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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
작가 : 유호
작품등록일 : 2016.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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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화
작성일 : 16-07-11     조회 : 727     추천 : 1     분량 : 7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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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이 새끼야! 너 말 함부로 할래? 뭐 이런 새끼가 있어!”

 “과장님, 참으십쇼! 차 경장! 사과드려, 어서!”

 옆자리에 앉은 조장이 다급하게 박춘배를 만류했지만 이미 통제 불능이었다.

 술만 취하면 개가 되는 것으로 악명 높은 작자여서 보통은 자리를 뜨는 것으로 끝냈는데 오늘은 피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차피 해경 생활은 물 건너간 셈, 사표를 던지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말똥을 세 개나 어깨에 매단 박춘배의 계급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는 곧장 일어서서 박춘배의 코앞에다 얼굴을 들이댔다.

 “너나 백년만년 해 쳐드세요. 사표 내줄게.”

 “뭐? 이 개새끼가!”

 순간적으로 꼭지가 돌아버린 박춘배가 조장의 손을 뿌리치면서 들고 있던 소주병을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병의 궤적을 가로막았지만 팔꿈치에 부딪힌 병은 퍽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으로 터져 나갔다.

 한 발 물러선 그는 옷에 튄 술을 툭툭 털어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유리한 고지에 올라선 셈, 식당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박춘배는 조장의 손에 잡힌 채 여전히 그를 향해 팔을 휘젓고 있었다. 그는 몇 초 박춘배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번개같이 따귀를 올려붙였다.

 손바닥이 뺨에 감기는 철걱 소리와 함께 잠깐 어수선해졌던 식당이 다시 조용해졌다.

 정신이 번쩍 났을 박춘배는 물론이고 팀원들까지 한꺼번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상황, 그는 주섬주섬 전화기를 꺼내 바닥에 흩어진 소주병 조각의 사진을 찍었다.

 “하극상으로 징계위원회 회부해라. 난 네가 먼저 흉기 휘둘렀다고 보고할 테니까. 됐지? 빌어먹을 개새끼야.”

 “뭐…… 뭐?”

 박춘배는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말리려고 둘러선 직원 전부가 증인인 상황, 아마 망신스러워서라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는 뒤늦게 뛰어 들어온 이충석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미련 없이 식당을 나섰다.

 

 되는대로 담배를 빼 물고 먹자골목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바람을 쐬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었던 것, 그런데 골목 끝에서부터 갑자기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한 달 남짓 줄기차게 뒤통수를 따라다니던 음울한 시선이 다시 느껴졌다. 그리고 기분은 점점 더 지저분해지고 있었다.

 ‘또 뭐냐? 미치겠네.’

 한참을 더 걸어 인적이 드물어졌다 싶은 순간, 가로등 아래서 손을 흔드는 시커먼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몇 발 다가서자 사내가 끌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더러운 성질머리만 고치면 꽤 쓸 만할 거 같은데 말이야. 어때, 한번 고쳐보겠나?”

 차승호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사내의 얼굴을 빤히 건너다보았다.

 언젠가 본 얼굴, 잠시 기억을 더듬어 대뇌 한쪽 구석에 처박힌 기분 나쁜 얼굴을 찾아냈다.

 이름이 김영범인가 그랬던 것 같았다.

 몇 년 전 해외 파견 근무를 마치고 귀환한 직후, 해상강하 특임대 정예만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쏟아냈던 자칭 헤드헌터였다.

 아마 기무사나 국정원 같은 정부기관에 고용된 작자일 터, 그에게도 잠시 말을 건넸지만 무시했던 기억이 있었다.

 김영범이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차승호, 31세, 예비역 중위, 전직 CCT 해상침투교관, 전직 해경 지능수사계 현장 요원, 취미는 산악바이크, 뭐 이만하면 꽤 괜찮은 프로필인데…… 왜 현직이 해상구조대야? 그리고 그 경장 계급장은 또 뭐야? 내 샤프한 머리로도 이해가 잘 안 돼서 그러는데 설명 좀 해보겠나?”

 다시 몇 걸음 다가선 그가 걸음을 멈추고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었군.”

 “실망했나?”

 “간단하게 갑시다. 원하는 게 뭐요?”

 “내 용무? 뭐랄까…… 외롭고 고단한 중생에게 새 직장을 소개할까 싶어서 이렇게 현신했지.”

 “직업은 있는데?”

