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은 싸움, 상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ICC에 압력을 가하는 것만으로 하부 조직을 폐기시켰거나 조직 전체를 공격해서 간단하게 와해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데 이쪽은 부상자를 포함해서 달랑 넷에 그나마도 하나는 고등학생이었다.
한 술 더 떠서 상대의 정체도 오리무중,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누가 봐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지만 이미 불붙어버린 승부욕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눈꼬리가 입술을 따라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후후, 뭐 좋아. 전부 새로 시작이네. 물으나 마나 한 이야기지만…… 마님, 그래도 할 거야?”
“내친걸음이야. 끝을 봐야지, 시작할까?”
“쉬운 거부터 하나씩, 우선 홍인철이 이놈, 이거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어? 혹시 경찰이나 검찰에 특진시켜줬으면 싶은 사람 있냐?”
“검찰이라면…… 개인적으로 안면 있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한데…….”
“누군데?”
“최정택이라고 작년에 비리 건으로 몇 번 부딪친 고참 평검산데 제법 독기가 있었어. 관련된 정보 몇 가지만 넘겨줬는데 비리 당사자로 지목된 행자부 차관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결국 옷 벗게 만들더라고. 당시 왕차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실세여서 우리도 손대기 부담스러웠던 작자였는데 정말 대차게 들이댔어. 그 사람 정도면 넘겨도 될 것 같다. 남부지검이라 관할도 맞고.”
“그럼 됐어. 그쪽에 조용히 넘겨주는 걸로 하자. 안 되면 그때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지.”
“좋아.”
“자료는 어떻게 넘겨줄래? 당장 내일 자료를 받는다고 해도 검사가 바로 손댄다는 보장이 없어. 그것들은 신속하게 검거 작업에 들어가게 해야 돼.”
“그건 맡겨둬. 사람 움직이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거든. 원하는 걸 원하는 자리에다 던지면 돼. 이참에 한 수 배워.”
“감사히 배워두지. 그럼 그건 맡기고…… 우리 일로 돌아오자고. 첫번째 제물 결정해야지?”
“바로 시작하자는 거야?”
“슬슬 가지치기하면서 반응을 보자는 거야. 손발 자르는 도중에 세르게이가 끌려 나오면 최선이겠지.”
“무턱대고 덤빌 일 아냐. 장비도 그렇고 지금은 부족한 게 너무 많다. 기존 거래선 쓸 수는 없으니 암시장에서 구입해야 되는데 자금이 턱없이 달려. 혼자 잠수 타는 거라면 몰라도 전쟁 치르려면 어림도 없어.”
“마법사 가방에 있는 게 대충 2,000에 금고는…… 한 4,000, 빡빡하긴 하네.”
“어림없는 거 알잖아. 이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우리가 지출해야 되는데 당장 쓸 차량하고 장비 몇 가지 구입하고 나면 남는 게 없어. 며칠 버티기도 어렵다.”
“줄여야지 어쩌겠냐.”
두 사람이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자 이민우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기…… 제안이 있는데요?”
“말해봐.”
“어제 불 지르기 직전에 본 건데…… 리명철이가 돈세탁 용도로 쓰던 계좌 중에 사망자 명의의 계좌가 있었습니다. 그거 빼 쓰면 안 될까요? 리명철은 체포됐으니까 장명신 그 여자 빼고는 아는 사람 없을 거고, 장명신이 그 계좌를 알려줬다는 건 그 돈 포기했다는 뜻 같은데 말입니다. 검찰에 넘겨줄 때 자료에서 요거만 날리면 되지 않을까요?”
“응? 얼마나 되는데?”
두 사람의 얼굴에 아연 활기가 돌았다. 도둑질하는 느낌이라 찝찝하지만 범죄에 이용되던 주인 없는 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더하기는 안 해봤는데 합치면 4억 좀 넘을 거 같던데요?”
