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도착한 건 오후 1시를 훌쩍 넘긴 시간, 마음만 급했지 턱없이 늘어진 셈이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도서관 안팎을 세심하게 둘러보고 주변 아파트와 도서관 건물 사이의 나무 밑에서 진입로를 주시했다.
지루하고 초초한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김채문의 회색 밴이 진입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밴이 앞을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면서 미행이 있는지 진입로 앞뒤를 다시 확인했다. 미행은 없었다.
그가 밴의 뒤에서 손을 한 번 흔들자 밴은 우뚝 멈춰 섰다. 백미러로 그를 본 모양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운전석 창가로 다가섰다.
“수고했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한희진에게 내리라고 손짓을 하고 약속한 돈 중 나머지 100만 원을 김채문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김채문이 봉투를 가볍게 던졌다 받으며 말했다.
“좀 많은 거 같은데요? 날짜가 닷새나 빠졌잖아요.”
“그냥 접수해둬. 입에 지퍼나 잘 채우고.”
“감솨합네다, 흐흐.”
“또 보자.”
“이거 짭짤한데…… 이런 일 환영입니다요. 언제든 연락 주십쇼, 흐흐흐.”
“짜식.”
그는 김채문의 어깨를 툭 쳐주고 밴에서 떨어졌다. 밴은 금방 도서관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길 건너편에 서 있는 한희진을 힐끗 돌아보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작은 백팩을 멘 한희진은 처음 자금성 뒷골목에서 보았던 첫인상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평범한 청바지에 점퍼 차림인데도 놀라울 정도로 성숙한 분위기였다.
아직은 볼에 젖살이 남아 있는 앳된 얼굴이지만 하지장이 길고 이목구비 윤곽도 뚜렷해서 졸업하고 미술 공부만 조금 하면 영화배우 뺨치는 미모를 자랑할 것 같았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한희진이 씩씩한 걸음으로 길을 건너와 대뜸 팔짱을 꼈다.
“이제 어디 가요?”
그는 대답 대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행과 합류할 밤까지 ‘리틀 차인숙’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반격
바이크에서 내린 차승호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아냈을까 싶을 정도로 외진 방화동 창고 지대, 고속도로 몇 개가 교차하는 지역이어서 주로 중소 물류 회사들이 컨테이너 야적을 비롯해 야적이 가능한 물건들을 쌓아두는 곳이었다.
목적지인 제2안가는 컨테이너 야적장 뒤에 있는 낡은 슬레이트 건물이었다.
아는 거라고는 주소 하나뿐이어서 찾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번 덩치들이 상당히 커서 예상보다는 쉽게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안가를 확인한 뒤에는 주변을 몇 바퀴 돌면서 탈출로로 괜찮다 싶은 비좁은 골목 초입에 바이크를 세우고 널빤지를 덮어 꼼꼼하게 위장했다.
폭주족들이 쓰던 싸구려 바이크라 잃어버려도 그만이지만 위급할 때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이어 안가 뒤쪽으로 우회해 컨테이너 야적장 철책을 뚫고 들어가 안가 철문에 달린 낡은 자물쇠 경첩을 쇠파이프로 따버렸다.
“물러서. 위험할 수도 있다.”
하루 종일 종알거리던 한희진도 그의 표정을 봐서인지 굳은 얼굴로 물러나 담에 기대섰다.
그는 몇 초 눈을 감아 암적응을 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빈 집 특유의 오래된 먼지 냄새, 내부는 휑한 사무실 분위기였다.
그래도 책상이나 회의 탁자, 안락의자 같은 가구도 몇 개 있고 칸막이가 쳐진 안쪽에는 싱크대와 야전침대, 침낭까지 갖춰져 있었다.
그는 내부를 간단하게 둘러본 뒤 한희진을 불러들였다.
“저기 야전침대에서 좀 쉬어. 불부터 켜야겠다.”
“네.”
그는 칸막이로 막힌 방마다 돌아가며 문단속을 한 다음, 커버나이프 스위치를 찾아내 전기를 올렸다.
안가의 위치가 높게 쌓인 컨테이너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지나치게 외부의 눈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전등을 하나 켜자 실내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밖에서 볼 때는 곧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허름한 건물인데 안쪽은 제법 아늑한 사무실 분위기, 환기하고 청소만 좀 하면 그런대로 사람 사는 공간이 될 것 같았다.
마법사에게서 받은 하드 케이스를 책상 위에 던진 그는 커튼을 살짝 들추고 밖을 내다보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곧장 책상으로 돌아와 가방을 열었다. 내용물은 특별할 것 없는 현장 요원용 탈출 키트였다.