 “찌질한 부패 경찰 나부랭이에게 같잖은 잔소리 듣는 직장 말인가? 그게 직장이야?”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요?”

 “간단해. 경력은 이미 다 말아드셨는데 쓰레기장에서 헤매지 말고 새 마음 새 뜻으로 새 출발해서 큰물에서 놀라는 거야.”

 “당신이 시키는 짓을 하면 큰물에서 노는 건가?”

 “어이, 어이, 짓이라는 단어는 좀 심해. 재능을 길바닥에다 낭비하지 말고 국가의 안녕과 미래를 위해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일을 하라는 것뿐이야.”

 “헛소리 치우쇼.”

 “본인이 조직 사회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진작에 확인된 거 아닌가? 솔직히 최근에 자네 주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필연적으로 벌어질 일이었어. 시간이 문제였지. 모르긴 몰라도 자네 성격에 3년이면 제법 오래 버틴 거야.”

 차승호는 다시 미간을 좁혔다. 김영범의 재수 없는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떠올렸던 불길한 예감들이 슬금슬금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들 당신이 시켜서 일부러 들이댄 건가?”

 그의 목소리가 사나워지자 김영범이 실실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아, 그건 아니야. 그건 전적으로 자네 잘못이고 우린 그냥 기회를 잡았을 뿐이지. 그리고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세상사 다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하하, 자네 원래부터 자유로운 영혼이잖아. 생각해봐. 지휘부 들이받고 전역, 사회로 돌아와서도 적응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혈혈단신 독고다이로 현장에서 뛰는 걸 선호했잖아. 그리고 거 뭐냐, 오늘 손댄 아이들이 말이야, 그것들이 또 고소라도 하면 이번엔 정말 빵으로 직행하는 거 아닌가? 안된 이야기지만 그거 진짜 감방행 보증수표 같던데…… 어둡고 축축한 빵에 들어앉는 것보다는 이참에 싹 정리하고 새로 시작하는 게 낫지 않겠나?”

 김영범의 입가에는 흐릿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말을 삼킨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솔직히 빵에 가기 직전까지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편이 일을 풀어가기는 훨씬 쉬운데…… 그렇게 하면 사후 처리가 좀 귀찮아져서 말이야. 시간도 별로 없는 편이고. 어때? 평생 뒷골목에서 주먹질이나 하고 사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바람직하잖아? 누나도 좋아할 거고 말이야.”

 시종일관 기분 나쁜 단어들의 연속, 더구나 누나 차인숙은 그가 평생을 두고 갚아야 할 무거운 부채였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어렸을 때부터 여섯 살 위인 차인숙이 그를 키우다시피 했고, 때문에 그녀는 대학까지 포기해야 했다.

 공부 잘하는 누나 대신 공부에 취미 없는 그가 대학에 간 꼴, 지금은 부천에서 작은 분식집을 운영하는데 사별한 매형이 남긴 빚 때문에 형편은 늘 좋지 않았다.

 그런 누나에게 또 골칫거리를 안겨주는 불상사는 무슨 짓을 해서든 피해야 했다.

 “소속부터 확실히 합시다.”

 담배연기를 뿜어내는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자 김영범의 미소가 짙어졌다.

 “소속이라…… 이렇게 이야기하지. 해경보다는 끗발이 한참 높은 프리랜서 조직이야. 기본적으로 독립 부서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완전히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국가에서 일부 예산을 지원받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극히 일부일 뿐이야. 그래도 자네 폭력 전과나 사회봉사 명령 정도는 얼마든지 없애줄 수 있어.”

 “그걸 믿으라는 거요? 멋대로 형사소송 취하하고 전과 기록까지 지우는데 소속 기관이 없다?”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면 다친다네, 후후.”

 “말 안 되는 소리만 골고루 하는군. 하는 일은?”

 “우린 국가 안보를 위해 뛰는 사람들이야. 물론 공개적으로 수사하고 법으로 처벌하기 어려운 사안들을 주로 처리하지. 아주 가끔 정부기관이나 대기업의 의뢰를 받아들여 잠깐씩 알바도 뛰지만 그건 일부에 불과해.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직업이야.”

 “그건 그쪽 생각이고, 왜 내가 필요한 거요? 나 정도 인력은 특임대만 뒤져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텐데?”

