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실이 정말로 재미있었다.
‘나 같은 놈한테는 그저 감탄만 나오는구나.’
게임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이 여자, 분명히 랭커 중의 하나였을 것 같다. 굳은살이 배길 정도로 현실에서 궁을 다루며 저 정도의 파악능력을 갖춘 명철한 여자가 누구일까.
나는 모른다. 게임 세계에서는 분명히 이름을 날린 랭커였겠지만 일반인이었던 내게는 ‘기행을 일삼은 자들’만을 가십거리로 접했을 따름이니까. 다만 랭커만 아니었다면. 만일 현실에서 만났었다면 어떻게든 후원해주고 싶은 인재가 틀림없었다.
‘꿈속에서 만난 도도한 매력의 여자.’
게임 속 고수가 될 그녀이기에 관심을 접었다. 랭커와 관련된 복안은 태진이가 치밀하게 계획해 두었을 터. 그의 계획을 망가뜨려서는 곤란하니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그녀는 가만히 나를 보다가 물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웃고 있네요. 당신은 화를 내지 않는군요.”
‘당신도 1%를 하면 나처럼 될 겁니다.’
게다가 왜 기분이 나쁘다는 말인가.
“화를 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볼 따름이었다. 다시금 어깨를 으쓱거린 나는 인사하고 그녀를 지나갔다. 그리고 조용히 퀘스트 창을 다시 열어, 한쪽에 있는 ‘포기’라는 단어를 눌렀다.
[마터와의 호감도가 하락하였습니다]
괜찮다.
그녀 덕분에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퀘스트를 하며 게임을 즐기러 온 게 아니었다는 걸 말이지.’
처음 하는 게임이고 엉겁결에, 주어지는 퀘스트를 따라 움직일 뻔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내 목표는 게임을 즐기는 것도, 랭커를 만나는 것도, 랭커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성륜의 반응을 느끼는 것. 단서를 아는 그것일 따름이다.
더불어 게임의 중요 퀘스트는 회사에서 직접 관리를 하기도 한다. 일례로 대규모 이벤트가 있지 않던가.
‘만약 퀘스트를 통해 성륜을 알려고 한다면 나에 대해 신진권 회장이 알게 될 우려가 있지.’
초고가형 캡슐을 구매하면 개별 관리가 되기에 저가형으로 샀던 나다. 현실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간접적으로 성륜에 대한 정보만 알고자 1%의 체감도로 플레이 중이었다.
그런데 주어진 퀘스트를 대놓고 따라 하다니. 천만의 말씀!
“아주 좋다.”
뚜렷하게 개념이 잡혔다.
어찌 움직여야 할지 정리한 나는 이에 따라 행동 지침을 정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new century의 세계를 우회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사전조사가 필요했다. 제대로 new century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여타의 게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 * *
[휙! 퍽!]
[휙! 퍽!]
규칙적인 칼 놀림에 ‘꾸엑!’ 하는 돼지 울음소리가 따라붙었다. 칼의 움직임. 소리와 함께 들리는 비명이 잘 어우러지니 마치 내가 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것을 타격감이라 하나보다. 초보자용 빨간 물약을 먹으며 칼질을 스무 차례 하자 드디어 오크가 ‘뀌익!’하며 쓰러졌다.
징-!
경험치 98%를 가리키던 게이지가 끝까지 차오르며 하늘에 빛이 내려왔다. 감소했던 HP가 차오르며 레벨 상승을 알리는 신호음이 띠링띠링 거린다.
‘대동소이하군.’
떨어지는 돈과 ‘오크 족 단검’이라는 아이템을 줍고 인벤토리 창을 열었다. 그러자 퀘스트 아이템인 ‘떠돌이 오크 큘락의 머리’가 들어와 있다. 이를 확인한 내가 귀환 주문서를 찢자 마을의 작은 우물이 보였다.
나는 옆에 있는 NPC, 잭에게 다가가 클릭했다.
창이 떠올랐다.
- 흑흑. 이것이 떠돌이 오크 큘락의 머리군요. 용사님, 감사합니다. 이제 하늘에 간 제 아내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을 겁니다. 감사의 보답으로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띠링~!
새로 창이 열리며 아이템 습득을 알려주었다. 나는 이를 끝으로 접속을 종료했다. 그러자 모니터와 마우스, 키보드 앞에 있는 내가 떠올랐다.
마지막 것은 레벨을 10까지 키웠더니 시간이 좀 더 걸린 것 같다.
“으음…”
손으로 선글라스를 벗고 센서를 떼어냈다. 고개를 흔들다가 관자놀이를 지압한다. 밤을 새워서 게임을 했으니만큼 눈이 뻑뻑했던 탓이다.
“쉬려고 누웠다가 날밤을 세 버렸군.”
그러나 소득은 있었다.
하품하며 찬물을 받아 세수했다. 그런 뒤 다시금 과도로 왼손의 상처를 살짝 찔렀다. 섬뜩한 통증이 아교처럼 들러붙은 잠기운을 싹 몰아낸다. 아찔함으로 고개를 세차게 흔든 나는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털썩 앉았다.