“그 정도면 아쉬운 대로 몇 달 버틸 수는 있겠네. 나머지는 가면서 생각해보자. 멍멍이 발자국 없이 빼낼 수 있지?”
이민우는 히죽 웃으면서 허벅지 위에서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보였다.
“손가락 멀쩡합니다. 죽은 사람이 나타나서 은행에 클레임 걸지 않는 한 아무도 모를 겁니다. 옮겨놓을 계좌만 결정하십쇼.”
오지연은 재빨리 메모지에다 계좌번호 하나를 써서 이민우에게 넘겼다.
“나만 아는 계좌야, 차명. 최대한 빨리 현금화하자.”
“오전 중에 해결 보죠. 쪼개서 다른 차명 계좌로 몇 바퀴 돌리겠습니다.”
“오케이, 그걸로 급한 불은 껐고…… 이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문제인데…….”
오지연은 말끝을 흐렸다. 생각이 많다는 뜻, 그는 가장 먼저 생각나는 앙숙의 이름을 먼저 리스트에 올렸다.
“첫 손님은 박춘배 어때?”
“아니, 그 인간 명색이 경찰 간부잖아. 준비 기간이 좀 필요할 거 같다. 자진해서 불속으로 뛰어들게 해야 돼.”
“그럼 희진이 납치했던 사채업자부터 두들기든지. 만만하기도 하고…… 그쪽에서 세르게이를 끌어낼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으니까.”
나름 한희진의 사정을 염두에 둔 제안, 그러나 오지연은 매섭게 기대를 끊어버렸다.
“사채업자 따위 데리고 장난칠 기분 아냐. 그건 나중에 시간 날 때 혼자 해.”
“헐, 좀 심한데?”
“꼬마한텐 미안하지만 지금 누구 사정 봐줄 형편이 아니다. 손발 맞춰보는 현장 실습 정도라면 몰라도 그쪽에 시간 할애하는 건 낭비야.”
“어이, 마님.”
그는 오지연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대며 말을 잘랐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둔 뒤 말을 이었다.
그간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하나만 분명히 하자. 솔직히 어떤 놈을 먼저 치든 그건 문제가 아니야. 합리적이라면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달라. 저 꼬마, 지금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우리 편이 되어줄 ‘우리 중 하나’다. 싫든 좋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간다. 기억해라.”
속사포처럼 할 말을 쏟아낸 그는 굳어버린 오지연의 어깨를 쿡 짚고 일어서서 길게 기지개를 켰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후유증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었다.
***
2차를 외치는 수사관들을 어렵게 떼어낸 최정택은 많이 취한 여직원을 먼저 태워 보내고 다시 택시를 잡기 위해 보도 아래로 내려섰다.
그러나 아무리 더블을 외쳐도 택시들은 매정하게 그의 앞을 지나쳤다.
자정이 살짝 넘은 시간이어서 택시를 타려는 사람들은 많고 택시의 절대 수는 적어서 장거리를 원하는 택시기사와 취객 간의 끝없는 눈치 싸움만 계속되는 형편이었다.
“승차거부 단속 강화하라고 지랄을 하든지 해야지, 원, 몬살긋네.”
포기하고 좀 걸을까 싶어 발길을 돌리려는데 헤드램프 한 쌍이 과감하게 차선을 변경하면서 코앞에 멈춰 섰다.
놀라 한 걸음 물러서자 조수석 창문이 주욱 내려가면서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검사님.”
얼핏 보기에도 대단한 미인인데 새카만 미니스커트 아래로 뻗어 나온 늘씬한 다리 때문에 눈을 둘 데가 마땅치 않았다.
덕분에 얼굴 주인의 이름도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아는 분인가요?”
“어머? 섭섭한데요?”
“미안합니다. 이런 미인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그는 말을 얼버무리면서 앞 유리창에 붙인 출입증을 확인했다.
차량 내부가 어딘지 익숙했던 것, 콘솔박스에 놓인 껌 통도 그렇고 주유 영수증까지 확실히 낯이 익었다.
