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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계
작가 : 송진용
작품등록일 : 2016.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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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화
작성일 : 16-07-13     조회 : 591     추천 : 0     분량 : 6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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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장 흑석보(黑石保)의 참화

 

 

 

 씨잉-!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터져나왔다.

 나태랑의 눈에서 불길이 인다 싶더니 으헝! 하는 포효와 함께 그의 거대한 칼이 바람을 찢으며 횡으로 쓸어간 것이다.

 한 줄기 태풍이 숲을 가르고 지나간 듯했다.

 선두에서 다가서던 자들의 허리를 동강내며 지나간 칼이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돛대를 찍었다.

 우지끈 하는 굉음과 함께 후미의 돛대가 꺾여 넘어지자 쾌선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선실을 박살내며 떨어져 내린 돛대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날뛰는 자들이 놀란 메뚜기 떼 같았다.

 나태랑의 거구가 그들 속으로 성큼 뛰어들었다.

 두 손으로 칼자루를 굳게 잡은 채 무지막지하게 휘둘러 오는 그 힘 앞에서 온전히 보존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뱃전이 찍히면 그것이 쩍쩍 갈라져 나갔고, 스산한 칼빛이 선실의 귀퉁이를 스치고 지나가자 지붕의 한쪽이 뭉텅 베어져 떨어졌다.

 여섯 자의 대도(大刀)가 번쩍이는 곳에 서 있던 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씩씩거리는 나태랑의 숨결을 들은 자들은 둘씩 셋씩 한꺼번에 동강나 황하의 탁류 위로 떨어져 내릴 뿐, 누구도 그의 한 칼질을 제대로 받아내는 자가 없었다.

 아니, 그럴 엄두를 낼 수조차 없었다.

 엄준청은 그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며 제가 지금 악몽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넋이 반쯤은 빠져버린 그의 눈에 장대 같은 칼을 풍차처럼 휘두르고 있는 나태랑의 무표정한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

 

 하봉현(河逢縣)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하남성(河南省)의 장항현(長恒縣)과 마주보고 있는 산동성 서쪽 끝 평야지대의 성읍이다.

 하봉현 왼쪽에 평야 한 가운데에 기둥을 박아 놓은 듯 우뚝 서 있는 산이 있었는데, 높지는 않았지만 평야를 밟고 솟아있는 것이어서 멀리에서도 송곳 같이 날카로운 두 개의 정상이 잘 보였다.

 마치 양의 뿔을 박아놓은 것 같다고 해서 사람들이 양각산(羊角山)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산의 원래 이름은 적탕산(積蕩山)이었다.

 매년 장마철이면 급하게 떨어지는 산비탈을 타고 급류가 흘러내려 산 아래의 논밭을 쓸어가 버리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만큼 산은 경사가 심한데다가 골이 깊고 아득했다.

 오른 쪽의 봉우리를 우양봉이라 했고, 왼쪽의 봉우리는 좌양봉이라고 했는데, 현의 망루에서 보면 그 두 개의 봉우리 사이로 떨어지는 낙조가 일품이었다.

 우양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비탈에는 아름드리 떡갈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서 한낮에도 땅거미가 깔린 듯 스산하고 음침했다.

 이마를 벗겨지게 한다는 오월의 태양도 키 큰 떡갈나무의 촘촘한 이파리들은 뚫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 우양봉의 능선을 타고 한 여인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깊고 음습한 숲의 적막도 여인에게 무서움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듯했다.

 가끔 호랑이며 표범이 나오기도 한다는 골짜기였고 능선이었지만 여인의 걸음은 경쾌하기만 했다.

 그녀는 벌써 산 중턱까지 올라와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두건으로 질끈 동여맸고, 흑의 경장을 입은 모습이 날렵해 보였다.

 등에 한 자루 보검을 메고 있는 그녀가 두 손을 쉴 새 없이 저어 얼굴을 가리고 가슴을 붙드는 덩굴과 잔가지들을 헤치며 숲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모습이 마치 날씬한 한 마리 사슴인 듯 아름다웠다.

 숲을 벗어나자 그새 저 멀리로 기울어가고 있는 태양이 갑자기 눈을 찔러왔다.

 잠시 눈을 찡그리던 그녀가 손등으로 이마의 땀방울을 훔쳐냈다.

 두 손바닥을 활짝 펴 와락와락 부채질을 해대는 볼이 발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잠시 발아래 아득히 펼쳐져 있는 푸른 벌판을 바라보던 그녀가 낮게 한숨을 쉬었을 때였다.

 시원하게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을 타고 꿈결처럼 몽롱하게 들려오는 낮고 청아한 가락이 있었다.

 피리소리였다.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녀가 쳇, 하고 혀를 찼다.