 “그건 인정하지. 총질, 싸움질 잘하는 것들이야 흔해터졌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쓸 만한 인력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더군. 우리가 원하는 인력은 확고한 국가관과 정의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진, 즉시 현장 투입이 가능한 ‘필드 요원’이거든. 그리고 자네 기록을 보니까 영어 기본에 러시아어도 제법 한다더군. 대답이 됐나?”

 “언어가 필요한 거요?”

 “아니, 그건 그냥 기본일 뿐이야. 까놓고 이야기하면 자네에게 제법 쓸 만한 재능이 몇 가지 있어서야.”

 “무슨 소리요?”

 “기억력이 대단하다면서? 리쿠르트 팀에서는 거의 사진기에 육박한다더군. 특히 공간지각과 형상기억 쪽은 황당할 정도라고 입에 거품을 물던데? 그리고 그 공간 어쩌고 하는 능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위험을 감지하는 재주도 발군이라고 떠들더구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마쇼. 나도 모르는 걸 당신들이 어떻게 알아?”

 “오래 지켜봤으니까.”

 “뭐요?”

 “CCT 시절부터라고 하면 믿겠나?”

 그는 말꼬리를 잡으려다 말고 한 발 물러섰다.

 극비로 취급되는 CCT(공군 Combat Control Team)의 인사 파일을 뒤지는 건 기무사조차도 쉽지 않은 일, 상대는 최고 수준의 극비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

 그가 입을 다물자 김영범이 다시 말했다.

 “현장 경력도 맘에 들고 제법 쓸 만해 보이는 근접 전투력에 두둑한 배짱, 다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인데…… 특히 마음에 드는 건 따로 있었어. 그걸 뭐라고 해야 되나? 의협심? 애국심? 그것도 아니면 사명감? 후후. 뭐 어쨌든, 썩어빠진 것들에 대해서는 상대가 누구든 가차 없더군. 그게 최고의 요건이야.”

 “헛소리 집어치우쇼.”

 차승호는 능글맞게 웃는 김영범의 눈동자를 노려보면서 길게 심호흡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 나쁜 작자였다.

 그런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찌어찌 감방에 들어앉는 개망신을 면한다고 해도 당장 백수로 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이 불경기에 별까지 단 서른한 살 노인네가 괜찮은 직장을 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터, 이래서는 입에 풀칠하려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최악의 불상사가 생길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자 김영범이 빠르게 사설을 덧붙였다.

 “급여는 대기업 부장 수준에 불과하지만 실적에 따라 연말에 제법 큰 액수의 보너스가 지급될 거야. 일에 비해 보수가 넉넉하다고 할 수는 없는데…… 그래도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괜찮은 직장이 될 걸세. 사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네가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경찰 일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거지만 말이야. 그리고 참고로 그 박 뭐시기인가 하는 과장 놈 말인데, 그 쓰레기를 정리할 기회도 만들어줄 걸세, 어때? 후후.”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김영범은 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그의 셔츠 윗주머니에 꽂고 그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정직 중이지? 어차피 할 일도 없을 텐데 아침에 거기 있는 주소로 나와. 딱 두 달만 훈련 받고 시작하자고. 하하, 하하하!”

 치열을 모두 내보이며 한참을 웃은 김영범은 천천히 몇 발 물러서면서 가로등 빛 밖으로 사라졌다.

 그는 멀어지는 김영범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일단 어디가 됐든 정부기관의 비선 조직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김영범이 입 밖에 낸 용어들 상당수가 군사 용어였고 막 해외파병에서 돌아온 특임대 병력을 모아놓고 리쿠르트를 할 만큼 군에 대한 영향력도 강력했다.

 당연히 기무사나 국정원 같은 정보 조직에 연계되어 있다고 봐야 했다.

 김영범은 굳이 기관과 관련이 없다고 강변했지만 그걸 믿으라고 떠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이러면 못 먹어도 고가 되는 건가?’

 솔직히 김영범이 던져놓은 미끼는 모양새는 물론이고 타이밍까지 절묘했다.

 너무 절묘해서 찜찜한 구석까지 느껴지는 형편, 덥석 물었다가 후회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의 꼬일 대로 꼬인 상황을 타개하려면 다른 선택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할 거라면 감방에 들어앉는 개망신은 무조건 피하고 볼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재수대가리 없는 박춘배에게 선처를 애원하는 것보다는 그 인간을 때려잡는 편이 훨씬 더 재미있을 터, 선택은 하나였다.

