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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
작가 : 유호
작품등록일 : 2016.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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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화
작성일 : 16-07-18     조회 : 683     추천 : 0     분량 : 8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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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길수가 눈을 뜬 건 누군가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소리 때문이었다.

 급히 좌우를 둘러봤지만 앞은 보이지 않았다. 손발 역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움직일 때마다 지독한 통증이 팔다리로 몰려왔다.

 앳된 여자의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자식 얼굴 꼭 보고 싶었어.”

 그는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황당하게도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 같았다. 정황상 회사에 원한이 있는 아이일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라면 원한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점, 경쟁 업체들까지 고려하면 누군지 예상을 해보는 것조차 어려웠다.

 “나가 있는 게 좋을 거다. 지금부턴 미성년자 관람 불가야.”

 “나, 봐야 돼요.”

 “놔둬, 꼬마도 볼 권리 있다.”

 다른 여자의 목소리, 흐릿한 대화가 잠시 이어지더니 발소리가 다가왔다.

 “깼으면 깼다고 이야기를 해야지, 영감탱이.”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눈을 가린 천이 풀려나갔다. 그는 눈을 껌뻑이면서 급히 주변을 살폈다.

 손발은 의자에 철사로 묶여 있었고 주변은 지독하게 어두웠다.

 한쪽으로 낡은 의자와 책상이 쌓인 것으로 보아 지방의 폐교인 것 같았다. 바로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이태형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팔다리가 묶였고 지독하게 갈라진 목소리였다. 자신과 다른 건 아직 눈이 가려져 있다는 것뿐이었다.

 정길수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사내에게 돌렸다. 안경이 없어 흐릿했지만 처음 보는 작자라는 점만은 확실했다.

 “너 누구야?”

 사내는 씩 웃었다.

 “질문은 내가 해. 넌 대답하고. 알아들었나?”

 “돈을 원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누가 고용했는지는 몰라도 내가 두 배 내지. 아니, 평생 먹고살 수 있을 만큼 주겠다.”

 “관심 없어. 네가 들고 있던 가방만 해도 평생 먹고살겠더군.”

 “젠장, 누가 고용한 거냐? 얼마를 원하…… 컥!”

 사내는 느닷없이 철걱 소리가 나도록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가 입을 다물자 사내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질문은 내가 한다.”

 “겁대가리 상실한 놈이로군. 넌 이제 죽은 목숨이야.”

 퍽!

 “크억!”

 이번엔 명치에 정통으로 주먹이 내리꽂혔다. 숨이 턱 막혀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질문은 내가 한다.”

 “끄으…… 내가 왜 대답을 해야 하지? 얼굴을 보여준 건 날 죽이겠다는 뜻 아닌가?”

 “정신 빠진 놈, 여기 어떻게 끌려왔는지부터 한번 생각해봐.”

 “뭐?”

 “대낮에 마취총을 쓸 수 있는 기관이 한국에 몇 개나 있다고 생각하나?”

 “마……취총?”

 “너 같은 쓰레기 하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파묻어버릴 수 있다. 알아들어?”

 정길수는 심장이 툭 떨어지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이태형을 비롯해 한주먹 하는 거구 셋이 끽소리도 못하고 나자빠졌고 눈을 뜬 장소는 외딴 폐교였다.

 고만고만한 주먹패들이 아니라는 뜻, 이건 말로만 듣던 국정원 같은 비밀 수사기관이었다.

 ‘그런데 왜?’

 국정원이 하잘것없는 사채업자에게 괜히 손을 대지는 않을 터, 그가 최근 추진한 일 중에 뭔가가 국정원 높은 양반들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 험악한 상황을 벗어나려면 그게 뭔지를 알아내는 게 순서였다. 그러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생각할 시간을 너무 많이 줬다는 생각인지 다시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턱이었다.

 그리고 무언가 입에서 튀어나가 마룻바닥을 굴렀다. 사내가 다시 말했다.

 “질문은 내가 한다.”

 그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 주먹이 날고 턱이 픽 돌아갔다.

 “대답.”

 그는 어렵게 ‘예’ 소리를 꺼내다 끄르륵하며 입에 담긴 피를 흘렸다. 이빨 하나가 같이 흘러내렸다.

 사내가 예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대경정밀에 손을 댔지?”

 “돈을 갚지 않아서 대신 회사를 압수한 것뿐입니다. 이 바닥에선 당……연한 겁니다.”

 어렵게 존댓말을 꺼냈는데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주먹이 날았다. 턱이 반대로 돌아갔다.

 “거짓말은 대가가 따른다. 다시 묻겠다. 왜 대경정밀이지? 이유.”

