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대로라면 리명철은 장명신의 수하였다. 그리고 조직을 대표하는 행동대장이었다.
당연히 흑룡강파 흡수 병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터, 그런 리명철이 장명신을 대형이라고 부른다면 장명신은 확실히 보스급의 지위였다.
그런데 흑사회 보스 일곱 명 중에 장명신의 이름은 없었다. 상대는 아직 어둠 속에 있었다.
“반기를 든 건 리명철 혼자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요?”
“모양새가 우습게 됐죠. 늦었지만 일을 바로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무기 반입과 쿠데타 계획에 대해서 몰랐다는 뜻, 그는 빙긋이 웃으며 목소리를 깔았다.
“내 눈에는 그냥 발을 빼려는 시도 같은데?”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 진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진실이라…… 웃기는군. 진실은 언제 누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요. 당신을 믿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어.”
“믿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정도 선에서 정리가 됐으면 해서 내놓는 전향적인 제안이에요.”
“왜 나요? 난 검찰청에 근무하는 일개 수사관일 뿐인데?”
“답은 그쪽에서 더 잘 아시지 않을까요?”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요?”
확실히 눈앞의 여자는 뒷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술집 여사장이나 폭력 조직 조직원이 아니었다.
시종일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대화를 주도했고 골프장 선착장의 폭발을 자신이 사주했다고 이야기하면도 거리낌이 없었다.
프로였다. 순간, 오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들어. 장명신, 기록상으로는 34세야. 조선족, 주소지는 여의도고 21세에 이명훈과 혼인신고를 하면서 입국했어. 이명훈은 이명석의 이복동생이야. 이명훈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 이름은 이시영, 26세에 이혼했고 아이는 아버지가 키우는 것으로 되어 있어. 그때부터 한국 여권으로 중국에 드나들었는데 최소 20회 이상이야. 중국에서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고 과속 스티커 몇 장 빼고는 범죄 기록도 없어. 그런데…… 체류 기간이 상당히 길어서 현지에서 스카우트되고 훈련받았을 가능성도 높아. 요즘은 현장 적응이 완전히 끝난 사람들을 요원으로 영입하는 경우가 많거든. 지금으로선 아들이 유일한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으니까 던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상대가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정보 요원일 수도 있다는 뜻, 이러면 오늘 벌어진 황당한 일들이 어느 정도 설명이 됐다.
그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장명신이 요염한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전 전쟁에서 빠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전쟁?”
“곧 만나게 되시겠지만 지금 걷는 길의 끝은 분명 험악한 전쟁이에요. 그것도 초대형 유혈극이 될 겁니다. 보통은 이런 때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데…… 전 누구 편에도 서기 싫습니다. 전 언제나 돈이 있는 편에 서거든요.”
“돈 안 되는 싸움은 피하고 싶다?”
“물론이죠. 그래서 저나 그쪽 모두에 득이 될 만한 제안을 할까 해서 모신 겁니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일단 들어봅시다. 듣는 데 돈 드는 거 아니니까.”
“고맙습니다. 제안은 간단해요. 그쪽은 흑사회 주력을 처리해서 체면치레를 하시고 전 전쟁터에서 벗어나 운신할 공간을 얻는 겁니다.”
“운신할 공간?”
“명철이가 관리하던 업소와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홍인철이 직영하는 2개 계보의 범죄 사실과 증거, 조직원 명단, 중국 측 거래선 등 관련된 모든 증거들을 넘겨드릴 겁니다. 한국 정부가 거부반응을 보이는 마약과 인신매매 쪽을 털어내면 나머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주실 수 있으리라는 애틋한 바람이죠.”
장명신은 가볍게 윙크를 하고 다시 웃었다.
“홍인철을 넘길 테니 당신은 건드리지 마라?”
“비슷하네요.”
“남는 장사 같지 않은데?”