 

 

 

 

 

 마법사

 

 

 

 사내는 미끄러운 바위에 뺨을 붙인 채 힘겹게 눈을 떴다.

 숨이 막혀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온몸을 담그고 목만 내놓은 상태, 이가 덜덜거리며 서로 맞부딪쳤다.

 ‘빌어먹을!’

 입안에서 피 냄새가 맴돌았다. 입에 고인 침을 밀어내자 덩어리진 피와 함께 이빨 하나가 떨어져 나와 탁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귀에 잔뜩 물이 들어가서 지독하게 먹먹했다. 고개를 흔들어봤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더 어지러워질 뿐, 일단 물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이끼 낀 바위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어깨에서부터 지독한 통증이 정수리까지 치솟았다. 차가 수면에 박히는 순간 뒤틀린 모양이었다.

 서너 번 숨을 몰아쉬면서 어렵게 수면 밖으로 상체를 빼냈다. 매서운 밤바람이 목을 할퀴고 지나갔다.

 거의 완벽한 어둠 속의 강변, 기억나는 건 빗속의 텅 빈 강변도로를 달리다가 느닷없이 건너편 주차장에서 튀어나온 어떤 미친 자식에게 들이받혀 가드레일을 뛰어넘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어렵게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건 멀리 지나가는 차량의 전조등이 전부, 도로까지는 멀지 않았지만 경사가 심해서 사면을 한참 기어야 할 것 같았다.

 완전히 젖어버린 전화기를 꺼내 눌러보면서 진흙 위에 발을 올렸다.

 ‘윽!’

 발목 상태가 심각했다. 발을 옮겨놓을 때마다 무시무시한 통증이 뒷목을 타고 머리끝까지 치솟았고 팔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움직이지 않으면 몇 분 지나지 않아 저체온증으로 황천행이었다.

 미끄러운 사면을 무조건 기어 올라갔다. 빗줄기는 많이 잦아들었지만 미끄러운 데다 경사도 심해서 잡초를 움켜쥐어야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20분 넘는 사투를 벌이고 나서야 어렵게 도로변의 철제 가드레일에 손을 댔다.

 되는대로 가드레일에 상체를 걸치고 흐릿한 눈을 비볐다.

 대형 사고가 나고 한참이 지났으니 하다못해 견인 차량이라도 나타나야 하는데 경광등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새카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대략 새벽 1시쯤에 서울을 벗어났으니 지금 시간은 최소한 새벽 3시, 지나가는 차가 있어도 세워주지 않을 것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걸 포기하고 도로 좌우를 확인했다. 멀리 산지 사면에 러브호텔쯤으로 보이는 불빛이 반짝였다.

 거기까지만 도착하면 전화는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일단 모텔로 방향을 잡고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등 뒤에서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경사로를 올라오느라 가속하는 엔진 소음이었다. SUV나 밴인 듯 전조등 높이가 조금 높아보였다.

 차는 경사로 아래에서 탄력을 받아 기세 좋게 가속을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도로 가운데로 들어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아니, 더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세우지 않겠다는 뜻 정도가 아니라 공격적인 가속이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사내는 즉시 도로변으로 돌아와 가드레일을 뛰어넘으려 했다.

 그러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무서운 통증에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가드레일을 잡은 채 풀썩 무릎을 꿇었다.

 차의 움직임은 예상대로였다. 괴물처럼 번쩍이는 전조등은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더니 곧장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시 일어섰지만 가드레일을 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네미럴!’

 퍽!

 범퍼 앞에 달린 묵직한 쇳덩어리 뭉치가 무릎뼈를 정통으로 들이받았다.

 사지가 순간적으로 허공에 붕 떠오르고 무언가 등에 부딪치면서 새카만 하늘이 보였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인다는 느낌뿐, 얼마 지나지 않아 비에 젖은 도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스팔트와의 첫번째 접촉은 어깨였다.

 쇠꼬챙이로 생살을 찌르는 것 같은 지독한 통증과 함께 시커먼 하늘과 아스팔트의 노란 선이 교대로 눈앞을 스쳤다.

 그리고 하얀 가드레일이 눈에 들어왔다.

 콰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느리게 움직이던 화면이 멈췄다. 튀어 오르는 빗방울 사이로 멀어져가는 시뻘건 눈동자 두 개가 보였다.

 한참을 날아가 가드레일 아래에 비스듬히 처박힌 모양새, 절벽 아래 시커먼 수면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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