 “흐으…… 이유…… 같은 거 없습니다. 양 회장이 물어다 준 건수입니다.”

 “양승욱이 주범이라 이거지.”

 정길수는 다시 한 번 놀라 사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양 회장이라는 말에 양승욱의 이름이 곧장 튀어나왔다는 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의미, 여기서 대충 둘러대다간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아는 걸 토해놓기 시작했다.

 “그 영감이 돈 달리는 회사 소개했고 전 그냥 시…… 시키는 대로 돈 빌려주고 갚지 않아서 압수한 겁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 집 딸은 왜 납치했지? 회사 뺏은 걸로 목적은 달성했잖아.”

 “그것도 양 회장이 원해서 한 겁니다. 그 빌어먹을 영감이 원했습니다.”

 “납치도 양승욱이 사주했다는 거냐?”

 “정말입니다. 중국으로 밀입국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전 원하는 대로 해준 거…… 것뿐입니다.”

 “그래서 흑사회에 선을 댔다?”

 “예…… 예, 제가 아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중국에 데려가서는 뭘 할 생각이었지?”

 “그…… 그건…… 전력 품질이 안정된 지역에서 위생적인 장소를 찾아달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전 말만 전달했습니다.”

 “장기를 적출할 깨끗한 장소가 필요했겠군. 뭐 좋아. 그런데 말이야. 왜 꼭 한 사장 딸이어야 했지? 그냥 장기 적출해서 파는 거라면 별도의 장소는 필요 없잖아. 암시장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면 그만이니까.”

 “더……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정길수 자신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이야기,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사내가 다시 말했다.

 “넌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거고 진짜 나쁜 놈은 양승욱이다?”

 “그…… 그게 사실입니다.”

 “넌 한 가족을 모조리 사지로 몰아넣었어. 마지막에는 사람을 장기 매매하는 작자들에게 팔아먹기까지 했지. 그런데 나쁜 놈 아니다?”

 “자……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쇼.”

 “말 섞기도 짜증나는군. 네 치부책을 보면 죽이는 거 가지고도 모자라.”

 ‘제기랄! 출납부!’

 재수가 옴 붙었는지 편안하게 집에서 정리할 생각으로 들고 나온 장부가 가방에 들어가 있었다.

 일부가 자신만 아는 기호로 작성되긴 했지만 프로들에게는 애들 장난으로 보였을 터, 이젠 정말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는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사…… 살려만 주시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내는 말없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구나 보통 경찰들이 사용하는 리볼버가 아니라 탄창이 있는 군용 권총이었다.

 “서…… 선생님! 살려주십쇼.”

 있는 힘을 모두 짜내 소리를 질렀지만 사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슬라이드를 당겼다 놓으면서 음울한 목소리를 냈다.

 “꼬마.”

 가벼운 발소리가 나고 앳된 여자아이의 얼굴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꼭 그래야겠니?”

 “네.”

 고개를 끄덕인 사내는 총구에 소음기까지 끼운 다음, 총을 여자의 손에 쥐어줬다.

 “이마에 한 방, 그거면 끝이다. 단,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라. 사람을 죽였다는 트라우마는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거다.”

 “고마워요, 아저씨.”

 권총을 받아 든 여자는 몇 발 더 다가와 그를 조준한 채 부르르 손을 떨었다.

 흐릿한 시야에도 떨리는 총구가 확연히 보일 정도로 심했다. 정말 쏘려고 한다는 생각에 길길이 악을 썼다.

 “자…… 잠깐! 잘못했다! 살려만 다오. 난 정말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어. 진짜는 양 회장이야, 제발, 제발 살려줘!”

 여자는 그를 조준한 채 한참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나직한 총성이 터졌다. 그리고 지독한 통증이 무릎을 파고들었다.

 “으악!”

 펄쩍 뛰는 서슬에 의자가 쓰러지면서 철사가 파고들어간 팔목에서 핏줄기가 솟았다.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니네들이 왔다 가면 아빠는 밤새도록 미안하다는 말만 했어. 엄마는…… 엄마는 그때부터 말을 잃어버렸어. 그리고 어느 날 목을 매셨지. 내가 친구네 집에서 노닥거리는 동안.”

 한겨울 허허벌판에서 맞는 매서운 밤바람 같은 소리, 서릿발 날리는 소리였다.

 “난 발가벗겨진 채 묶여 있었어. 차갑고 캄캄한 방에서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무서워서 치를 떨었어. 차라리 죽어서 이 지겨운 공포에서 벗어났으면…… 그랬어. 넌 그런 내 몸을 쓰다듬으면서 징그럽게 웃었지. 그 웃음, 목소리,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해.”

 퍽!