역시나 유리창에는 남부지검 출입증이 붙어 있었다. 회식 때문에 검찰청 주차장에다 두고 온 자신의 차를 애먼 여자가 끌고 나온 셈이었다.
저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이거 무슨 짓입니까?”
그러나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짓을 했다.
“일단 타세요. 댁에 모셔다드릴게요.”
“뭐요?”
“음주운전 하실 수는 없잖아요. 어서요.”
최정택은 뒷자리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수석으로 올라탔다. 적잖이 신경이 쓰였지만 자신의 차를 남이 끌고 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여자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끝을 밝게 끌어올렸다.
“안전벨트 매시죠. 댁이 어디시더라…… 아! 대림동이었죠?”
최정택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핸들을 트는 여자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기억이 날 것도 같은 얼굴, 분명히 아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름이 생각났다.
“손……혜지 씨?”
여자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기억 속의 여자는 만남부터 마지막 통화까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매서운 아이라인과 지독하게 섹시한 입술도 여전히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
“이제 생각나셨나 보네요. 저 상처받을 뻔했어요, 호호.”
그는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에 안전벨트를 맸다.
신분 자체가 의문스러운 여자지만 우호적인 정보를 제공했던 사람이니 최소한 해코지는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대꾸는 퉁명스럽게 나갔다.
“내 차는 왜 빼 온 거요?”
“내일 출근하시려면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차 가져가시면 편하시지 않겠어요?”
“별로 편할 거 같지 않군요.”
“미안해요. 호호.”
“용건이나 말하쇼. 집은 금방이니까.”
“급하기도 하셔라. 오랜만의 재회인데 안부라도 먼저 물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가 그런 거 챙길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섭섭해라. 저 진짜 상처받았어요. 흑흑.”
여자는 장난스럽게 우는 시늉을 했다. 짜증스러웠다.
“본론이나 들읍시다.”
“본론이 뭐더라…… 아, 맞다. 그 관할 경찰서 간부들하고 관계는 아직도 별로신가요? 지난달에도 형사과장하고 한바탕하신 것 같던데…….”
그는 대답을 삼켜버렸다. 사실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날이 갈수록 검사 짓 해먹기도 점점 더 힘들어져서 성질 같아서는 확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새 정부 들어서면서 검찰에 힘이 보태지나 싶었는데 윗동네 영감태기들의 지독한 뻘 짓 때문에 국민의 신뢰는 바닥을 쳐버렸고 때마침 수사 지휘권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이젠 직할서 형사들까지 대놓고 반기를 드는 형편이었다.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여자가 그를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이런, 아직도 별로시군요. 호호. 그럼 제가 재미있는 정보 하나 드릴까요?”
“나 짤리는 거 보고 싶은 거요? 안 그래도 지난번 그 돼지 일 때문에 윗대가리 눈 밖에 났는데 또 그 짓을 하라고? 절대, 네버, 사양합니다.”
“에이, 저도 양심이 있지 또 그러기야 하겠어요? 이번엔 검사님께 제법 도움이 될 사안입니다. 호호, 잘하면 윗분들에게 칭찬도 듣게 될 거예요.”
“됐습니다.”
“그리고…… 그 싸가지 없는 관할서 서장, 형사과장 둘 다 발가벗겨 빵에다 처넣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웃기고 있군. 당신들이 뭐 하는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대한민국 경찰 간부를 멋대로 날려버리는 건 어려울 거요. 검찰이 당신들 심부름꾼은 아닙니다.”
“설마요.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전 그냥 그 인간들이 다시는 덤벼들지 못하도록 그 인간들이 연루된 뇌물 수수의 증거 일체를 챙겨드리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도로를 노려보다가 창문 쪽으로 머리를 기댔다.
관할서 경찰관들의 비리 문제가 어제오늘 일도 아니니 완전히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닐 터, 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여자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뭐, 일단 들어봅시다.”