“차이나타운을 지배하는 조직이 한족이 되는 것보다는 조선족이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주인이 사라진 차이나타운은 즉시 삼합회가 차지하게 될 겁니다.”
“제대로 궤변이로군, 싫다면?”
“저를 포함한 흑사회의 모든 조직원과도 피비린내 나는 전면전을 감수해야겠죠. 제가 마음먹고 저항하면 서울, 경기 일원에 만만치 않은 혼란이 일어날 겁니다.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 싸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만 골라서 하는군.”
“그리고…… 중국 정부와도 한바탕 괴로운 외교 분쟁을 치러야 할 겁니다.”
“얼씨구? 외교 분쟁씩이나?”
“무고한 중국인을 탄압한 거니까요.”
“무고하시다? 갈수록 태산이군.”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최근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힘이 커진 건 사실이지만 폭력 조직 따위까지 건방을 떠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같잖은 협박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야기 안 끝났어요.”“뭐, 좋아. 일단 끝까지 들어보지.”
“전 여의도에서도 비슷한 업소를 운영해요. 수익성은 좀 떨어지지만 오래 영업을 하다 보니 힘 있는 분들을 꽤나 많이 알게 되더군요. 그쪽은 평생 얼굴 보기도 힘든 거물들이지요.”
“그런데?”
“그분들께서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주십니다.”
“이런, 당신이 흑사회보다 더 우리 사회에 해가 될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호호.”
“참, 그 누구냐…… 맞아, 시영이. 시영이가 올해 몇 살이죠? 내년에 중학교 올라가던가?”
일방적으로 당하기 싫다는 생각에 마구잡이로 던져본 도발, 그러나 기대와 달리 장명신의 눈매에서는 조그마한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동안 담담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래도 신경은 쓰이는지 목소리는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아이까지 놀음판에 올려놓지 마세요. 그 아이는 한국인입니다.”
“당신은 아니고?”
“저도 당연히 한국인이죠. 조선족 친구가 많을 뿐입니다.”
“친구라…… 재미있군.”
“일을 크게 만드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아요. 전면전에 들어가면 그쪽 피해도 만만치 않을 테니까요. 그쪽에서 선을 지킨다면 저도 하나쯤 더 넘겨드리죠.”
“아직 판에 올릴 건이 남으셨다?”
“서로에게 도움이 될 일은 많지요. 이번 같은 경우에는…… 아, 그래요! 그쪽 친구에게 누가 손을 댔는지를 알려드리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응?”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 그리고 장명신 자신은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답을 먼저 듣고 싶네요. 답은 밖에 있는 친구가 내놓는 건가요?”
-일단 접수해. 테란이 먼저야.
장명신과 오지연의 말이 한꺼번에 귓전을 때렸다. 그는 30초쯤 장명신의 눈매를 노려보면서 뜸을 들인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은 없어.”
“죽은 거위보다는 산 거위가 낫지 않을까요? 이 치마폭 안에 황금 알이 제법 많거든요.”
장명신은 기묘하게 웃으면서 치마를 슬쩍 걷어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선물을 드렸으면 싶은데…… 그쪽이 데려간 여자아이에 대한 겁니다.”
“여자아이?”
그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상대의 의도를 모를 땐 오리발이 최선이었다.
“호호, 모른 척하셔도 상관없겠죠. 어쨌든 그 아이는 명철이가 별도로 의뢰를 받은 것으로 보이더군요.”
“젠장, 우리 확실히 합시다. 임의로 납치한 게 아니란 거요?”
그는 욕설을 토해내며 다시 물었다. 대책 없이 휘둘리는 기분이지만 확인이 먼저였다.
장명신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불행하게도 그런 것 같네요. 의뢰인도 제가 아는 사람 같았어요.”