 “쓸모없는 인간 같으니…….”

 그 소리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반응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손부채질을 해대던 그녀가 발끝으로 가볍게 땅을 찍었다.

 비로소 내력을 북돋운 듯 그녀의 몸이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십여 장을 날아 정상을 바라보고 멀어져 갔다.

 

 그는 발아래의 벌판을 등지고 좌양봉을 바라본 채 바위 위에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불어가는 바람이 그의 유생건과 옷자락을 흔들어댔다.

 기울어 가는 석양을 마주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관옥을 깎아 놓은 조상(彫像)인 듯 아름다웠다.

 여인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멀리 황하의 물굽이가 석양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이는 것이 사내의 아름다운 모습과 잘 어울려 더욱 은은하고 깊은 정취를 느끼게 해주었다.

 사내가 가볍게 입에 물고 있는 것은 설(舌)이라고 쓰지만 실제로는 ‘서’라고 부르는 취구(吹具)였다.

 해죽(海竹)의 껍질을 깎아 얇게 다듬어 관대에 꽂고 부는 것으로서 향적(鄕笛)에 쓰이는 음구(音具)인 것이다.

 사내가 두 손으로 가볍게 쥐고 있는 피리는 검은 오죽(烏竹)으로 만든 것이었다.

 얼마나 오래 된 것인지 손때가 묻어 마치 기름칠을 해놓은 듯 반짝이는 그것은 모르는 자가 보더라도 한눈에 귀물(貴物)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치 단아하고 정갈한 품격을 가지고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사내는 스스로의 음률에 흠뻑 취해 있는 듯했다.

 그의 매끄러운 손가락이 일곱 개의 구멍을 때로는 느리고 부드럽게, 또 때로는 빠르고 격하게 막고 뗄 때마다 학이 울 듯 낮고 굵으면서도 청아한 음색이 마술처럼 풀려나오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산색과, 먼 강물의 반짝임과, 아득한 구름 속으로 번져가고 있는 노을빛과 어우러지면서 그 소리는 마치 애절한 한 편의 시를 읊조리는 듯 구구절절이 심금을 울려놓았다.

 산새들도 그 소리에 취했는지 숨을 죽이고 있었고, 바람마저 사내의 피리 아래에서는 머리를 숙인 채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불어갔다.

 그것을 듣고 있는 여인의 눈 속에 깊은 수심과 회한이 떠올랐다.

 그것을 음미할 새도 없이 어느새 격하고 강하게 바뀌는 음률을 따라서 다시 맹렬한 불길이 타올랐다.

 그러다가는 다시 간장을 울리며 애절히 휘돈다.

 그 소리에 어느덧 여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반짝였다.

 그녀는 사내의 피리소리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가 불고 있는 향적은 중원에는 없는 것이었다. 당피리처럼 여덟 개의 구멍이 있지만 둘째 구멍이 뒤쪽에 있다는 것이 당피리와는 또 달랐다.

 멀리 요동을 지나 장백산 너머에 있다는 조선(朝鮮)의 피리였다.

 사내는 그것이 조선보다 훨씬 더 먼 옛날인 고구려 때의 악기라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수와 당을 상대로 싸웠다는 동방의 강국 고구려에 대해서 여인은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저를 그 고구려의 왕족이라고 말하던 사내의 음울한 눈빛을 보았을 때 여인은 그 말을 굳게 믿어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사내는 정말 고종(高宗)에 의해 나라가 무너졌을 때 장안(長安)으로 끌려왔던 왕족들 중 누군가의 혈통을 이어받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라 잃은 유민으로 떠돌다가 어느덧 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중원의 토양과 풍토에 깊이 물들어 이제는 중원인이 되어 있는 그였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천 년 동안이나 핏줄 속에 녹아들어 전해져 오고 있는 그들의 한과 슬픔이 아직도 우울한 정서로 배어 있었다.

 “개원, 이제 그쯤 해둬.”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고 난 그녀가 아랫배에 힘을 모으고 뾰족하게 소리쳤다.

 비로소 사내가 피리를 내리고 천천히 여인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가에 가득 묻어 있는 우울한 어둠을 보며 여인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당신의 그 궁상은 정말 지겨워.”

 그의 이름은 고유정(高琉情)이다.

 자를 개원(開原)이라고 했으므로 그녀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녀를 보는 고유정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반가움보다 더 짙은 빛깔의 웃음이면서 그 속에 숨길 수 없는 한 가닥의 우수(憂愁)를 지닌 것이기도 했다.

 “왔군.”

 “여기서 해를 넘길 거야? 어두워지면 산을 내려가기도 힘들 텐데.”

 여인이 이마로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카락을 쓸며 눈을 흘겼다.

 부드럽고 은은한 정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멍하니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고유정이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실, 그대는, 그대는…….”

