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잘못했습니다. 살려... 살려주십쇼”
이 일도 벌써 세 번째. 카샤와 이나드는 마을을 급습하다시피 들쑤셔 놓곤 반항하는 자들은 이나드가 뚜샤뚜샤 때려잡은 뒤 악의 축인 촌장을 그녀가 마무리 하는 것으로, 간단하다면 간단한 작업이다. 카샤가 촌장의 목에 목걸이를 걸자 본능적으로 겁에 질려 도망치려고 했지만 구속된 그가 할 수 있는 건 발버둥 치는 것이 다였다.
“내가... 내가 뭘 잘못 했습니까 도대체!”
비명을 지르듯 촌장은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카샤는 냉정하게 행동했다.
“으아... 으아아아”
빛과 비명과 함께 촌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걸로 끝. 가자 이나드”
“......”
“이나드?”
“아. 예. 뭐라고 했어요?”
“가자고”
“예. 가야죠”
이나드의 그 모습에 카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에 무슨 말을 하려했지만
“다음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샤는 그 모습을 보고 걱정을 털며 가볍게 웃었다.
“걱정 마 이제 데이러스로 돌아가면...”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낮게 날아오고 있는 하얀 새 한 마리. 그 새는 날렵하게 선회하곤 그녀에게로 날아들었다. 새를 향해 손짓을 하자 새는 그녀의 손에 능숙하게 안착했다. 특이한 점은 새의 발에 뭔가가 묶여있다는 점, 그리고 은은하게 성력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뭡니까 그 새는”
“전서구”
“그...”
“멀리 떨어진 사람들끼리 쪽지를 주고 받는, 그런 용도의 새야”
“...그렇군요”
“모를 거 같았어”
이제는 화도 내지 않고 순순히 설명해줬다. 화를 내거나 구박하지 않으니 좋긴 하지만 기대를 버림받은 느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이나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손 만으로 새의 발목에 묶여있던 종이를 풀곤 모이를 주고 있었다.
“로빈이라고 해 귀엽지?”
“뾰롱”
어느 새 모이를 다 먹은 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청아한 울음소리를 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키운 애다 보니 머리도 좋고, 작은 애지만 성력으로 인해 맹금류들에게 사냥당하지도 않아”
그렇게 말하며 카샤가 부드럽게 쓰다듬자 로빈은 기분이 좋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만져봐도 되나요?”
“될... 걸?”
로빈의 깃털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쓰다듬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응해줬다.
“거... 거부하지 않네요”
“그렇네”
이어서 손을 내밀자 로빈은 그 손으로 옮겨 앉았고 이나드는 낮은 환희를 질렀다.
“원래 동물한테 손 내밀면 도망치길래 동물들이 절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그렇네”
“오히려 덩치가 제일 큰 해리한테 동물들이 따라서 부러웠거든요”
“그렇네
이나드는 옆에서 ‘칫’하며 혀를 차는 소릴 들은 것 같지만 기분 탓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평소라면 그런 것도 깊게 생각할테지만 기분이 High해진 이나드는 사소한 건 간단히 넘어갔다. 그런 이나드를 내버려 두고 카샤는 쪽지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읽는 내내 표정변화가 없던 그녀는 쪽지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그만.”
그렇게 말하며 카샤는 로빈을 건내 받았다. 이나드는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 돌아가렴”
그 말과 함께 하늘로 놓아주자, 로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상쾌한 비행을 하며 날아갔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는 거죠”
“음... 다행히 먼 곳은 아냐. 그러니까...”
이나드는 카샤의 말에 정신을 기울였다.
“저녁 전에는 도착 할 거야”
현재의 시간은 해가 중천에 뜨지도 않은 이른 점심. 부지런히 걸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부정도 긍정의 표현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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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말대로 정확히 노을이 지기 전 즈음이 되자, 마을 하나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좀 더 가까이 가자 여태까지 봐왔던 마을과는 달리 규모가 커 보이고, 돌로 세워진 낮은 성벽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다 경비병이 보였다. 그 모습에 카샤는 잠시 긴장했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경비병은 하품을 쩍쩍 하며 둘을 슬쩍 볼 뿐, 별다른 제제는 없었다. 그렇게 입구의 경비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서자 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다.