‘어쩐지 허수아비니 토끼니 하더니만 그래서 그런 거였어.’
볼펜과 종이를 꺼내 지금까지의 정보를 정리했다.
어쩜 이리도 판에 박혔는지, 판타지 온라인 게임의 시작은 토끼와 허수아비로부터 시작됐다. 이제 제법 아는 터라 초반에 뺨을 맞고 쫓겨난 사내가 이해되는 나였다.
‘자자. 시작해볼까.’
하룻밤의 경험을 토대로 나는 기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스칼렛을 통해 퀘스트의 의미를 깨달은 나는, 나 스스로 게임에 대해 잘 알지 못함을 자각할 수 있었다.
‘우선 알아야지.’
new century의 접속을 종료한 나는 인터넷 접속을 하여 인기 있는 온라인 게임을 두루 경험했다. 머지않아 new century 탓에 서비스 종료될 게임들이지만 아직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쉽게 접속할 수 있었다.
내려받기하며 홈페이지를 들어가 공지를 꼼꼼하게 확인.
운영자들의 대처와 몬스터에 대한 간략한 정보, 캐릭터의 능력치. 그리고 육성 비결 따위를 본 뒤 접속하여 레벨 5까지를 키웠다.
그렇게 판타지 온라인 게임 1위~5위까지의 게임을 해본 결과 new century와의 차이점과 일치점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이를 토대로 new century에서의 행동 방침을 정할 차례.
‘우선 나누어야 하는 것은 초월자와 Z&F의 역할이다.’
잘 나가는 게임은 서버가 20여 개 넘게 분산되어 있었다. 같은 세계관의 세상을 나누어 놓은 이유. 그것은 수많은 접속자를 감당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그뿐만 아니라 공지를 보고, 또 몸으로 경험하건대 사냥터에도 제한이 있어 몬스터가 생성되는 속도와 게이머가 사냥하는 속도가 조정되고 있었다.
‘좋은 아이템을 얻는 인기 사냥터는 서로 자리 때문에 싸우기까지 한다지.’
사냥터를 독식하여 이익을 독점하는 것. 이러한 탓에 여러 다툼이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게임이다.
반면 new century는 다르다. 서버가 나뉘어 있지도 않을뿐더러 모든 게이머. 말 그대로 전 세계의 접속자들이 하나의 세상에서 함께 살아간다. 더 중요한 것은 new century의 세계는 지구보다 크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가입 절차조차 없었어.’
다섯 개의 게임을 접속하면서 나는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입력해 계정을 만들었었다.
‘나’라는 신원을 증명한 뒤에야 게임에 접속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new century는 그런 것이 없었다. ‘동의하십니까.’ 하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바로 접속시켜 준다. 캡슐에 누워 접속하면 자신의 캐릭터가. 하나뿐이 생성할 수 없는 캐릭터가 현실의 몸과 꼭 같은 크기로 그냥 생성된다.
이는 회사 측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순하게 신체 스캔 없이 캐릭터가 형성된다는 것을 넘어서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로 알 수 있는 사실.
“게임 접속과 세계관은 초월자의 영역이다.”
더불어 안심되는 것은 초월자가 변형된 성륜을 보고도 내게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역시 잿가루가 이렇게 변할지는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초월은 했지만 완벽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 외의 다른 요소들은 다른 게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악할 정도의 자유도만 제외하면 말이다.
‘마치 게임 접속과 동시에 다른 세계로 이동시켜주는 것 같을 정도야.’
완벽하게 구현된 new century의 세계에서 여타 ‘온라인 게임의 요소’들을 구분하면, 초월자와 Z&F의 역할이 어떻게 나뉘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게이머에게 갖추어진 부분들을 파악해 보자.’
하나. 계정이 없다.
그렇다면 Z&F에서 게이머들의 동향을 알아보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엄연히 상용화를 하여 손님을 상대로 하는 처지다. 그렇다면 손님관리를 해야 하는데, 접속 때부터 누가 누구인지 정보를 얻을 수가 없는 상황이니 어쩌겠는가.
모든 게이머의 자료를 취합해 감시하고 있다?
레벨 상승 포인트는 물론 스킬 숙련도 등등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캐릭터 생성 자체가 회사의 영향 밖의 일이다. 60억 인구를 감당할 서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보다 많은 new century의 NPC와 각종 몬스터. 기후 등을 Z&F가 전부 통제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
그렇다면 접속자 수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현재 ‘수준’으로 집계와 통계를 내릴 게임적인 수단. 번호표 없이 입장한 관객들에게 번호표를 부착하는 방법은?
바로 퀘스트와 이벤트. 랭킹 제도.
탐나는 미끼와 확실한 보상이다.
“분명히 이것들이야.”
부와 명예.
게임 속에서 아이템을 제공하고 현실에서까지 조명을 비추며 회사가 제공하는 부와 명예까지 얻을 수 있다.
