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낯선 곳, 낯선 사람
아름드리 적송 둥치에 기대고 서서 그들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는 하후량의 마음속에 딱히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의문이 안개처럼 쌓여갔다.
행색의 은밀함과 눈빛의 예리함으로 미루어 보아 저 자들은 고수들이 분명했다.
그러자 대체 흑의 사내의 속셈이 무엇인지 의아해졌다.
저런 고수들을 수하로 부리고 있으면서도 또 무엇 때문에 자기 같은 자가 필요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후량은 제가 너무 성급하게 사내의 말에 동의해 버린 게 아닌가 하고 후회했다.
수하로 보이는 자들이 서슴없이 살인을 하는 자들임을 알았고, 그들을 부리는 사내의 태도가 오만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유로운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게 하후량의 마음을 약해지게 했다.
다시 적철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후량은 이왕 이렇게 된 것 조금 더 지켜보고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내가 손을 흔들자 세 명의 수하들이 신속하게 숲 속으로 사라졌다.
품에 서류를 쑤셔 넣은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하후량을 돌아보았다.
하후량이 등으로 적송 둥치를 밀고 사내를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다가오는 하후량을 잠시 바라보던 사내가 무심하게 등을 돌렸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 밑에 이르자 낡은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와 하후량이 마차에 오르자 마부석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던 늙은 마부가 말고삐를 흔들었다.
한참을 흔들리며 갔지만 비좁은 마차 안에 마주앉아 있는 사내와 하후량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무시하고 있는 듯했다.
하후량은 사내가, 사내는 하후량이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두터운 휘장이 내려진 마차 안은 어두웠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떠들썩한 사람들의 말소리와 마차 지나가는 소리들로 한동안 바깥이 소란스럽더니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한가롭게 따각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청석(靑石)이 깔린 한적한 길 위를 지나가고 있는 듯했다.
무거운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났고 마차가 멎었다.
사내를 따라 휘장을 들추고 내린 하후량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새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밝은 햇빛이 갑작스럽게 눈을 찔러 왔던 것이다.
잘 손질된 정원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연못 가운데에 석가산(石假山)이 있었고, 그것을 마주보는 곳에 날아갈 듯 앉아 있는 정자가 운치 있어 보였다.
그 너머로 전각들이 높은 지붕을 맞대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대 장원인 것이다.
시비가 하후량을 안내해 간 곳은 조용한 방이었다.
깨끗하게 손질된 고풍스런 집기들이 주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차를 따라준 시비가 문을 닫고 나가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하후량은 실로 오랜만에 차를 마셨다.
조금은 떫으면서 입안을 은은하게 가라앉혀 주는 향기가 좋았다.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사내는 마차에서 내리자 시비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만을 던지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이 방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은 누가 굳이 말해주지 않았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두어 식경이 될지 아니면 며칠이 될지 모르지만 기다리는 일이라면 이미 지겹도록 몸에 익은 하후량이었다.
마음을 느긋하게 가진 그가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두터운 휘장이 쳐 있는 대청 가득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천장과 잇닿아 있는 환기창을 통해 흘러 들어오고 있는 햇빛 몇 줄기가 억눌린 어둠을 가르며 선명한 빛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빛줄기 너머의 탁자 앞에 다섯 명의 사나이들이 앉아 있었는데 가슴 위를 덮고 있는 어둠 때문에 용모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하나 같이 짙은 재색의 장포(長袍)로 발등까지 가리고 있어서 그들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게 했다.
그들로부터 두어 장 떨어진 대청 위에 흑의 사나이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어떻소?”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나서 누군가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허공중에 여운이 남아 웅웅거리며 떠돌았다.
“최고요.”
사내의 대답도 그에 못지않게 건조했고 짧았다. 다른 음성이 뒤따랐다.
“다른 자들보다?”
“최고요.”
“그대는 그들을 데려왔을 때도 매번 그렇게 말했잖소?”
그 말에 사내가 약간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당신들은 그들에게 실망하고 있소?”
다시 침묵이 흘렀다.
사내는 굳이 얼굴에 떠올라 있는 불쾌해하는 빛을 감추려 하지 않고 묵묵히 서있었다.
한참만에야 관록이 넘쳐나는 목소리가 그 단단한 침묵을 깼다.
그가 사내를 억누르듯 말했다.
“아직 모르는 일일세. 그렇지 않나?”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이번에는 어둠 속에 들어 있는 자들에게 말했다. 사내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노부는 장 사부를 믿소. 그의 선택은 언제나 최선이었소.”
동의한다는 듯 다른 네 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한 듯, 노부라고 스스로를 칭한 자가 다시 사내에게 말했다.
“물론 믿을 수 있는 자이겠지?”
사내의 안색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는 하북 온산 태생이오. 고향에서 소작농을 하고 있다가 심하게 착취하는 지주를 때려준 후 몸을 피해 산동의 우양으로 와서 그곳의 건달 두목 노릇을 하며 숨어 있었소.”
사내가 잠시 숨을 돌리며 눈앞의 다섯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흥미가 있는지 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사내가 마른침을 삼키고 나서 여전히 건조한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부하 중에 장필이라는 놈이 있었소. 그 놈에게 열여섯 살 난 누이가 있었는데 토호인 이가장(李家莊)의 장주 이가량이 장정들을 동원해 그녀를 강탈해 갔소. 말리는 와중에 장필과 그의 노모는 심하게 구타당했고, 결국 며칠 지나지 못해 노모가 죽었소. 장필의 억울한 사정을 들은 그는 그날 밤 이가장의 대문을 두드렸소. 하지만 장주 이가량이 대가라며 내놓은 것은 겨우 은자 스무 냥이었을 뿐이요.”