 호기심 띤 눈으로 고유정의 입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고유정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끝내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돌아섰던 것이다.

 그의 남빛 유삼 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바라보며 여인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우양봉과 좌양봉 사이의 넓고 깊은 계곡은 멀리 황하를 마주보고 곧장 열려 있었다.

 그 계곡 속에 흑석보의 황토빛 지붕들이 석양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고유정과 임연실(林淵實)은 삼십 여장이나 솟구쳐 있는 절벽 위에 어깨를 기대고 나란히 서서 발아래 펼쳐져 있는 흑석보의 지붕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작해야지?”

 임연실이 유정을 돌아보았다.

 고유정의 눈가에 한 줄기 서글픔이 맴돌았다.

 연실이 내심 혀를 찼다.

 죽을 자들에 대한 가여움과 연민으로 이 사내는 미리 슬퍼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임연실이 가볍게 몸을 던졌다.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까마득한 절벽 아래의 그늘 속으로 멀어져갔다.

 던져진 돌처럼 떨어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고유정이 탄식을 뱉어내고 뒤를 따라 몸을 던졌다.

 

 “이건 도대체……”

 흑석보의 수석총관(首席總管)인 삼절검(三絶劍) 우문한(于文漢)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뚫어질 듯 이화정(梨花亭) 앞의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릇하게 빛나던 잔디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잘 다듬어져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화원은 여기 저기 쌓여 있는 주검들로 인해 보기 흉하게 변해 있었다.

 오룡전(五龍殿)과 흑수당(黑水堂) 소속의 무사들이 흘린 피였고, 그들의 주검이었다.

 보 내에 급박한 경종이 울린 지 한 식경도 채 되지 못해서였다.

 수백의 적들도 아닌 단 두 명의 침입자에 의해서 이 지옥도가 연출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한 명은 아리땁고 나긋나긋한 여자였고, 한 명은 평생 글방에서 책이나 붙들고 있는 것이 어울려 보이는 문약한 서생 같지 않던가.

 그런데 그들 두 명에게 산동의 유력한 방파인 흑석보가 이처럼 무참히 짓밟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생각으로 눈만 끔벅이며 바라보고 있는 우문한은 지금의 상황을 도대체 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급보를 받고 요화거(遙花居)를 뛰쳐나온 흑석보주 염화신장 주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넋을 잃은 채 고유정과 임연실을 바라보고 있을 뿐, 아직도 상실한 현실감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주태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정자 아래 처참하게 죽어 있는 두 구의 시체를 가리켰다.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썹, 붉은 수염을 지닌 채 핏발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은 분명 흑수당의 당주인 혈면효(血面梟) 공자승이었다.

 그는 귀동조(鬼童爪)라는 특이한 조법(爪法) 하나로 한때 산동 무림을 공포에 잠기게 했던 자였다.

 그런 그가 가슴을 뚫은 작은 구멍 하나 때문에 저처럼 죽어 있다는 게 어이없었다.

 또 하나, 세 가닥 흰 수염이 피에 젖은 채 허리에는 어망을 걸고 있고, 길이가 일 장에 달하는 작살 한 개를 아직도 손에 쥐고 있는 중늙은이의 시체는 오룡전의 전주인 노조룡(老釣龍) 엄한이 분명했다.

 그의 목은 반쯤 잘려져 아직도 더운피를 뭉클뭉클 쏟아내고 있었다.

 공자승의 주검에 비해 엄한의 주검은 처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엄한의 목은 검을 들고 있는 여자에 의해 저렇게 된 게 분명했다.

 아무리 보아도 맨손인 선비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승의 가슴에 콩알만 한 구멍을 뚫어 놓은 것이 선비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줄기의 순수한 지력(指力)에 의한 것이 분명했다.

 ‘대체 어떠한 지력이었기에 공자승의 귀동조를 깨뜨리고 단번에 가슴을 관통해 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주태는 그것이 궁금했다.

 공자승의 몸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그는 변변히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일지에 당하고 만 것이 분명했다.

 산동 무림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것을 오히려 억울해 하던 그들 두 명의 고수들이 문약한 유생과 아리따운 여인에 의해 거의 동시에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는 것이 주태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한동안 공자승과 엄한의 주검을 가리키며 어깨를 떨고 있기만 할 뿐 입을 떼지 못하던 주태가 버럭 억눌렸던 고함을 터뜨렸다.

 “이, 이, 쳐죽일 놈들!”

 그의 별호가 염화신장인 것만 보아도 성정이 얼마나 포악하고 급한 것인지는 충분히 알만했다.

 제 분에 못 이겨 수염과 머리카락이 올올히 곤두선 채 핏발선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고 있는 그의 모습이 험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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