그는 미간을 잔뜩 좁혔다. 장기 밀매를 위해 임의로 납치한 것이 아니라 한희진이 목표였다? 이러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한희진을 누나에게 맡긴 것부터 심각한 문제, 당장은 의뢰를 받은 리명철이 큰집에 들어가 앉아 있으니 며칠은 괜찮겠지만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지 않으면 조만간 다시 시도할 가능성이 높았다.
누나와 조카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멍청한 짓을 한 셈이었다. 그의 목소리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누구지?”
“아아, 사람을 찾아내는 건 그쪽 분들이 하셔야 할 일 아닌가요? 그리고…… 처음부터 다 오픈하면 매력 없다던데…… 남녀 관계에서 ‘밀당’이 없으면 재미도 반감되지 않을까요? 호호,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확신은 못해요. 그래서…… 곧 만나게 될 전쟁의 상대? 이 정도만 이야기하고 끝냈으면 합니다.”
흐릿하게 미소를 머금은 장명신은 외장형 하드디스크 하나를 꺼내 포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말을 이었다.
“그쪽이 원하는 자료는 모두 여기 있어요. 이걸 받으시면 전 지금부터 자금성을 정리하기 시작할 겁니다. 합의가 된 건가요?”
그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하드디스크로 손을 가져갔다.
장명신은 하드디스크를 자기 쪽으로 살짝 당겼다. 대답을 요구하는 행동, 그는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대답이 필요한 거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장명신은 하드디스크를 잡았던 손을 놓더니 배시시 웃었다.
“시간 여유는 최소 사흘, 이후에는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아요. 패스워드는 영문으로 한국어 ‘회피’, ‘ghlvl’이 되나요? 그리고…… 다음번엔 옷을 좀 덜 입는 장소에서 적의 없는 만남을 가졌으면 좋겠네요, 호호호.”
차승호는 시원하게 웃는 장명신의 차림새를 새삼 훑어 내렸다.
입은 거라곤 유두 자리가 선명한 파티 드레스 하나가 전부, 아래는 속옷 하나라도 걸쳤으리라 믿지만 어쨌든 저기서 옷을 덜 입은 상태라면? 그는 하드디스크를 집어 점퍼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히죽 웃었다.
“기대하겠습니다.”
뒷걸음질로 나간 차승호가 밖에 서 있던 바텐더의 안내를 받으면서 멀어지자 장명신은 느릿하게 전화기를 꺼내 단축번호 2번을 눌렀다.
신호가 정확하게 네 번 울리고 전화기 너머에서 건너온 목소리는 차갑고도 무거웠다.
-자주 전화를 하는군.
“손을 좀 써주셔야겠습니다.”
-부탁을 할 때도 있나?
“귀찮은 일이 생겼거든요.”
-사람을 보내지.
“감사합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장명신은 치열을 모두 드러내면서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이참에 주변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재미있어졌어.”
***
안가로 돌아온 두 사람은 밤새 만사를 젖혀놓고 하드디스크에 매달렸다.
디스크는 크게 디렉토리 세 개로 나뉘어졌는데 하나는 리명철이 관리하던 도박장과 인신매매 조직에 관련된 사항이고 다른 하나는 홍인철 계보의 정보였다.
각각 사진 백여 장과 장부로 보이는 대형 엑셀 파일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처음엔 하나하나 일일이 확인했지만 곧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 내용을 다 확인하려면 하루 이틀로는 가시적인 결과를 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결국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들을 이민우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1차 검토를 끝내고 문제의 마지막 디렉토리로 넘어갔다.
디렉토리 안에는 달랑 이름 두 개와 사진 몇 장만 들어가 있었다.
‘세르게이 라진스키.’
‘디미트리 이바노비치.’
사진은 세르게이와 테 없는 안경을 쓴 40대 남자가 무언가를 주고받는 장면 몇 장과 캥거루 범퍼가 깨진 쥐색 SUV 차량이 풀샷으로 잡혀 있었다.