“호~”
이전에 들렀던 마을보다 훨씬 번창한 곳이었다. 마을보다는 도시에 가까울 것 같은 느낌의 아니, 도시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나드로서는 마을인지 도시인지 비교할 대상이 없었지만 본능 같은 것으로 도시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괜찮은 아니, 좋은 도시인데요”
“좋은 도시라는 건 외관만으로 판단하는 게 아냐 멍청아. 사람들의 표정과 도시에서 느껴지는 공기 같은 것들로 판단하는 거라고”
“...죄송합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진지한 그녀의 말에 사과를 했다. 그리고 이나드는 그녀의 충고대로 건물의 풍경이 아닌 사람의 풍경을 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좋은... 데요?”
“...그러네”
사람들은 생기가 있었고 아이들에겐 활기가 있었다. 삶에 지친 듯한 어두운 면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것들을 다 합쳐서 판단하더라도 결코 이 도시가 나쁘단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카샤를 불편하게 했다.
“......”
“......미안”
“아뇨... 뭘...”
그녀가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자 이나드는 그 사과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
“......”
다시 한 동안의 침묵이 흐르자 이나드가 그 흐름을 깼다.
“이번에도 바로 가는 겁니까”
“아니 내일 가도록 하자”
“오오오”
그 소리에 이나드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게 그 동안 노숙으로 점칠 된 생활이었던지라 침대와 지붕이 그리웠던 차였고 그의 행색은 빛의 길을 걷는 자인지 밤을 걷는 자인지 알 수 없었다. 카샤는 그보다 훨씬 낫지만 처음에 비해서 흐트러진 옷매무새는 감출 수 없었다. 거침없이 걸어가던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면서 걸었다. 하지만 곧이어 여행자의 쉼터라는 이름의 여관에 도착하게 되었다.
“오~ 여행자의 쉼터! 이름 멋있지 않아요?”
“내가 저거랑 똑같은 이름을 몇 개 봤는데...”
그녀는 그렇게 질린다는 듯이 말하며 여관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시죠”
들어가자 덩치 좋은 아저씨가 퉁명하게 맞이했다. 1층은 술집 겸 식당을 하고 2층은 여관을 하는 전형적인 곳이었고 아직 시간이 이른지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카샤는 적당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곤 주인아저씨에게 주문을 했다.
“우유 한 잔 부탁드립니다.”
이나드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우유라니... 너무 잘 어울리잖아’
하지만 관록있는 주인은 얼굴근육에 경직이 있을 뿐 손님을 비웃는 추태를 범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웃음을 참느라 이나드는 아무것도 주문하지 못한 것에 아쉬워 했다.
“여깄습니다.”
잠시 후 주인은 나무잔에 담긴 우유를 쟁반에 담아 가지고 왔다. 이나드가 의아하게 생각할 때 카샤는 나무잔을 들며 밑에 깔린 종이를 집어 들었다.
“조용히 가만히 있어”
이나드가 뭐라 하기 전에 카샤가 먼저 이나드의 입을 다물게 했다. 카샤는 우유를 마시며 종이를 차분히 읽었고 이나드는 그 모습을 보다가 가게를 둘러보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종이에 쓰인 내용은 어떤 것에 대한 것일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된 결론은
“이 곳은 뭐가 문제입니까”
“영주”
뜬금없이 날카로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지만, 생각을 하면 나오는 결론이라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그 후에 나오는 말에 다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여태까지와 같네요”
이나드에겐 영주나 촌장이나, 마을을 다스리는 자에서 도시를 다스리는 자로 격상한 것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없었다.
“정말 편하게 생각하네”
그 말을 듣고 카샤가 생각한 것도 방금의 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나드”
“예”
“방 예약하고 와”
“네?”
“저 아저씨한테 후불로 하곤 방 달라고 하면 돼”
아주 기초적인 것들 빼고는 전~부 백지 상태인 이나드를 교육시키기 위해 카샤는 이것저것 시켜보기로 했으며 이것도 그 교육 중 하나다. 카샤는 우유를 홀짝이며 종이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이나드는 쭈뼛쭈뼛 주인아저씨에게 다가가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별 일 없이 키를 받았다. 그걸 곁눈질로 살펴보던 카샤는 안심하며 다시 종이를 살펴봤다. 하지만 문제는 이나드가 돌아와서 생겼다.
“...왜 키가 하나 뿐이야?”
“무슨 문제 있나요?”
그건 오히려 카샤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방이 하나 뿐이야?”
“아뇨?”
“근데 왜 키가 하나 뿐이야?”
“무슨 문제 있나요?”
“...사람이 두 명이 있으면 방이 몇 개 필요하지?”
“하나면 되죠”
“......”
그렇긴 하다.
“무슨 문제 있나요?”
