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자기~!”
“야야. 나 말리지 마. 말리지 마라니까? 내 안구 정화를 위해서라도 저것들을 그냥 확! 아, 진짜 말리지 말라고!”
“아무도 안 붙들고 있어. 가서 냅다 갈겨버려!”
“…이럴 땐 잡아줘야지. 이것들아.”
아마도 과도하게 보이는 저런 표현들은 이곳이 현실이 아니기에 더 적나라하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진짜 능숙하군.’
NPC 앞에서는 딱 고개 숙이다가 퀘스트가 끝나고 거리에 나오면, 중요 NPC가 없을 때마다 걸으며 행하는 저 행각은 정말이지 뛰어난 감각이 아닐 수 없다.
게임의 능력치를 이용하여 품에 꼭 안고 다니는 모습.
나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적극적인 사랑 표현이었다. 새삼 나는 저들처럼 불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괜히 씁쓸해진다.
‘그래. 예쁜 사랑들 해라.’
구경은 이쯤이면 됐다.
마을의 울타리를 벗어난 나는 서쪽으로 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살짝 미련이 남는다. 무언가 가슴에 탁하고 막힌 이 느낌. 한방이면 시원하게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유혹이 내 발을 붙든다.
스킬창을 열어서는 쇼크웨이브를 괜히 보고 또 보고 눌러보고 다시 본다. 반짝이는 모습이 써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특히, 피해 없이 밀쳐낸다는 부분이 유난히 빛나 보였다.
팍팍!
라이트 레프트 훅을 허공에 날려본다.
그리고 스킬창을 닫았다.
그런데도 반짝이는 것이 아닌가.
‘한 방 날리라는 신의 계시인가.’
신탁이 있다면 이런 것이랴. 하며 슬쩍 열어보니, 알람 쪽지창이었다.
어느덧 기상 시간이 다가온 것.
피식 웃어넘긴 나는 게임을 종료했다.
* * * *
6. 달인
* * * *
기지개를 쭉 켜며 기분 좋게 일어났다.
가상현실을 밤마다 즐기면서 달라진 점 중 하나는 잠결에 뒤척이는 일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소음이 들리건 컨디션이 좋지 않건 간에 무조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트라우마가 있거나 악몽 꾸는 사람한텐 아주 제격이다.
아침 일과를 시작했다.
냉수로 세안하여 정신을 일깨운다. 손의 상처를 확인한 후 간단히 스트레칭.
밖으로 나가 가벼운 운동을 시작한다. 언덕 밑으로 걸어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정도의 무난한 운동이다.
그러며 오늘의 할 일과 계획을 점검했다.
이것이 하루의 시작이자 내가 하는 운동 전부였다.
냉수마찰과 스트레칭, 걷기가 전부지만 나를 다잡는 데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디까지나 나는 작은 상처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평범한 남자였으니까. 이 악물고 인간 한계를 극복하는 일 같은 건 진작 포기했다.
“딱 이만큼.”
땀이 날 정도는 아니게. 살짝 몸이 더워질 정도가 되어 들어온 나는 아침 식사를 간단히 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은 뒤 모자를 눌러쓰고 학교로 향했다.
오늘은 태진의 뒤를 쫓을 요량이다.
보름마다 한 번씩 나는 녀석을 관찰한다. 내 명줄을 쥐고 있으니 신중을 기하는 것이다.
미행이라는 게 어려울 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뜻밖에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며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진다. 그러나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자신과 관계된 이들에게만. 필요 있는 사람들만 눈여겨본다.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가만히 걷다가도 낌새를 딱 알아차리지만, 그것은 그들이 주위 배경을 눈에 담고 사람을 기억하는 훈련이 되어있기에 가능한 일에 불과하다.
일반인은 어지간히 못 하지 않는 한, 미행자를 눈치채지 못한다.
‘시야에 들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더군다나 나처럼 대상의 동선을 꿰고 있다면 걸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진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녀석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까.