SUV의 번호판은 제자리에 있지만 주인을 찾는 건 당연히 헛수고, 세르게이의 옆모습과 함께 찍힌 남자는 정장에 넥타이까지 맨 회사원 같은 깔끔한 이미지였다.
오지연이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것들이라는 이야기인데…….”
“그 여자 말이 사실이라면 디미트리일 가능성이 높겠지. 확신할 수는 없어. 덮어씌우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방법 없어. 일단 파보자. 조커, 이 사진에 나오는 남자 누군지 찾을 수 있을까?”
“그게…… 좀 애매해요. 범죄자 DB 돌려보는 건 가능합니다. 그런데 다음은 뭐랑 비교하죠? DB에서는 ‘매치’ 나올 가능성 희박합니다.”
얼핏 보기에도 남자는 대기업 중간간부이거나 정치인 보좌관쯤 되는 것 같았다.
당연히 범죄자 리스트에서 얼굴을 찾아낼 가능성은 희박했다. 차승호가 모니터 사진을 옆으로 밀어내면서 말을 받았다.
“주요 일간지 1면에 올라온 정, 재계 인사들 사진을 무작위로 돌려보는 건 어떨까? 한…… 한 달 정도? 본인 말고 주변에 들러리 선 얼굴들로 뒤져봐. 높은 놈들 자잘한 뒤치다꺼리하는 친구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저 몸 하나거든요?”
“컴 빵빵하잖아. 이 정도 멀티태스킹은 어렵지 않을 거 같은데?”
“그냥 ‘프로그램 런’ 그러고 끝나는 거 아니거든요? 신문 뒤져서 사진 끌어다 놓는 것만 해도 삼박사일 중노동이라고요.”
“알아, 계좌 추적 쪽이 좀 쉬워졌으니까 그쪽에 시간 쪼개라. 부탁하자.”
“에효, 또 날 새겠네. 알았슈.”
“수고 좀 해. 너밖에 없다.”
그는 격려하는 의미로 이민우의 등판을 펑 두드린 다음, 오지연을 돌아보았다.
“우린 마법사 도와야 하는 거 아니냐? 세르게이나 디미트리가 테란을 공격했다면 마법사도 안전하지 않아.”
혹시나 싶어 꺼낸 이야기지만 오지연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문자 보내놨어. 우린 이쪽이나 정리하자. 넌 그 여자 어떻게 생각해?”
“장명신?”
오지연은 고개만 끄덕였다.
“일개 조폭 두목이라고 보기는 힘들지. 위험한 여자야.”
“외국 정보 요원으로는 어때? 이를테면 중국 정도 말이야.”
“가능하겠지. 노출됐다 싶으니까 무서울 정도로 과감하게 뒷문을 닫았고 리명철을 돌려달라는 이야기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어. 명색이 오른팔인데 완전히 관심 밖이더군. 그런 여자가 최고급 콜걸들 거느리고 정, 재계에 커넥션을 만들었다? 최악이야.”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본인이 노출됐다고 판단했으면 지금부터는 한시름 더는 거야.”
“한시름 덜어?”
“진짜 스파이라면, 그리고 그게 중국이나 북한 측이라면 전형적으로 적용되는 수순이야. 노출된 스파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거든.”
그는 ‘노출된 스파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메인 화면에 올려놓은 장명신의 주민등록증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지연이 말을 이었다.
“국내에 들어온 저쪽 요원들은 다 마찬가지야. 존재가 노출되는 순간, 스파이로서의 가치는 바닥을 치고 심리적 압박은 천정부지로 치솟거든. 본국에서 사실을 확인하면 즉시 흔적을 지우려 할 거고…… 돌아간다고 해도 미래가 밝지 못하니까 이래저래 갈등이 심해지는 거지. 처음엔 놀란 마음에 탈출을 생각하다가도 마지막 순간에는 본국에 노출을 숨기게 되고…… 다음은 외길 수순이야.”
“더블 에이전트?”