“인색한 놈이었군.”
누군가가 혀를 찼다.
“항의하는 그에게 돌아온 것은 장정들의 욕과 몽둥이질이었소. 그는 지현에게 찾아가 장필 대신 억울함을 탄원했으나 어떻게 그가 수배자라는 것을 알았던지 오히려 현성의 나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소. 옥을 깨뜨리고 그를 구해준 것은 그를 따르던 우양현의 건달들이었소.”
“쯧쯧, 이제는 하찮은 건달들도 국법 알기를 우습게 아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군가가 다시 혀를 차며 중얼거렸으나 사내는 그것을 무시하고 제 할 말을 계속했다.
“그날 밤 그는 단신으로 이가장의 담을 넘어 들어갔고, 장주 이가량과 그의 두 아들, 앞잡이 노릇을 하던 집사와 전날 그에게 모욕을 주었던 장정 한 놈을 살해했소. 장필을 그의 누이와 함께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한 그는 제 발로 지현을 찾아가 자수했고, 다섯 명이나 살해한 죄로 적철산으로 보내졌던 것이요.”
어둠 속의 인물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첫 마디는 감탄성이었다.
“지독한 놈이로군.”
“협기가 있는 자야.”
“일 처리 또한 신속하고 깨끗했으니 과단성이 있는 자라는 걸 알 수 있지.”
“비록 건달이지만 부하를 아끼는 의리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놈이 바로 그런 놈이야.”
말을 마친 사내는 가만히 그들의 평을 듣고 있었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들 다섯 명의 장포인들이 이마를 맞대고 낮은 소리로 상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선택에 따라서 하후량의 목숨이 결정되는 자리였다.
부적합 자라고 결정이 난다면 제가 손수 그를 처치해 버려야 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한 가닥 긴장이 싹텄다.
그러나 사내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하기만 했다.
한참을 수군거리던 장포인들이 다시 위엄을 갖추고 앉아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우리는…….”
한참만에야 다시 관록이 붙어 있는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 사부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소.”
사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갔다.
“그러나…… 되도록 빠른 결과를 보고 싶소.”
***
사내와 하후량은 벌써 닷새 째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사내는 처음부터 말해 주지 않았고, 하후량은 묻지 않았다.
어차피 약속이라는 말 한 마디로 그에게 메어 있는 하후량이었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엿새 째 되는 날은 많은 비가 내렸다.
그들은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길도 없는 험한 산 속을 헤매고 있었다.
지난 새벽에 제남부를 지나 남쪽으로 일백 여 리쯤 내려왔으니 태산의 줄기가 틀림없었다.
세 개의 산등성이를 넘고 두 개의 계곡을 건넜다.
새벽부터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는 비가 계곡의 물을 무섭게 내몰고 있었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종일을 비속에 잠겨 있던 몸이 갈수록 체온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내의 걸음걸이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후량이 따라오는지 마는지 관심도 없는 듯 한 번 뒤를 돌아보는 법도 없었다.
하후량은 기를 쓰며 그런 사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여기서 주저앉는다면 시작도 해보기 전에 낙오하고 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사내의 마지막 시험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하후량은 그러한 것보다도 사내에게 질 수 없다는 스스로의 오기를 끝까지 잃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가 사내와 겨룰 수 있는 것은 바로 오기 하나뿐인 것이다.
하후량은 온몸에 떠도는 열과는 달리 사정없이 떨리는 한기에 이빨을 딱딱 부딪쳐가며 한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떼어놓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 척척 감겨드는 옷자락이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바위에 걸터앉아 기다리던 사내가 기다시피 허우적대며 다가온 하후량에게 댓잎에 싼 주먹밥 한 덩어리를 내밀었다.
“먹어라.”
바위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하후량은 사내가 건네준 주먹밥을 아귀처럼 먹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살아야 한다는 일념만이 가득 차 있을 뿐 이제는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빗줄기가 턱을 타고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주먹밥은 반도 먹지 못해 벌써 빗물에 녹아 풀어져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내렸다.
하후량은 그것까지도 남김없이 핥아먹었다.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쏟아져 내리는 빗물을 받아 마시고 있을 때, 제 몫을 다 먹어치운 사내가 다시 일어섰다.
“갈 수 있겠나?”
힐끗 하후량을 바라본 사내가 건조한 음성으로 물어 왔다.
그를 바라보는 하후량의 눈이 달아오른 열로 충혈되어 있었다.
“죽기밖에 더하겠소?”
“좋아, 그럼 가자.”
죽립을 고쳐 쓴 사내가 다시 구름을 밟듯 가벼운 걸음걸이로 빗줄기를 헤치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숨을 쉰 하후량은 천근의 무거운 몸을 움직여 그 뒤를 따랐다.
재색의 땅거미가 숲을 뒤덮어 올 무렵이 되어서야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발밑을 적셔오던 안개가 점점 짙어지더니 온 숲을 뒤덮었다.
두 개의 능선을 더 넘고 난 뒤였다.
이제는 방향을 짐작할 수도 없었다.
보이는 건 뿌연 안개 속에 첩첩이 가려져 있는 울창한 나무 둥치들이었고, 들리는 건 멀리 발아래를 쏟아져 내려가고 있는 계곡물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새 한 마리 울지 않았고, 바람 한 줄기 불어오지 않았다.
어둠이 재빠르게 숲을 가려 버렸다.
앞선 사내의 모습이 안개보다 짙은 어둠의 장막 속으로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후량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턱에 치받쳐 오르는 숨이 금방이라도 객혈이 되어 넘어올 것 같았고, 가슴이 터질 듯 부풀었다.
한 번 멈추어 선 사이에 사내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남김없이 묻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