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둑.
손마디 꺾는 소리가 잘 마른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 같았다.
두 손의 마디를 하나씩 꺾어 쥐며 탁발규가 비릿한 웃음을 띠고 하후량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는 하후량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것이 탁발규의 심사를 뒤틀어 놓았다.
자기 앞에서 저처럼 아무 두려움도, 공포도 내보이지 않고 뻣뻣이 서 있다는 건 명백한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오늘은 어디서부터 주물러줄까 생각하고 있는데 하후량의 억양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시작하지.”
또 기선을 빼앗겼다는 기분이 들어 탁발규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맛난 음식을 앞에 두고 요리조리 뜯어보며 먼저 눈으로 즐기듯 하후량의 듬직한 체구를 훑어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불쑥 들이밀어 온 하후량의 말이 그의 즐거움을 깨뜨려버린 것이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불러내긴 자기가 불러내지만 시작해오는 건 하후량이었다.
언제나 선수를 빼앗기고 있다는 찜찜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늘밤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일 놈.”
탁발규가 이빨 사이로 억눌린 신음처럼 무섭게 사려 문 한마디를 뱉어낸 순간 하후량이 몸을 던지듯 맹렬하게 부딪쳐왔다.
쩔그렁거리는 족쇄 소리와 함께 어느새 다가온 그가 이마로 탁발규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탁발규의 얼굴 복판에서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억!”
비명을 지르며 코를 감싸 쥐고 물러서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뭉클뭉클 선지피가 솟아 나왔다.
이렇게 어이없이 당해본 것도 처음이었지만, 쿵쿵거리며 세 걸음이나 밀려난 것도 처음이었다.
치솟는 분노가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다시 쩔그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관이나 나가는 무거운 족쇄를 차고도 하후량의 몸놀림은 가볍고 신속했다.
그것을 보며 탁발규는 처음 저 놈을 두들겨 패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라진 몸놀림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벌써 일 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쯤은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어야 했다.
뼈를 쇠로 만들어 놓은 자라고 할지라도 이곳의 중노동과 험한 음식은 한 달이 가지 못해 그 뼈를 삭정이로 만들어 놓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의 살기등등하던 눈빛이 시체의 그것처럼 풀려 버리는 데는 닷새면 족했다.
아무리 흉악한 놈이라고 해도 그 무렵이면 혼백이 빠진 멍청이가 되어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데 하후량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뼈와 근육들은 갈수록 더 단단해져 가는 것 같았다.
눈빛도 아직 생생했다.
탁발규는 하후량이 요즘은 제법 잘 버틴다고 생각했다.
그가 처음 제 주먹에 맞아 길게 뻗었을 때보다 버티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단단해지는 쇳덩이 같은 자였다.
손바닥 안에 가득한 피를 가슴에 쓱 문질러 닦은 탁발규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하후량은 두 발을 묶은 족쇄 때문에 보폭을 크게 떼어놓을 수 없었다.
종종걸음을 치듯 잰걸음으로 다가선 하후량의 차가운 눈이 어느새 탁발규의 코앞에 있었다.
훅, 끼치는 더운 숨결과 함께 그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뻗어 나갔다.
부드득 이를 간 탁발규가 머리를 틀어 그것을 피하더니 대뜸 하후량의 허리를 잡아 들어올렸다. 빠르고 힘 있는 몸짓이었다.
그가 욱, 하고 힘을 쓰자 하후량의 거구가 가벼운 솜 인형처럼 날아 돌 더미에 부딪쳤다.
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쌓여 있던 돌 무더기가 와르르 쏟아지며 그를 덮어 버렸다.
그대로 생매장된 듯 하후량의 몸은 보이지도 않았다.
“대형!”
소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춤 다가서며 낮고 날카롭게 외쳤다.
같은 죄수들끼리라고 해도 살인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싸움 끝에 상대를 죽였다면 그 자는 곧 감호대의 손에 넘겨져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탈출을 시도한 자와 똑같이 취급되었던 것이다.
탁발규가 여태까지 하후량을 살려두고 있는 이유도 거기 있었다.
물론 재미있는 노리개 하나를 잃고 싶지 않기도 했겠지만 똑같이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후량이 탁발규와 싸움을 시작한 건 일 년 전이었다.
그가 살인죄를 저지르고 적철산으로 끌려온 직후인 셈이다.
탁발규는 같은 죄수이면서 죄수들 위에 군림하는 자였다. 하후량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죄수들이 경단 두어 개가 떠 있는 멀건 옥수수 죽을 정신없이 퍼먹고 있을 때 탁발규는 독려조(督勵組)의 식탁 가운데 앉아서 그들과 함께 보리와 콩이 반씩 섞인 밥을 먹었다.
그의 팔에 둘려져 있는 붉은 완장도 눈에 거슬렸다.