마법사의 사진이 붙은 프랑스 여권과 권총, 100달러와 5만 원권 지폐 뭉치들, 생각보다 거액이지만 마법사 정도 되는 오래된 거물요원이라면 얼마든지 운용할 수 있는 액수였다.
하드 케이스를 밀어내고 마지막 순간에 받은 허리에 차는 가방을 열었다.
나온 건 특이하게 생긴 외장형 하드디스크였다. 크기도 작을뿐더러 표면에는 스캐너 형태의 투명한 액정이 달려 있었다.
지금으로선 열어볼 수 없으니 패스, 하드디스크를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은 그는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눈을 감았다. 이제 기다려야 할 시간이었다.
“저기…… 이거요.”
익숙한 목소리, 한희진이었다. 낮에 산 캔 커피와 후줄근한 접시 하나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그녀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 그의 옆으로 다가앉았다.
“어, 고마워.”
꽁초를 접시에 비벼 끄고 캔을 땄다.
“힘들지?”
“괜찮아요. 한 것도 없는데, 뭐.”
여전히 담담한 반응, 그간 험한 일을 워낙 많이 겪어서인지 풀이 죽기는커녕 불안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문득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희진의 머리를 헝클면서 씩 웃었다.
“녀석.”
“나 꼬마 아니거든요? 머리 쓰다듬지 마요, 칫.”
입을 삐쭉 내민 한희진은 빼앗듯이 캔을 채 가더니 한 모금 마시고 돌려주면서 그를 곱게 노려보았다.
그는 쿡쿡 웃으면서 커피를 들이켰다. 잠시 그의 옆모습을 노려보던 한희진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휴…….”
선불휴대전화와 옷가지 같은 당장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하루 종일 시내 장바닥을 돌았지만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어두운 표정이었다.
“왜?”
“이거…… 끝날까요?”
“힘들어?”
“아뇨, 힘들지는 않아요. 그냥 현실감이 없는 거 같아서요. 이게 악몽이면 빨리 깨났으면 좋겠어요.”
“곧 끝날 거야. 힘내.”
“아저씨는 어떻게 버텨요? 아저씨한테는 끝나는 일이 아니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
“저 바보 아니에요. 아저씨 경찰관 아닌 거 알아요.”
“그럼 뭐 같은데?”
“국가정보원인가? 그런 데 근무하는 거 같아요. 맞죠?”
“인석아, 만화 같은 소리 고만하셔.”
“안 속아요. 그래서 오늘 결정했어요.”
“뭘 결정해?”
“아저씨 따라다니면서 배울 거예요.”
“엥?”
“사격, 격투기 이런 거요. 운동 좋아해서 중학교 때까지 호신술 많이 배웠거든요. 지금도 운동은 자신 있어요.”
“말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이야기 끝. 가서 자.”
그는 단호하게 말을 자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애들 어리광 받아줄 상황이 아니었다. 순간, 미세하게 벽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쉿.”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권총을 빼 든 그는 손짓으로 책상 아래를 가리켰다.
한희진이 눈치 빠르게 책상 밑으로 들어가고 그는 재빨리 불을 끄고 문 옆에 달라붙었다.
다시 스치는 소리, 그리고 손잡이가 딸깍 움직였다.
그러나 열리지는 않았다. 안에서 잠긴 상태니 당연했다. 몇 번 당겨본 뒤에는 네 번, 두 번 잘라서 문을 두드렸다. 그는 급히 문을 열었다.
“조커가 부상이야, 도와줘.”
잔뜩 긴장한 표정의 오지연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돌아섰다.
그는 한희진에게 기다리라고 낮게 소리친 뒤, 신속하게 오지연을 따라 뛰었다.
발목과 허벅지에 붕대를 감은 이민우는 컨테이너 야적장 철책에 기대서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부상이 만만치 않은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형님.”
“시끄러, 가자.”
서둘러 야전침대가 있는 칸막이 안에 데려다 눕히고 상처를 살피려 하자 이민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병원에서 응급치료 받은 겁니다.”
“총상이냐?”
“아뇨, 재수가 옴 붙었는지 총알, 폭탄 다 피했는데 지붕 파편이 사고를 치더라고요. 제기랄, 하필 내 쪽으로 날아올 건 뭐야? 다행히 부러지진 않았는데 뼈에 살짝 금이 갔고 근육파열도 심해서 한 달은 목발 없이 걸으면 안 된답니다. 깔려서 죽네 사네 하는데 마님이 꺼내줬습니다. 아니면 홀랑 타죽었겠죠, 흐흐.”
“몇 놈이나 됐는지 봤어?”
“아뇨, 제가 본 건 세 명뿐입니다. 마님이 하나 사살했고 하나는 지붕에 깔렸을 겁니다.”
“러시아인 같지는 않았어?”