이 얼마나 큰 매력이랴. 퀘스트를 통해 성장하고 이벤트로 재미를 만끽하며 랭킹에 올라 명예욕을 성취할지니 게이머들은 이 미끼를 물 수밖에 없다. 안 물면 바보다.
즉.
“이것들만 피하면 나에 대해 태진이는 물론 Z&F조차 알 수가 없게 된다.”
악마나 성륜과 관계됐을 법한 그들의 눈을 피한다면 최소한 나의 회귀 사실만큼은 철저하게 보장되는 셈.
그렇다면 앞으로가 아닌, 지금까지 내가 실수한 점은 뭘까?
내가 Z&F라면 어떤 게이머들을 관리대상으로 둘까?
‘되짚어 보자.’
나는 종이에 쓰며 생각을 확실하게 정리했다.
과거 보았던 신문 기사들. 단편적으로나마 떠오르는 태진이의 말에 따라 하나하나 파헤쳤다.
첫 번째.
‘초고가의 캡슐과 관련 종사자들. 그리고 회사 주식 보유자와 같은 이들이겠지.’
나는 저가형을 샀고 주식도 중간에 치고 빠졌다.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
두 번째.
‘체감도.’
Z&F의 관점으로 볼 때 낮은 체감도를 사용하는 이들은 사실 관리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누구보다도 잘 아는 까닭이다. new century의 세계에서 고레벨이 되는 것. 그리고 역사에 영향을 끼치는 이들은 자유도가 높은 이들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혹 낮은 체감도의 게이머가 고레벨이 된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앞서 내가 겪었던 것과 같이 선택의 폭이 좁게 된다.
즉, 그들은 낮은 체감도의 유저는 논외로 친다. 경계 대상의 범주에 아예 속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대세를 따르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인정했다.
“너무 낮췄어.”
100억이라는 보상금에 혹해 모두가 높은 체감도를 하는 상황에 1%라니. 이는 영향력을 끼친다는 측면에서의 주목이 아니라 ‘저런 이상한 녀석도 있군.’ 하는 정도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조금만 생각했더라면 눈치챌 수 있었던 작은 실수다.
하지만 쉽게 바로잡을 수 있었다. 1%라는 것은 특징이다. 이 특징을 가진 내가 그들의 눈에 띄지만 않으면 모든 것은 해결된다.
역시, 관리 대상에 포함되지 않을 터.
주의한 보람이 있었다. 함정을 무사히 피해 입구에 들어선 격이다.
남은 것은 퀘스트와 이벤트, 랭킹을 피하며 안전하게 new century를 여행하면 된다.
“기본 스킬은 5레벨부터 얻고 랭킹 등록은 10레벨부터였지.”
5레벨에 스킬을 익히고 그 이후부터 퀘스트와 이벤트, 랭킹에 등록되는 일을 피하면 해결되는 셈이다.
‘게임을 하는 게 다소 빡빡하기는 하겠지만… 걸려서 한방에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이만하면 충분했다.
“휴우.”
기나긴 공부와 정리가 끝났다. 나는 만족스럽게 펜을 놓았다. 한 가지 일을 끝낸 탓일까. 노곤하고 몸이 가라앉는 느낌이다.
‘하긴, 날밤을 지새웠으니 피곤한 게 당연하지.’
절로 하품이 나온다.
하지만 잘 수는 없었다.
이렇게 멍하니 낮에 잠을 자고 밤에 게임을 한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낮에 잠을 자게 되면 그만큼 밤에는 덜 피곤하게 된다. 그렇게 밤잠을 뒤척이면 자연히 낮에 피곤하게 되는 악순환이 이루어진다.
더불어, 오늘은 중요한 할 일이 있는 날이다.
‘매우 중요한 일이지.’
이를테면.
“속죄랄까.”
주먹을 꽉 쥐어 정신을 다잡은 나는 목욕을 한 뒤 밖으로 향했다.
* * * *
내가 정말로 즐기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사람 구경이다. 저쪽 아래편 길 건너에 있는 초등학교를 가만히 보노라면.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뛰고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련한 기억으로 가슴 한편이 아리고 기쁘면서도 서글퍼진다.
뭉클한 기억 하나는 과거 부모님과 함께했던 시절이다. 비가 오면 어머니께서는 학교 앞까지 우산을 들고 마중을 오시곤 했었다.
때로는 길이 어긋나 척척하게 젖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수건으로 머리칼을 닦아주시고 목욕한 뒤 따끈한 코코아로 속을 데우게 하였다. 식사를 준비하시는 어머니. 퇴근하신 아버지는 내게 장난을 걸며 간질이곤 하셨다.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었다. 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여러 일에 대해 두서없이 말했었다. 두 분은 나의 이야기에 크게 호응하며 들어주셨다.
그래……
‘그랬었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분들이다.
미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두 번째 기억은 말 없는 아내와 아이에 관한 것이었다.
능력 없는 나 때문에 항상 빠듯했던 살림. 그러한 탓에 나는 피곤함에 절어 왔었고 재잘거리는 아이의 장난에 마주 답해주지 못했었다.
사람이란 동물이 이렇게 이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