 반대쪽 무릎에서 피가 솟구쳤다. 눈앞의 물건들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손발이 격렬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눈을 감았지만 더 이상의 총격은 없었다. 아주 멀리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편히 죽는 호사 누리게 할 필요 없다.”

 차승호는 느릿하게 한희진의 손에 들린 권총 총신을 덮어 끌어내렸다. 한희진은 미동도 없이 울고 있었다.

 만감이 교차할 터, 그는 한희진의 머리를 끌어당겨 가볍게 안으면서 눈을 까뒤집고 떠는 정길수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목 졸린 채무자들이 전화기가 울릴 때마다,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느꼈을 공포와 무력감이 그런 걸 거다. 그분들에게 사죄하면서 떠나라.”

 출혈이 상당히 심해서 오랜 시간을 버티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는 한희진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 다음, 쇼크로 부들부들 몸을 떠는 정길수를 돌아 이태형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이태형은 소문난 독종답게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눈을 가린 천을 풀자마자 그의 얼굴이라도 기억하겠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독기는 확실히 살아 있었다. 그가 이태형의 전화기를 꺼내며 말했다.

 “넌 할 일이 있어.”

 “죽여라.”

 “월급도 못 줄 텐데 동네방네 풀어놓은 아이들 불러들여야지.”

 “건방진 놈, 넌 누굴 건드렸는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어. 공무원인 모양인데 너는 몰라도 저년에 대해서는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어. 저년은 죽을 거야.”

 “허황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네가 먼저 죽을 거니까.”

 “내가 안 되면 다른 사람이 하겠지.”

 “글쎄, 그게 그렇게 될까? 영감 치부책 경찰에 넘겨줄 건데…… 아마 그날로 다들 튀느라 정신없을 걸? 차라리 기회 줄 때 전화해서 미리 잠수 타라고 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태형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저년도 데려가야겠어.”

 “뭐, 능력껏 해봐. 상관없으니까. 후후.”

 씩 웃은 그는 뒤로 돌아가 왼손으로 뒷목을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턱을 잡으면서 귓전에다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옥에서 보게 돼도 알은척하진 말자, 기억해.”

 잔뜩 힘을 준 팔뚝에서 배어 나오는 피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턱을 픽 돌려버렸다.

 빠직.

 경추 부러지는 소리가 텅 빈 교실을 기묘하게 울렸다. 그는 손을 툭툭 털고 일어서서 교실 뒤에 처박아둔 나머지 두 놈에게 다가갔다.

 이미 사색이 된 두 놈은 말을 걸고 자시고 하기도 전에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기도하듯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너희는 그냥 음지에 있어야 했어. 음지에 속한 자가 양지로 나와 양지에 속한 사람들을 건드리면 끝이 이렇게 되는 거야.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그는 양손으로 둘의 경동맥을 잡고 지그시 압박을 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면서 사지가 축 늘어졌다.

 이제 남은 건 노가다 시간, 우선 이태형을 의자에서 떼어내 똘마니들 옆에 내려놓고 돌아와 정길수의 목에 손을 댔다.

 미약하지만 호흡은 아직 남아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한희진을 힐끗 돌아본 뒤 오지연을 불렀다.

 오지연은 지갑, 전화 같은 신분이 확인될 만한 물건들을 모으고 있었다.

 “마님, 수거 끝나면 꼬마 데리고 먼저 내려가라. 여긴 내가 마무리할게.”

 “괜찮겠어?”

 “금방 끝나.”

 “알았다. 먼저 간다.”

 수거를 끝낸 오지연이 한희진을 데리고 나간 뒤, 그는 정길수를 의자에서 떼어내 바닥에 깔아놓은 비닐로 싸서 창 아래 붙여놓은 리어카에 던졌다.

 나머지 셋도 하나씩 밖으로 던진 다음 창을 뛰어넘어 리어카를 끌고 학교 쓰레기장으로 건너갔다.

 완전히 어두워진 데다 바닥이 불규칙해서 100미터 남짓한 거리를 가는 데 10분이 넘게 걸린 것 같았다.

 쓰레기 더미 안쪽에 파놓은 구덩이에 도착해 하나씩 시체를 던지고 마지막으로 정길수를 던졌다.

 그런데 정길수가 끙 소리를 냈다. 그 많은 출혈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 있다는 뜻, 확실히 바퀴벌레 같은 지독한 생명력이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이러면 마지막 숨을 끊는 건 모두 그의 몫이 된 셈이었다.

 ‘어쩌면 이게 나을지도 모르지, 후후.’

 먼저 시체들에다 휘발유 한 통을 다 뿌리고 주변에 있는 낙엽과 부서진 책걸상으로 꼼꼼하게 덮었다.

