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해야겠다.”
“꼬마?”
“그래, 누가 됐든 콕 찍어서 그 아이를 납치해달라고 했다면 누나한테 맡기면 안 돼. 새 신분을 만들어주든지 이쪽으로 데려오든지 해야겠다.”
“애매하긴 한데…… 조커, 팩맨 새 숙소 아직 배정 안 됐어?”
“팩맨 책상 위에 봉투 올려놨습니다. 못 봤어요?”
“오케이, 그럼 잠깐 나갔다 와야겠다. 그 아이 우리 집에 와 있단다.”
그가 되짚어 일어서자 오지연이 퉁명스럽게 토를 달았다.
“아예 짐 옮기고 와. 잠시 안가에 데려다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허리 아래서 노는 거 좋아해도 고딩까지 덮치지는 않겠지.”
“헐, 변태로 몰아가는 거냐?”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 오지연의 뒤통수에다 썩은 미소를 날려주고 상황실을 나왔다.
책상 위에 있는 누런색 서류 봉투를 뜯자 목동의 유명 원룸 아파트 방 번호와 숫자 네 개가 적힌 종이 한 장과 현금 100만 원이 떨어졌다.
‘숫자는 라커 비밀번호일 거고…… 이건 이불이라도 사라는 건가?’
종이와 현금을 안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고 담배 필터를 씹으면서 차를 빼냈다.
그런데 그의 차가 안가 초입의 감시카메라를 통과하자마자 전화기가 다시 몸을 떨었다. 모르는 일반전화 번호, 건너온 목소리는 마법사였다.
-나다. 어디냐?
“집 앞입니다. 일이 있어서 나가는 중입니다.”
-그럼 잠깐 얼굴 보고 가라. 그냥 대로까지 나오면 대로 건너편 이면 도로에 편의점 하나 있다. 거기서 나 좀 태워.
“그러죠. 금방 갑니다.”
대로로 나와 유턴을 받고 이면 도로로 들어가자 후드티로 얼굴을 가린 마법사가 골목에서 뛰어나와 손을 흔들었다.
차를 세우기가 무섭게 올라탄 마법사는 지체 없이 출발을 명령했다.
“골목 끝에서 좌회전.”
미행을 확인하려는지 골목을 복잡하게 돌게 한 마법사는 반대쪽 이면 도로로 빠져나와 신호등 하나를 건너고 나서야 후드를 벗으며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다.
“얼굴 볼 시간이 별로 없었군. 할 만해?”
“아직 정신없습니다. 깡으로 버티는 거죠, 후후.”
“그만하면 잘 적응하고 있어. 발 뻗을 자리도 만들기 전에 일이 터진 게 문제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죠?”
“가면 알아. 10분이면 도착할 거다. 따로 보여줘야 할 것도 있고…… 나이를 먹다 보니 힘이 좀 부쳐서 말이야, 후후. 네가 대신 힘 좀 써야겠다.”
“힘 하나는 아직 쓸 만합니다, 후후.”
“좋아…… 그럼 얼굴 본 김에 사수의 의무라는 걸 한번 수행해볼까? 기초 교육과정에서 웬만한 규정이나 필드 프로토콜은 대충 머릿속에 넣었지?”
“예.”
“사실 그거 다 쓸모없어. 내가 식구들에게 지키라고 요구하는 룰은 딱 하나야. 그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새겨둬.”
“말씀하십쇼.”
“룰 넘버 1, 아무도 믿지 마라. 동료는 물론이고 자신의 눈도 믿지 마라. 직접 눈으로 본 것도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건 몰라도 등을 맞댄 동료를 믿지 말라는 건 선뜻 동의를 표하기 어려웠다.
“이해는…… 가지만 동의는 어려운데요? 본 거야 조작이 가능하니까 그렇다고 쳐도 동료는 다르지 않습니까?”
“철없는 놈, 일에 감정 섞지 마라. 이 바닥은 모든 게 회색이야.”
동료와 친구를 혼돈하지 말라는 뜻,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해두죠. 두번째는 없습니까?”
“없어. 다 왔다. 저기서 좌회전.”