나는 근처 서점에 들러 가십 기사가 잔뜩 실린 잡지를 샀다.
* * *
태진이의 일상은 이러하다.
7시.
다소 이른 시간에 등교하여 학교 운동장을 달린다. 가끔 담 너머로 힐끗 보면 허공에 발차기 연습도 하는데, 보는 이에게서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매끄러운 동작들이었다.
녀석은 가능한 한 숨기려고 하는 나와는 달리 참으로 당당하고 떳떳했다.
1교시 전.
운동을 마치고 간단히 수돗가에서 몸을 씻는다.
종이 울리고 수업이 시작될 즈음에는 나 역시 근처 의자에 앉거나 아파트 공원에서 잡지를 읽었다. 이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쭉 계속된다.
마침내 수업이 종료되고 녀석이 나올 때쯤이면 멀찍이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우루루 쏟아져 나오는 같은 교복 무리의 학생들 틈에서 녀석을 찾아내는 일?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두 남매의 빼어난 외모 덕분이다. 내가 자퇴하기 전에 있었던 스토커 사건 때문인지 태진이는 현화를 호위하듯이 함께 다녔고 둘을 흠모하는 친구들까지 무리지어 나오게 된다.
혹, 찾지 못할까 싶어 쌍안경을 들었던 내 손이 민망해 질정 도로 녀석은 눈에 띄었다.
‘다음은 도장이지.’
모의고사 성적이 꽤 좋았는지, 수험생임에도 5시경에 하교한 태진이는 도장으로 들어간다.
이슈 덩어리이자 훈남인 태진이 덕분에 태권도장 역시 관원이 부쩍 늘었다 한다.
여학생들로 한가득.
‘꽃 따라서 남학생들도 늘어났고.’
여전히 배우고 있는 무술은 태권도와 검도.
명상원은 그만둔 것으로 보아 다 배운 뒤 집에서 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월수금은 태권도장을 가고 화목토는 검도장을 간다.
‘각각 소요 시간은 2시간.’
7시~8시 사이가 되면 집 근처의 헬스장에 들려 마지막으로 훈련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태진이의 일과다.
새벽은 운동. 오전은 공부. 오후는 운동. 남은 시간은 가상현실을 하는 것.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녀석이 집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면 나 역시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이것으로 일단락된다.
‘지금의 동선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게임 접속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발 빠르게 움직인다면 그때는 나도 바빠지겠지.’
다행히도 아직은 그런 기미가 없다.
느긋한 미행을 하며 지친 다리를 마사지해본다.
점심과 저녁은 근처 식당에서 해결하고 온종일 대기하고 있었다. 덕분에 녀석이 귀가하는 모습을 볼 때쯤 되면 절로 다리를 두드리면서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따분하긴 하지만 결단코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던 때였다.
“여어~ 상현이! 놀다 오는 겨?”
시간은 밤 10시경에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구수한 목소리가 반긴다. 시선을 돌리니 정류장 옆쪽으로 두 사람이 보였다.
둥글둥글하게 후덕한 인상의 사람은 자주 안면이 있는 우유 보급소의 강하성 소장이었고 다소 마른 체형의 한 사람은 몇 번 지나가다 본 적이 있는 인근 쿵푸 도장의 이용택 관장이다.
“예. 소장님은 한잔하시려나 봐요?”
“어어. 간만에 삼겹살에 쐬주 좀 할라 그런다. 넌?”
그 말에 이용택 관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강하성 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둘보단 셋이 낫잖아. 그리고 사실 나보다는 저 녀석이 더 도움될 거야. 도움을 얻을 수만 있으면 말이지.”
괜히 헛기침하는 이용택 관장이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나 역시 괜히 피할 이유 또한 없었다. 내가 여러모로 티 나지 않게 조심하긴 하지만 대인기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저 고기 많이 먹는데요?”