“체격상 동양인이었습니다. 한중일 3국 다 가능합니다. 총기는 베레타를 썼던 거 같고…… 폭약은 튜브형을 바른 것 같았습니다. 10밀리미터 두께 철문이 잘라지듯 깔끔하게 날아갔어요.”
“그만하길 다행이다. 일단 좀 쉬어라. 필요한 거 있으면 희진이한테 부탁하고.”
“넵, 죄송합니다.”
한희진을 부르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한희진은 그가 입도 떼기 전에 이민우에게 물을 건네고 침낭을 다리에 덮었다.
물부터 한 모금 마신 이민우가 고개를 까딱했다.
“고마워, 전세가 역전됐네?”
“네, 그러네요.”
마주 보고 희미하게 웃는 두 사람을 남겨두고 칸막이를 나선 그는 몇 발 걷지 못하고 우뚝 멈춰 섰다.
책상 옆에서 오지연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의 존재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거침없이 훌훌 벗어 던지고 속옷까지 갈아입었다.
그는 가까운 의자에 대충 걸터앉아 담배를 빼물었다.
“여긴 안전한 거냐?”
오지연이 바지를 끌어올리며 말을 받았다.
“당분간은, 여긴 본사에서도 몰라. 마법사와 내가 직접 골랐고 6개월 넘게 한 번도 오지 않았거든.”
“일단 안전한 거네. 그나저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집은 날아간 거야?”
“폭발에 화재까지 났는데 남은 게 있겠냐? 더구나 불은 조커가 질렀다. 전부, 확실하게 날아갔어.”
오지연은 칸막이 안쪽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한희진을 힐끗 돌아본 뒤, 한쪽 귀퉁이에 세워진 낡고 큰 캐비닛 두 개를 옆으로 밀어냈다.
“좀 도와.”
밑은 든든해 보이는 철제 뚜껑, 그 아래는 다시 큼직한 다이얼식 금고가 매립되어 있었다. 오지연이 다이얼을 돌리면서 말했다.
“번호 외워둬. 26, 34, 9, 15.”
금고 안은 각종 장비가 보물 창고다 싶을 정도로 꽉 들어차 있었다.
첫번째 칸에는 노트북 몇 대와 미니컴퓨터 수준의 컴퓨터 본체, 다음은 거액의 현금, 다음은 MP 계열 자동화기 2정을 포함한 총기류, 마지막은 각종 신분증과 서류철이었다.
오지연이 노트북을 비롯한 몇 가지를 꺼내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빠지고 싶으면 지금 빠져. 난 끝까지 갈 거니까.”
“뭐 그런 섭섭한 말씀을, 이쪽이 더 재미있어 보여서 싫어. 멀쩡한 놈 사표 내게 했으면 책임을 져야 될 거 아냐. 안 그래? 흐흐.”
그가 어깨를 들썩여보이자 오지연도 치열을 모두 드러내며 미소를 머금었다.
“너도 필요한 거 챙겨.”
“기꺼이.”
그가 권총과 몇 가지 장비를 챙기자 오지연이 노트북 파워를 올리며 이민우가 누운 칸막이 가까운 책상에 걸터앉았다.
“조커는 그냥 누워서 들어.”
“넵, 그런데…… 얘는 어쩌죠?”
이민우의 반문에 오지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당장 한희진의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차승호가 덤덤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어차피 같은 배 탔어. 들어도 모르는 거 천지니까 그냥 가자.”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오지연은 금방 입을 열었다.
“지금 가장 심각한 문제는 큰집도 연락이 안 된다는 거야.”
“뭐?”
“비상 회선까지 불통이라 혹시나 싶어서 근처까지 가봤는데 정비소가 문을 닫았어. 정비소 문 닫으면 시스템 전체가 다운된 거야.”
“젠장, 골치 아파지네.”
“솔직히 나도 다음 수순을 몰라. 아니, 아무도 모른다는 게 맞겠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전에 딱 한 번 팀이 블랙아웃 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36시간 만에 벼룩시장에 광고가 올라왔어. 큰집에서 수습한 거지.”
“그때는 큰집이 멀쩡했다는 거네?”
“그래, 이번엔 큰집까지 블랙아웃이니까 매뉴얼에도 없는 셈이야. 말 그대로 잠적이다.”
“최악의 경우엔 집도 절도 없는 프리랜서라는 이야기로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일단 매뉴얼대로 진행하면 별명이 있을 때까지 정통 백수 노릇을 해야 되는데…… 난 체질상 그냥 노는 건 취미 없어.”
“미 투, 당했으면 갚아줘야지. 그래서 말인데 조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듣기만 하던 이민우가 얼른 상체를 일으켰다.
“예, 형님.”