마법사는 신월동 외곽의 오래된 주택가로 차를 몰게 했다. 주택가를 완전히 관통하고 외진 산기슭 비포장도로도 잠깐 달렸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장소는 주택가에서 한참 떨어진 산지 초입의 단층짜리 낡은 벽돌 건물인데 삼면이 모두 산지로 막혀 있고 진입로는 오로지 비포장도로 하나였다.
마법사는 목적지에 도착하고도 엉뚱한 곳을 한참 돌고 나서야 건물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산기슭에 차를 세우게 했다.
그러고도 차 안에서 잠시 건물을 지켜본 뒤 차에서 내렸다.
이어 먼저 건물로 건너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중하게 주변을 돌아본 뒤, 그에게 안전하다는 수신호를 했다.
그가 문 앞에 도착하자 마법사는 철문 옆으로 손을 집어넣어 자물쇠를 따면서 말했다.
“땅굴이야.”
“땅……굴이요?”
마법사는 어색한 반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어깨 너머로 손짓을 하면서 비좁은 앞마당을 통과해 현관 계단을 올라갔다.
현관 열쇠는 문 아래로 손을 넣어 꺼내 간단하게 열었다.
가장 오래된 스타일의 보안장치인 셈이었다. 그가 흐릿하게 웃자 마법사가 마주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갈수록 최고의 보안 장비는 구닥다리야. 첨단이니 최고니 장비 자랑하는 것들은 다이얼식 금고 못 열거든. 후후. 들어와.”
현관을 열자 어둑하고 텅 빈 실내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대낮인데도 빛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 현관 입구를 비롯해 접힌 종이 박스들이 여기저기 쌓여 어수선했고 가구라고는 거실에 있는 허름한 의자 몇 개와 탁자 하나가 전부였다.
가전제품도 두꺼운 커튼 아래 놓인 손바닥만 한 TV 한 대뿐이었다. 마법사는 신발을 신은 채 거실로 들어가 TV를 켜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앉아. 저것들은 여전히 삽질이네.”
TV 뉴스는 불과 3주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의 판세에 대해 며칠 전과 똑같은 여론조사 결과를 재탕하고 있었다.
집권 민주공화당 박성호 후보가 제1야당인 민주연대 안동환 후보에 오차 범위 내에서 앞섰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조사를 담당한 기관이 여당 성향인 데다 조사 방식도 휴대전화를 뺀 RDD여서 실제 개표 결과는 완전히 반대로 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가 탁자 한쪽을 차지하고 앉자 마법사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 아래를 툭 두드렸다.
“교활한 토끼는 굴이 세 개라는 속담이 있지?”
“예?”
“뜯어.”
그는 두말없이 도배지를 뜯어냈다. 도배지 아래는 허리 높이에 색깔이 다른 벽돌 10여 개가 덧대져 있었다.
마법사가 작은방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안에 오함마 있다. 가져와.”
방으로 들어간 차승호가 큼직한 산업용 망치를 가져오자 마법사는 말없이 고개만 까딱해 보였다.
그는 두말없이 벽돌을 두들겼다.
벽돌 몇 개를 깨뜨려 공간을 만들자 커다란 비닐봉지에 싸인 소음기 달린 권총 몇 자루와 여행용 하드 케이스 서류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비켜봐.”
마법사는 차에서 가져온 검정색 스포츠 가방에다 총기들을 쓸어 넣고 가방을 끌어냈다.
“너도 하나쯤 만들어둬. 신분증도 지급된 거 말고 따로 만들어두는 편이 좋아.”
“그것도 명심하겠습니다.”
“하드 케이스만 차에 실어놓고 와. 챙길 게 또 있다.”
혼자 처리해야 할 것이 있다는 뜻, 그는 두말없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옮기시는 겁니까?”
“여긴 좀 오래됐어.”
가방의 무게는 상당했다. 한 손으로 들면 어깨가 살짝 처지는 느낌이니 최소 20킬로그램은 넘을 것 같았다.
모하비 백도어에 가방을 밀어 넣은 뒤, 차에 기대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잔뜩 찌푸린 하늘은 곧이라도 빗방울을 떨어뜨릴 것같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길게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내뿜었다.
그런데 멀리 주택가 담장 밑에 주차된 검은색 BMW가 신경을 긁었다.
‘응?’