“배터지게 먹어도 좋다. 가자꾸나.”
어느새 걸어온 강하성 소장이 나와 어깨동무를 하며 끌고 갔다.
* * *
삼겹살 5인분과 소주 4병을 주문했다.
나 역시 수저를 꺼내 각각의 자리에 놓고 물을 따랐다.
“너 이 친구 알지? 몇 번 우유배달 했던 거 기억나려나?”
“물론이죠. 이용택 관장님 맞으시죠?”
“아, 그래. 반갑다.”
웃는 것도 아니고 무표정한 것도 아닌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답하는 관장이었다. 나는 잘 됐다는 투로 물었다.
“그런데 그거 진짜세요? 소장님이 한잔하실 때마다 말하는 거, 들었거든요.”
“뭐가?”
“특이한 친구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이소룡 영화 보고는 학교도 안 가고 무술 연습하셨다면서요? 그러다 대학 등록금 들고 소림사에 직접 가시구요.”
그를 보고 강하성 소장을 힐끔 보고 웃어 보였다. 그러자 나를 보던 이용택 관장은 옆에 있는 친구를 보더니 주먹을 쥐었다 펴 보인다.
“애한테 별소리를 다 했군!”
“푸하하. 내가 그랬었나? 그래도 그건 얘기 안 했다구. 너 내공을 모은다고 밤에 가부좌 틀고 잠도 잤다는 거 말이다. 다음 날 일어나서는 다리에 감각이 없어서 발광하곤 했었지, 아마?”
“인마!”
장난스럽게 웃으며 소리치고 넉살을 떠는 두 사람이었다.
마침 잘 됐다. 전통 무술을 오래 수련한 사람이라 하니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내공이란 게 있긴 한가요?”
“기(氣) 말하는 거지?”
이용택 관장이 씁쓸해하자 강하성 소장이 웃으며 대신 답했다.
“야야. 말도 마라. 그놈의 내공이니 장풍이니 하는 거 익혀본다고 이 녀석이 20년 넘게 수련했다는 거 아니냐. 그런데 결론이 뭔 줄 아냐?”
“뭔데요?”
“없단다. 없어.”
“기가 없다고요?”
반문에 이용택 관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기는 있지. 다만 젊을 적 치기로 생각했던 내공이나 상상 속의 무공은 없다는 말이다.”
강하성 소장은 반찬과 소주가 나오자 병을 따 잔에 따르며 말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재미있었거든. 인석이 중국 간다고 해놓고 10여 년 안 보이더니만 훌쩍 돌아와서는 내 앞에서 샌드백을 슬쩍 치는 거야. 그거 한방에 들썩이고 터져나가는데 진짜 기인열전이 따로 없었다구. 헌데, 그래놓고 한다는 말이 내공이 없다는 거니 웃길 수밖에.”
“그런 게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되는 거였어요?”
흥미가 절로 돌았다. 만일 저런 무술을 익혀낸다면 초월자들에게 대항할 또 다른 수단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악마가 있다면 현실에도 그를 상대할 이가 있을 테니까.’
만약 없었다면 세상은 진작 악마의 뜻대로 이루어졌을 테니 말이다. 악마라는 표현도 필요 없이 그가 곧 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 기대와는 달리 이용택 관장은 소주잔을 들고 빙글빙글 돌릴 따름이었다.
“그거, 요령이다. 별것 아닌 요령. 쓸데라곤 전혀 없는 요령이지.”
가라앉는 분위기. 강하성 소장 역시 어색하게 나를 보다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막는 시늉을 해 보였다.
잘은 알지 못하지만 무언가 울적한 일이 있음이 분명했다.
고기를 불판 위에 올려놓는다.
주위 취객들이 떠들며 대화하고 우리 역시 그 냄새에 빠져들 즈음.
“자자. 한 잔씩 하자구. 고기 다 구워졌다, 이 친구야.”