“아니면 정보 장사꾼, 다를 거 없겠지만. 어쨌든 그래, 활로는 그거뿐이거든. 더구나 그 여자는 한국에 아이까지 있잖아. 돌아갈 생각 없을 거야.”
“우리랑 부딪치기 전부터 그쪽 길로 들어선 상태라면 어때? 이야기가 달라지잖아. 가능성은 충분해.”
“너무 앞서 가지 말자. 지금 문제는 스파이냐 아니냐를 어떻게 확인할 것이며 어떻게 이용해먹을 거냐 하는 것뿐이야.”
“프로토콜 매뉴얼하고 달라지는데?”
“매뉴얼?”
“17-2, 친구가 아니면 적이다.”
오지연은 한쪽 입술을 슬쩍 비틀더니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필드에서는 단서가 붙어, 구분할 수 있다면.”
“피아 구분이 아직 안 됐다는 이야기냐?”
“아니, 기본은 적이야. 단지 윤곽이 나올 때까지는 지켜보자는 거다. 어차피 지금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만일 저 여자 말이 맞고 러시아인들이 테란을 죽인 범인이라면 무조건 그것들이 먼저니까. 오늘부터 난 마법사 서포트한다. 장명신은 네가 맡아. 조커가 도와줄 거야. ‘적의 없이’ 지내봐.”
오지연은 말끝에다 ‘적의 없이’라는 단어를 또박또박 강조해서 덧붙였다.
“에? 뭔 소리야?”
“기대한다면서? 신체검사라도 해보든지.”
오지연은 쏘아붙이듯 혼잣말을 하면서 테이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무표정한 오지연의 옆모습을 보면서 씩 웃었다.
“질투하는 거냐?”
“놀고 있네. 허리 아래서 노는 것들 관심 없어.”
“난 허리 위도 좋아하는데? 크크.”
낄낄대며 한참을 웃은 그는 담배를 물고 상황실 밖으로 나왔다.
주머니에서 전화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번호를 확인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김채문의 번호였다.
-접니다, 형님.
“무슨 일 있냐?”
-형님 자취방 아직도 청천동이죠?
“그래, 이사해야 되는데 도통 시간이 없어서 아직 못 했다.”
-그럼 집에 좀 가셔야겠네요.
“집? 거기 아무것도 없는데?”
-그게…… 경호 대상이 퇴원하자마자 형님네 집 들어가서 안 나옵니다.
“뭐?”
-청소하고 뭐 그러는 거 같은데요?
“이건 또 뭔 소리야?”
-누님 댁에서 딱 하루 자더니 아침부터 형님네로 직행해서 아주 눌러앉을 기셉니다. 쓸고 닦고 빨래하고 난리도 아니네요. 동네 마트에서 먹을 거도 사 가던데요? 흐흐.
그는 시간을 확인하면서 손바닥만 한 창문을 가로막은 커튼을 열었다. 오전 11시가 넘어간 시간인데도 하늘은 뿌옇게 가라앉아 있었다.
날이 흐린 데다 모니터에 푹 빠져 밤을 새우는 통에 시간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김채문은 숨도 쉬지 않고 계속 한희진의 근황에 대해 주워섬겼다.
-…… 암만 봐도 짱 단단한 앱니다. 도무지 애 같지가 않네요.
“씁…… 누나를 어떻게 설득했지? 허락 안 했을 건데?”
-거야 모르죠. 잠깐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그는 전후 사정을 설명하는 김채문의 연설을 들으면서 부지런히 머리를 회전시켰다.
당장 한희진을 납치하도록 누군가 사주했다는 이야기가 나온 판이니 어차피 누나네 집에 놔두는 건 불가능했다.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만이라도 안전한 장소로 옮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알았다. 옷도 갈아입어야 되니까 일 끝나는 대로 잠깐 들르마.”
-옛썰! 이따 뵙죠.
그는 전화를 끊고 다시 상황실로 들어가 오지연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