처음 동네를 돌 때는 보이지 않았던 차량, 허름한 1톤 트럭 두 대 뒤에 바짝 붙여 세웠는데 달동네에 가까운 주택가의 분위기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돌아선 그는 열쇠로 차 문을 잠그면서 운전석 백미러를 통해 뒤를 확인했다. 움직임은 없었다.
‘어디냐?’
담배꽁초를 멀리 던지면서 주변을 훑어보았다.
건물을 등진 낮은 구릉과 말라버린 숲, 어둑한 하늘, 담장 너머로 비스듬하게 보이는 창문, 처음 도착해서 보았던 그림과 다른 건 없었다.
그러나 등줄기를 파고드는 기분 나쁜 오한은 가시지 않았다. 그는 느릿하게 돌아서서 등으로 햇빛을 받으며 숲으로 들어갔다.
능선 중턱까지 몇십 미터 안 되는 거리를 올라가는 동안, 말라붙은 낙엽들이 발밑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탱크 굴러가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따라오는 놈도, 공격하는 놈도 없었다.
그는 능선 중턱쯤에서 걸음을 멈추고 건물 주변을 전반적으로 훑어본 다음, 산지를 통해 신속하게 건물로 향했다.
불규칙한 경사로를 달리는 셈이라 걸음은 느렸지만 곧 비스듬했던 창문이 정면으로 돌아오고 철문이 보였다.
그런데 조금 전과 그림이 달랐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차이, 바람도 없는데 나올 때 열어놓은 문의 각도가 달라져 있었다.
거기다 흐릿하게 가솔린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제기랄!’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추면서 총으로 손을 가져갔다. 순간, 딸깍하는 소음과 함께 유리창에 난 구멍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총격?’
그는 번개같이 권총을 빼 들고 숲을 빠져나와 담장 아래로 뛰어들었다.
일단 등을 기대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혈관의 모든 피가 미간으로 몰리는 느낌, 심장은 정신없이 쿵쾅댔고 등 근육이 심하게 따끔거렸다.
티딕!
건물 안에서 소음기에 막힌 탁한 총성과 비명이 한꺼번에 터졌다. 벽에 가로막혀 약했지만 테이블이 쓰러지는 소리까지 확실히 들렸다.
‘씨발, 환장하겠네.’
이러면 무조건 들어가야 했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슬라이드를 당겼다 놓았다. 순간, 또다시 총성이 터지고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문에서 나온 건 시커먼 야구 모자를 쓴 거구의 사내였다. 덩치는 산만 했는데 걸음걸이가 위태로웠다.
옆구리와 다리가 피투성이, 피아를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마법사에게 총질하다 맞았을 테니 확실히 적이었다.
그는 담장을 어깨로 밀면서 몸을 일으켰다.
계단을 내려오는 불규칙한 발소리가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문을 통과하는 순간, 놈의 목젖에다 정통으로 역수도를 박았다.
“컥!”
놈은 허공에 완전히 떴다가 철문 아래 시멘트 문턱에다 등판을 찍고 나동그라졌다.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으니 여기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놈은 다시는 허리를 쓰지 못할 것이었다.
쓰러진 놈의 턱을 다시 걷어찬 그는 손에 걸쳐 있는 권총까지 멀리 차내고 안으로 들어가 현관 옆에 기대섰다.
“마법사!”
낮게 소리를 질렀다. 대답은 없었다. 재빨리 머리를 현관 안으로 뺐다가 돌아왔다.
얼핏 보기에도 내부의 풍경은 살벌했다. 마법사는 쓰러진 테이블 뒤에 기대앉아 있었고 다른 한 놈이 현관 앞에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놈은 완전히 피범벅이고 마법사도 어깨부터 팔까지 상당한 양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가 다시 머리를 내밀자 마법사가 테이블을 슬쩍 밀어내며 허리에 차는 검은색 벨트형 가방 하나를 그에게 던졌다.
“3시 방향 150 저격수, 코드블랙.”
“카피.”
공중에서 가방을 낚아챈 그는 재빨리 몸을 낮춰 현관 난간 아래로 들어갔다.
저격수를 피하겠다는 생각, 그런데 느닷없이 한쪽 뺨이 화끈했다.
본능적으로 물러서는 통에 계단을 굴러떨어지고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감당하기 힘든 열기가 쏟아졌다.
‘제기랄!’
몇 초 전까지도 멀쩡하던 현관은 이미 무시무시한 불길에 뒤덮여 있었다.