 이어 그 위에다 다시 휘발유를 충분히 뿌린 다음, 마지막 휘발유 통에다 3분짜리 시한장치를 붙이고 쓰레기장을 나섰다.

 생각 같아서는 멋지게 라이터를 던지면서 돌아서고 싶지만 그건 영화에서나 화면발을 위해 하는 짓이었다.

 현실에서는 불길이 치솟기 전에 신속하게 현장을 빠져나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다.

 어차피 마무리는 바짝 마른 낙엽과 책걸상들이 해줄 터, 멀지 않은 거리에 마을이 있지만 쓰레기장의 불은 한동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은 내려올 때보다 훨씬 더 고역이었다. 1시간 남짓 남쪽으로 우회해서 앰뷸런스와 함께 입었던 옷가지들을 한꺼번에 태울 때까지만 해도 다들 상기된 표정이었는데 서울로 출발한 이후부터는 모두들 입을 굳게 다문 채, 무표정하게 도로만 주시하고 있었다.

 사실 폭주하던 아드레날린이 멈추고 살인의 개운치 않은 뒷맛을 곱씹다 보면 기분은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한희진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나이에 비해 험한 일을 많이 겪었고 강단도 있는 아이지만 살인은 영혼에 상처를 입힐 만큼 심각한 문제였다.

 어색한 침묵이 한없이 흐르자 참다못한 차승호가 발밑에서 정길수의 가방을 꺼내 열면서 한희진에게 말을 붙였다.

 “아직 끝난 거 아니다. 이제 겨우 시작했잖아. 여기서 정신 안 차리면 거꾸로 우리가 죽어.”

 “네.”

 역시나 한희진의 대답은 단답형 한마디로 끝이었다. 그는 쓰게 웃으면서 가방을 뒷자리로 넘겼다.

 “무기명 채권이 대략 60억 정도 되고 현금은 4억 정도 된다. 전부 네 돈이야. 어떻게 쓸지 생각해봐라. 채권은 다음 주쯤해서 현금화하고…… 5억짜리 어음이 한 장 있는데 이건 그냥 버려야 할 것 같다.”

 한희진은 가방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도로 그에게 밀어냈다.

 “아직 안 끝났잖아요. 그때까지 써야죠. 그리고…… 이거 공동으로 써야 하는 돈이에요. 사실 언니하고 아저씨 몫이 더 많을 거 같아요.”

 “야, 쟤는 언니고 난 아저씨냐? 우리 동갑이야, 인마.”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키워 너스레를 떨어봤지만 겨우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분위기는 조금 나아졌고 그가 다시 구시렁거리자 오지연이 오디오 볼륨을 줄이면서 농담을 던졌다.

 “니가 늙어 보여서 그래. 이 언니는 진짜 언니 같잖아, 안 그래?”

 급기야 한희진이 킥 하며 따라 웃었다.

 “맞아요. 아저씨 확실히 늙어 보여. 담배 피워서 그런지 홀아비 냄새도 풀풀 나고요.”

 “젠장, 담배를 끊든지 해야지 원.”

 “저기……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그 돈 공동으로 쓰는 대신에 말이에요. 저 파트너로 인정해주세요.”

 “파트너?”

 “1/4 지분 가진 파트너, 어차피 우리 공범 된 거잖아요.”

 “공……범?”

 “나 입 다물게 하려면 꼭 필요할 거 같은데요? 파, 트, 너.”

 한희진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파트너’라는 세 음절을 또박또박 입에 담았다.

 “얼씨구?”

 “싫어요?”

 차승호는 황당한 표정으로 한희진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곧바로 무덤에 들어앉을 것 같은 풀 죽은 얼굴로 앉아 있더니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은 지금은 당당하게 파트너로 인정해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확실히 여우는 여우였다. 그가 피식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뭐 나쁠 거 없겠지. 단, 나 말고 두 사람의 동의도 있어야…….”

 당연히 오지연이 반대하리라는 생각, 그러나 그의 기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깨져버렸다.

 “나는 찬성이야.”

 “뭐?”

 오지연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셈, 그가 말을 더듬자 한희진이 그의 어깨 너머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조커 오빠는 벌써 오케이했어요. 그러니까 전부 동의한 거예요. 파, 트, 너.”

 “젠장, 나 빼고 작당이라도 한 거야 뭐야.”

 그의 불만스러운 반문에 오지연이 다시 끼어들었다.

 “지금은 옆집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야. 그만하면 재능도 있고 강단도 있더라. 가르치면 웬만한 군바리보다 나을 거다. 키워봐.”

 “그…… 그런…….”

 엉겁결에 손을 맞잡자 한희진이 생글생글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 파트너로서 첫번째 요구입니다. 훈련시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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