“맨입은 곤란하고…… 조건이 하나 있어요.”
“조건?”
“경찰 쪽을 처리하는 시점은 검사님 마음이에요. 두고두고 손발 부리듯이 부려먹으시려면 그냥 놔두시는 쪽을 택하셔도 됩니다. 다만 관련 범죄 조직은 1주일 이내에 검거한다는 약속을 하세요. 신상 정보를 비롯해서 범죄 사실 입증을 위한 증거자료는 충분하니까 그냥 병력만 동원해서 검거만 하시면 됩니다.”
“젠장, 이거 봐요. 손혜지 씨, 검사가 드라마에 나오는 작자들처럼 여자한테 꽃이나 들고 다니는 한가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겉보기엔 화려해 보여도 평검사는 3D 직종 중 하나란 말이오. 당장 내 사무실 캐비닛 속에 펜딩되어 있는 사건만 수십 건이 넘을 거요. 당신들 뒤꽁무니 따라다니며 청소까지 떠맡으라고? 웃기지 마쇼.”
“아고…… 검사님, 절 너무 띄엄띄엄 보시는 거 아닙니까? 후후. 아마 모르긴 몰라도…… 상황이 검사님을 편하게 놔두지는 않을 겁니다. 오늘 검사님을 찾아뵌 건 ‘미리 준비하시라는 제 애틋한 배려’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이건 명백하게 국민을 위한 일입니다. 특히 영등포 지역의 치안 상황을 개선하는 데 획기적인 도움이 될 거고요. 궁극적으로 검사님 일도 많이 줄어들게 될 겁니다.”
“일단 들어봅시다. 시간 되면 처리하지.”
“순리에 따르시라니까요. 후후. 글로브박스 열어보세요.”
그는 대답을 생략하고 글로브박스를 열었다. 안에는 외장형 하드디스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자가 다시 말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 석간쯤 될 건데…… 주요 일간지에 차이나타운 주변의 외국인 범죄 조직에 대한 기사가 뜰 겁니다. 거금 투자해서 손쓴 거니까 기사는 무조건 나올 거고…… 그러면 위에서는 당장 소탕하라고 불호령이 내려오겠죠?”
“제기랄, 또 시답지 않은 장난치는 거요?”
“장난이라니요. 필요에 의한 선빵입니다, 호호.”
“하여간 당신들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야.”
“일단 기사가 나가면 상당수가 잠수하게 될 거니까 미리 미행이라도 붙여놓았다가 검거에 들어가세요. 손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대상은 누구요?”
“흑사회, 그리고 거기 붙어먹던 경찰 간부들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뇌물 받아 처먹은 경찰간부들은 검사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셔도 돼요. 제가 바라는 건 구로동 차이나타운, 인천, 안산 등지에서 활동하는 흑사회 주력을 대한민국 사회에서 제거해달라는 겁니다. 괜찮은 제안이죠?”
“어이구, 미치겠네.”
뒷목을 잡고 오만상을 구기는 사이 차는 벌써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주차장은 꽉 차 있어서 차를 대려면 가로 주차밖에 도리가 없었다. 여자는 아파트 중앙 현관 바로 앞에다 가로 주차를 하면서 다시 웃었다.
“대답은 주셔야죠? 예스 오어 노.”
“대답이 필요 없잖소? 그냥 ‘이거 네가 해’ 하는 게 솔직하지 않아요?”
여자는 시동을 끈 다음 차 키를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배시시 웃었다.
“다음에 또 뵐게요. 즐거운 하루 보네세요.”
“또 보지 맙시다, 젠장.”
“호호, 안녕히 주무세요.”
그가 시종일관 성질을 내는데도 여자는 차에서 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웃으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하드디스크를 든 채, 어둠 속에다 마구잡이로 욕설을 날려버렸다.
안 그래도 정신 못 차리게 바쁜데 저 빌어먹을 여자 때문에 큼직한 파일 수십 개가 더 쌓일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