마치 폭발하는 것처럼 한꺼번에 터져 나온 화염은 눈 깜짝할 사이에 건물 전체를 휘감았고 시커먼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담장과 문에도 휘발유를 뿌렸는지 불은 그가 머리를 박은 담장까지 무섭게 번지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담장 밖으로 밀려나 가까운 도랑으로 몸을 던졌다. 불길이 워낙 거세서 구하러 들어가는 건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그는 미련 없이 건물 쪽을 단념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 마법사 정도 되는 사람이 만든 안가라면 당연히 탈출로를 만들어두었으리라고 믿었다.
혹시나 하는 걱정은 나중 일이었다. 당장은 시선을 끌어 저격수로부터의 안전을 확보해주는 것이 시급했다.
마음을 결정하자마자 슬쩍 머리를 내밀어 저격수의 위치부터 가늠했다.
순간, 서쪽 구릉 중간쯤에서 주황색 섬광이 번쩍했다. 그는 기겁을 하면서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그런데 총탄은 엉뚱하게도 철문에 걸쳐 쓰러진 놈의 후두부에 작렬했다.
연기 때문에 시계가 별로 좋지 않을 텐데도 총격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교했다.
‘개자식! 뜨시겠다? 그렇게는 안 돼.’
그는 즉각 몸을 일으켜 도랑 아래를 뛰었다. 머리 위로 소닉붐이 스치고 바로 뒤에서 흙무더기가 튀어 올랐다.
‘해보자 이거지? 좋았어. 이쪽이야, 개자식아!’
욕설을 토해내면서 엎어졌다가 한 바퀴 굴러 숲으로 뛰어들었다.
나무가 비교적 굵고 숫자가 많아서 사각을 잡아도 사격이 어려운 지역, 기대대로 총탄은 몇 발 떨어진 나무둥치를 후벼 팠다.
그는 신속하게 숲을 남쪽으로 우회하면서 지그재그로 뛰었다.
마른 잎이 두툼하게 깔린 구릉 사면이라 뛰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리를 줄이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숲을 가로지른 뒤, 저격수의 위치에서 사각을 찾아 우회해 구릉 사면을 타고 올라갔다.
권총 사거리 이내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저격수 아니라 저격수 할애비라도 해볼 만한 싸움이라는 판단, 하지만 거리를 충분히 좁혔다 싶었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놈은 벌써 멀리 주택가를 달리고 있었다. 그저 놈이 산악용 바이크를 탔으며 갈색 위장복을 입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내 추격을 포기한 그는 저격수가 총을 쏜 자리를 찾아내 체중에 눌린 자리를 확인했다.
거치대가 있는 M계열 저격소총을 사용했고 신장은 170 내외, 탄피는 물론이고 머문 흔적까지 깨끗이 걷어 간 프로였다.
‘지랄이네.’
주변을 섹터로 잘라 꼼꼼하게 둘러보고 안전하다는 판단이 서자 서둘러 마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답은 없었다. 그 자리에 선 채, 불길이 치솟는 건물 주변을 다시 훑었다.
어딘가 탈출로가 있으리라는 판단,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건물에서 멀지 않은 텃밭에서 스멀스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온 길을 되짚어 연기가 올라오는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뛰었다. 곧 소방차가 들이닥칠 판이니 서둘러야 했다.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텃밭 끝자락에 도착해서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연기가 올라오는 지점을 다시 확인했다.
수도관 덮개처럼 생긴 플라스틱 뚜껑이 반쯤 밀려난 자리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무조건 들어가 볼 생각으로 발을 떼는 순간, 플라스틱 뚜껑이 슬쩍 들리면서 매서운 폭음이 숲을 흔들었다.
폭음으로 보아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발밑을 울리는 진동은 확실히 느껴졌다.
‘또 뭐야?’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다음 순간, 플라스틱 뚜껑이 10여 미터 이상 날아가면서 구멍에서 연기가 폭죽처럼 치솟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시커먼 사람의 형체가 튕겨져 나와 텃밭 고랑에 처박혔다.
‘마법사?’
그는 급히 달려가 엎어진 시체를 뒤집었다. 다행히 모르는 얼굴이었다.
심하게 화상을 입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체격 차이가 커서 마법사가 아니라는 건 단언이 가능했다.