“너도 같은 질문에 답을 해야겠다. 빠지려면 지금 빠져라. 당분간 잠수해서 치료에 전념하고 나중에 합류해라. 물론 우리가 살아 있을 경우에나 가능하겠지만.”
이민우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신의 발목을 가리켰다.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십니까? 그 새끼들 머리통에 총알 박아줘야 끝납니다. 그 전에는 술 한 모금도 입에 안댈 겁니다.”
“승산이 별로 없는 싸움이야. 그래도?”
“형님 대답이나 비슷합니다. 솔직히 아드레날린이 좋아서 선택한 직업입니다. 지루한 건 질색이거든요, 후후. 지루한 세상에 혼자 남으려고 친구들에게 등 돌리는 멍청한 짓 안 합니다.”
친구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낸 이민우는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도로 누워버렸다. 그는 고개만 끄덕이고 한희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희진이 경우는 애매한데…… 넌 지금 누나네 집으로 돌아가면 너도 위험하고 누나도 위험하다. 그래서…… 당분간은 조커를 도와주면서 함께 움직이는 방향으로 가자. 단,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안전이 확인되면 즉시 누나네 집으로 들어가라. 이건 의사를 묻는 게 아니야.”
한희진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말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지연이 귀찮다는 듯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쪽은 몇 놈이었어, 팩맨?”
“어…… 저격수 포함 넷이었는데 저격수 빼고는 전부 잡았어. M계열 저격소총을 사용했고 침입자 중 한 놈이 글록을 썼다. 조커 말대로 누구라도 가능해.”
“총질한 놈들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단서가 없는 셈이네.”
“아니, 단서는 있어. 건드렸으니까 반응이 왔겠지. 그게 단서야. 세르게이가 첫번째 후보, 장명신이 두번째, 홍인철이는 별 볼 일 없어.”
“홍인철에 대해서는 나도 같은 생각이야.”
“장명신은 세르게이 쪽을 범인으로 지목했어. 세르게이의 배후가 우리하고 전쟁을 치를 상대라고 주장했잖아. 희진이를 납치해달라고 의뢰한 작자들도 세르게이와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였고…… 객관적으로 봐도 박춘배까지 세르게이와 선이 닿아 있어서 확률은 높아.”
“세르게이보다는 그 배후가 답이겠지. 세르게이가 됐든 장명신이 됐든 단독으로는 이 정도의 대대적이고 정교한 공격을 실행에 옮길 수 없어. 막말로 큰집이 셧다운될 정도면 어느 쪽이든 정보기관이 개입됐을 거야.”
“변수가 하나 더 있어.”
“변수?”
“아니길 바라지만 ICC 내부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돼. 우리 안가와 큰집이 동시에 공격당했고 마법사의 안가까지 한꺼번에 공격당할 정도면 내부에 쥐새끼가 있어야 말이 돼.”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럴 이유가 있을까?”
“돈, 권력, 만고불변의 진리야. 누구냐가 문제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문제가 더 커지겠지.”
“무슨 소리야? 문제가 커지다니.”
“낮에 뉴스 좀 훑어봤어?”
“아니, 여력 없었어.”
“사람이 다섯이나 죽었는데 관련된 뉴스는 한 줄도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뭐?”
“결론은 간단해. 상대가 단시간 내에 현장을 정리하고 언론까지 신속하게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정보력과 정치력을 가진 기관이라는 뜻이겠지.”
오지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신경질적으로 말을 받았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야?”
“큰집이 우리 팀을 폐기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뭐?”
“생각해봐. 큰집 정도 규모의 조직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게 말이 돼?”
“자의로 셧다운에 들어갔다는 거냐?”
“물론 단언할 수는 없겠지. 그러나 우리가 높은 양반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 인간들이 정확한 포인트에 제대로 압력을 가했다면?”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오지연의 표정을 살폈다. 오지연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생각이 많을 터,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이민우의 얼굴을 차분하게 돌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큰집도 손을 놓는 수밖에 없어. 내 주장은 간단하다. 이제부터는 큰집도 아군이 아니라는 가정하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거야.”
“…….”
오지연이 아예 입을 다물어버려서 혼자 떠드는 느낌, 소리가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어차피 모든 걸 새로 준비해야 돼. 조커, 어제 건진 거 없었냐?”
이민우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이 너무 없었습니다. 다시 시작해야죠.”
“여기서도 할 수 있어?”
“금고 안에 있는 컴퓨터가 백업용입니다. 데이터는 전부 자동으로 백업되니까 당연히 가능하죠. 다만 몸도 시원치 않고 여기 시스템 스펙도 좀 떨어지니까 시간이 좀 걸리겠죠.”
“며칠은 무조건 잠수니까 쉬엄쉬엄 해도 돼.”
“옛썰.”
씩씩하게 대답하는 이민우를 건너다보면서 차승호는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