강하성 소장이 너스레를 떨며 고기를 각자에게 놓았다.
“어차피 그만두는 마당인데 한 번 얘기나 쭉 해봐. 나는 물론이고, 요 앞에 있는 녀석. 나이답지 않게 듬직하거든. 하하하.”
이용택 관장은 마른 웃음을 보이더니 말문을 열었다.
“영화보고 운동하다 보니 무술이 좋아져서 중국까지 갔었지. 운 좋게도 적전제자까지 되어 열심히 익혔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도장을 열고 운영했었지.”
빙글빙글 도는 술잔.
“하지만 한국 땅에서 정통 쿵후 도장이 무슨 인기가 있겠나. 단증을 딴다고 해도 취급도 해주지 않는데 말이야. 그렇게 근근이 살고 있다가 오늘, 도장 정리하고 나온 참이다. 이 녀석은 내가 적적할까 봐 같이 온 거고.”
“어때? 딱 봐도 망하게 생겼지? 인석이 말도 잘 못해요, 융통성도 없어요, 그러니 잘 될 턱이 있나. 남들처럼 다이어트 태권도. 에어로빅 킥복싱. 종합 실전 격투 무술 등등 해서 이벤트도 좀 하고, 기호를 맞춰야 하는데, 주야장천 정석대로 가르치니 될 턱이 있겠냐.”
“정석대로 하면 어떻게 하는데요?”
“회사원이건 어린아이건 상관없이 남자는 우선 줄넘기 5,000번. 여자는 줄넘기 3,000번을 시키지. 첫날 그 정도로 하고 나면 근육통에 장난이 아니잖아? 우선 거기서부터 관심이 뚝 떨어지는 거야.”
호기심으로 온 이들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용택 관장은 이 방법을 고수했다.
“쿵후는 무술이다. 무도를 익히려면 다른 도장을 찾아야 하는 거지. 무술은 상대를 제압하고 쓰러뜨리는 목적으로 익히는 거다. 그렇기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단련을 시키는 것이고 급소를 치는 것도 마다치 않는 것이 정석이니까.”
“예를 들면 눈 찌르기나 불알 차기 같은 거 말이야. 하하하.”
전쟁이라면 살기 위해 그러하는 것이 인정되겠지만, 현실에서 불량배를 만났다 하여 눈을 뽑고 관절을 꺾는다면?
……글쎄. 누가 더 과실이 클지는 뻔하다.
“돈 좀 많이 깨지겠는걸요?”
“자존심 지키고 살림 거덜 나는 거지.”
“사실 이게 웃기는 거다. 주먹이나 발차기로 벽돌을 깨부수고 차창을 깨뜨리며 각목이나 야구 배트를 박살낸다 치자. 젊을 적에는 ‘강함’이라는 말에 매료되어 부지런히 단련했지만.”
손을 닦도록 나온 물수건을 겹쳐 쥐고 손으로 가볍게 찢어 보이는 그. 하지만 아무 필요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린다.
“일반인도 망치를 휘두르면 벽돌을 깨부수고 차장을 부서뜨릴 수 있지. 그런데 아픔을 감수하고 주먹이 기형적으로 변하면서까지 단련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각목, 야구 배트 같은 것을 박살내서 뭐하겠나. 보여주기 위한 눈요기에 불과하다. 생사를 오가는 일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세상에선 다 자기만족이고 하잘 것 없는 일에 불과한 것이지. 전쟁터? 제아무리 몸 단련해도 총에는 못 이긴다.”
“그래도 귀신같은 거 물리치거나 하는 데 쓰면 좋지 않을까요? 왜, 소림사도 절이니까 귀신을 쫓아내거나 하는 비슷한 걸 하잖아요.”
악마와의 일을 겪으며 품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려는 차원의 질문.
“이야~ 이거 상현이가 귀신을 믿을 줄은 몰랐는데? 생각 외야.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