침입자들 중 하나일 터, 그러나 마법사가 살아 있을 확률은 더 줄어든 셈이었다.
미리 나왔다면 몰라도 시체가 날아갈 정도의 폭발을 지하에서 만났다면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연기 속으로 들어갈 방법도 없었다.
아직도 굴뚝처럼 연기가 올라오는 판이니 안에서는 숨을 쉬기는커녕 앞을 보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일단 자리를 떠야 했다. 결론을 내린 그는 곧장 차로 뛰면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마법사가 던진 마지막 단어를 모두에게 전해야 했다.
코드블랙,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안가를 소각하고 제2안가에 집결하는 잠적 명령이었다.
쓰던 전화는 물론이고 위치 추적이 가능한 모든 장비와 차량을 버리라는 의미였다.
그만큼 심각한 상황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오지연의 호흡도 상당히 가빠 보였다.
-뭐야! 여기 바빠!
“일 있어?”
-잠깐 나간 사이에 침입자가 있었다. 부비트랩을 건드렸는지 상당한 규모의 폭발이 있었고 조커는 실종이야. 제기랄!
“환장하겠네. 이쪽도 당했어.”
-뭐?
“마법사 안가에 같이 있다가 프로들에게 공격당했다. 상황이 심각해.”
-마법사는?
“중상을 입었는데 불길이 거의 폭발 수준이라 접근할 수가 없었어.”
-죽었다는 거야?
“생존 가능성 거의 없어.”
-시체는? 봤어?
“아니, 내가 본 시체는 침입자들 셋이 전부야.”
-그럼 아직 몰라. 일단 잠수하자. 만나서 이야기해. 코드블랙.
저쪽이 먼저 코드블랙을 선언한 셈, 상황은 완전히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단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걸면서 마지막으로 김채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형님.
“애 데리고 나와. 지금 당장. 도서관에서 보자”
-시립도서관이요?
익숙한 곳이 최선이라는 생각, 부천시립도서관은 양쪽에서 출발하면 중간쯤 되는 위치인데다 한적한 주택가 안쪽이어서 도로가 좁고 활로 확보가 비교적 용이한 편이었다.
“그래. 난 지금 출발한다.”
-납치까지 당했던 녀석이 제가 가잔다고 따라나서겠습니까? 전 인사한 적도 없잖아요.
“불러내서 전화 바꿔. 급하다.”
-알았수.
전화를 내려놓고 차를 돌리는 사이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그는 서둘러 주택가 반대쪽 비포장도로를 통해 현장을 벗어났다.
그런데 주택가를 통과해 이면 도로로 들어설 무렵부터 운전대를 잡은 손끝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왔다.
혈관 속으로 무한정 유입되던 아드레날린의 공급이 멈춰버린 탓일 것이었다.
가속페달에 올려놓은 발끝도 감각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짜증스럽게 운전대를 내리쳤다.
‘빌어먹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순간, 김채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 바꿉니다. 이 아가씨 역시나 까탈스럽네요.
-아저씨?
조심스러운 목소리지만 긴장감보다는 반가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는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거긴 왜 왔어?”
-그냥요. 그런데 방이 그게 뭐예요? 청소 도대체 언제 한 거죠?
퉁명스러운 목소리에도 방어는커녕 공격이 들어온 셈, 왠지 모르게 불길했다.
벌써 누나에게서 물이 들었나 싶을 정도로 녀석은 누나하고 같은 과(科)였다. 그는 쓰게 웃으며 말을 잘랐다.
“시간 없으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 일단 당장 갈아입을 옷만 들고 그 아저씨 따라와라. 더 묻지 말고. 금방 만날 거야. 알았지?”
-네, 아저씨.
“그 아저씨 다시 바꿔줘.”
-네.
-접니다.
“전화기 배터리 빼라. 지금.”
-예?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그리고 미행 신경 써라. 거기서 보자.”
-에…… 일단 알았슈.
떨떠름한 목소리였지만 김채문은 두말없이 배터리를 빼는 것 같았다.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전화기 두 개를 모두 개천 물속에 던져버렸다.
이어 순환도로까지 나와서 반지와 시계를 길가 쓰레기통에 처박고 모하비는 이면 도로에 유기했다.
일단 상황 끝, 다시 대로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