발목에 족쇄도 차지 않은 채 짚신을 신고 거들먹거리는 것도 꼴사나운데, 부하들을 거느리고 종 부리듯이 눈짓으로 죄수들을 부려대는 그의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죽 그릇을 들고 다가간 하후량이 그것을 탁발규의 얼굴에 던지고 식탁을 뒤집어엎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갑자기 얼어붙어 버린 듯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같은 죄수이면서 독려조라는 이름으로 죄수들 위에 군림하던 자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탁발규의 눈치를 보는 일이었다.
탁발규는 얼굴에 흘러내리는 멀건 죽을 혀로 핥고 있었다.
“이런, 쳐죽일 놈이!”
장소사가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는 일어섰을 때보다 더 빨리 나뒹굴어야 했다. 하후량의 주먹이 얼굴 복판을 부수어 놓았던 것이다.
“똑같이 처먹고 똑같이 일해라. 그게 싫으면 당당하게 사면을 받아서 적철산을 떠나라. 개가 달을 보고 짖는다고 늑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탁발규의 얼굴에 대고 던지듯 일갈(一喝)한 하후량이 족쇄의 쇠사슬을 쩔그렁거리며 태연하게 작업장으로 향했다. 그의 등에 수백 쌍의 눈들이 화살이 되어 꽂혔다.
“한 그릇 가져와 봐라.”
그게 그 자리에서 탁발규가 보여 준 반응의 전부였다.
독려조의 부하 한 놈이 쪼르르 달려가 죽 한 그릇을 떠오자 탁발규는 그것을 맛있게 퍼먹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저러나 하는 두려움으로 떨며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탁발규는 그릇 바닥에 남아 있는 찌꺼기까지 혀로 싹싹 핥았다.
그리고 나서는 부하가 내미는 수건에 얼굴과 손을 닦고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래? 그 놈이 그런 짓을 했단 말이지?”
그날, 천가평은 당직 군관의 보고를 들으며 제 귀를 의심해야 했다.
죄수들 중에서 감히 탁발규에게 죽 그릇을 던진 자가 있다는 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탁발규의 흉악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천가평은 호위 무사들을 거느리고 군막을 나와 작업장으로 올라갔다.
혹시라도 그 무지한 놈이 식당에서의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난동을 부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컸던 것이다.
그러나 작업장의 분위기는 그런 우려를 싹 가시게 했다.
독려조들이 한 놈도 보이지 않았지만 죄수들은 오히려 그들이 눈을 부릅뜨고 닦달할 때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일로 더 큰 긴장과 위험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였다.
작업장을 둘러보며 천가평은 그 긴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태풍이 닥치기 전의 고요함에 다름 아니었다.
감군(監軍)이 감독할 때보다 죄수들 중에서 쓸 만 한 놈을 가려 뽑은 독려조가 다그치는 것이 훨씬 무자비했고 효과적이었다.
같은 죄수이면서도 팔에 완장을 두르고 족쇄를 벗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저희들의 우월함을 한껏 누리려고 했다.
저를 선택해 준 천가평과 감호대에게 감사하며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아첨했고,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동료였던 죄수들을 오늘은 사정없이 닦달했다.
그것이 적철산의 절대 권위자인 천가평에게 충성심을 보여 주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그 달의 생산량이 두 배 가까이나 올랐던 것이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도지휘사사에서 산동순무가 보낸 사절이 달려왔고, 낭장 천가평의 위상은 그만큼 높아졌다.
천가평은 그 후로 적철산에서의 잡역에 대한 감독은 전적으로 독려조에게 일임했다. 그만큼 그들에게 혜택을 준 것도 물론이다.
조장인 탁발규가 죄수들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것도 모르는 척 눈 감아 주었다.
그가 자체의 징벌을 핑계삼아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가끔 있었지만 그것 역시 모르는 척했다.
그 자리에서 살인을 하는 것만 아니라면 그냥 둬도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맞은 놈이 사나흘 앓다가 죽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덮어두는 건 죄수의 충원이야 언제든 도지휘사사에 요청만 하면 득달같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세상에 넘쳐나는 게 죄수들 아니던가.
천가평의 그런 조치는 오직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였다.
탁발규에게 노역의 관리를 맡겨둔 이후 제가 직접 관리 감독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생산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천가평의 그와 같은 지지에 힘입어 탁발규는 적철산의 죄수들에게 제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그 탁발규가 모든 죄수들이 보는 앞에서 하후량이라는 자에게 모욕을 당했다.
이건 무사히 지나갈 수가 없는 일이었다.
천가평은 내심 혀를 차며 작업장을 떠났다.
제법 뼈대가 있어 보이던 놈이었는데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나흘쯤 뒤에 온몸에 타박상을 입고 죽은 시체 한 구를 치울 일이 생길 게 분명했다.
거적에 둘둘 말아서 아무 데나 묻어 버리면 그만일 테지만, 그것이 하후량이라는 데에는 좀 아까운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