자꾸 대화가 원점으로 돌아가자 카샤는 결국 정신줄이 끊겨 버렸다.
“남자랑 여자랑 둘이 한 방을 쓰는 거잖아!”
빽하고 소리 지르자 얼마 없는 술집의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시선을 향했지만 이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흰 사제잖아요”
순간 카샤는 이나드의 뒤에서 후광이 비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둘은 사제다. 고로 둘의 성별이 같든 다르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이에 카샤는 전혀 반박할 말이 없어졌다.
“...그렇네”
“방은 언제 들어갈까요”
“...지금 들어가자”
마침 종이도 다 읽어봤으니 쉬는 거면 방 안에서 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나드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앞장섰고 카샤는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둘이 사라지자 술집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계단을 올라가며 이나드는 카샤가 뒤에서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 걸 계속 들었지만 무시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따로침대따로침대따로침대따로침대따로침대따로침대따로침대따로침대따로침대따로침대따로침대따로침대따로침대”
카샤는 이나드의 말이 옳다고 판단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나의 침대를 같이 쓰는 것만은 용납하지 못 했다. 그래서 그녀는 기도를 하며 침대가 두 개가 되길 간절히 바랬다.
“신이시여저를사특한계략에빠지게하지마시옵고시련에들게하지마시옵고악마의시험에놀아나지않게하시옵고침대만은두개로나누어주시옵소서!”
그렇게 문을 열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듯 문이 천천히 열리며 카샤의 눈에 들어온 방안의 풍경은 창문과 옷걸이, 그리고 두 개의 침대였다.
“예스!”
그녀는 쾌재를 부르며 작게 주먹을 쥐었고
“???”
그리고 이나드는 그 모습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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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제 물품들을 사와”
이나드가 짐을 어느 정도 풀자 카샤는 명령을 내렸다. 둘은 그 동안의 여행으로 인해 물품들을 많이 사용한 상황이어서 조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교육이라는 명분하에 이나드에게 떠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물품이라 하면...”
“먹을 거! 식량! 그리고 그 외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저 돈이 없는데요?”
그 말에 카샤는 품에서 반짝이는 작은 물체 하나를 가볍게 던졌고 이나드는 여유롭게 낚아챘다.
“이건.”
“1골드야. 화폐단위를 모르는 건 아니지?”
“100쿠퍼가 1실링이고 100실링이 1골드인 거잖아요”
“그래 잘 아네, 그럼 잘 갔다와 한 5일치로~”
카샤는 평소답지 않게 경쾌한 말투로 이나드를 밖으로 떠밀었다.
“...예”
이나드는 그렇게 문전박대를 하듯 쫒겨났다. 여기서 카샤는 한 가지 중요한 실수를 했는데, 그건 이나드가 화폐단위보다 중요한 시세와 금전감각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점을 모르는 카샤는 어딘가 쎄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오랜만에 목욕이나 해볼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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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걸 사야하는 지 대충은 알지만 정확히 뭘 사야하는 지는 몰랐던 이나드는 일단 밖을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신의 인도 하인지 운인지 그의 발길은 시장으로 닿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기억을 잃었다.
“핫!”
정신을 차리자 양손가득 종이 보따리 하나를 품 안에 안고 여관의 계단을 올라가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생각해 봤지만 뿌옇게 안개가 낀 듯 부분적인 기억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이거 좀 사가 총각’, ‘우리 영지 특산품인데 엄청 싸!’, ‘자네가 잘 생겨서 특별히 싸게 주는거네’ 이런 기억만이 조각처럼 떠오를 뿐이었다.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며 방문을 벌컥 열자 몸에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침대 위에서 무언가를 집으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
물론 실오라기하나 없는 상태로
“......”
카샤는 사제지만 동시에 한 명의 여성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여성으로서의 카샤는 지금의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매우 부끄러웠다. 아니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넘어서 이성의 끈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고 그 빈자리를 본능이 채워나갔다. 그녀가 본능적 방어수단인 비명을 사용하기 직전
“지금 뭐하시는 거죠?”
“...에?”
이성이 되돌아 와버렸다.
“사제라는 분이 칠칠맞게 몸도 안 닦고 옷도 안 입고 밖으로 나와서... 하아...”
벼려진 칼로 자르는 것 같은 그의 말과 당분간은 그에게서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구구절절 옳은 말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그게...”
“저는 밖에 나가있겠습니다.”
“저... 긋...”
그녀가 뭐라 한 마디라도 하기 전에 이나드는 쾅하는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갔고, 방 안에는 망연자실한 표정의 카샤만이 남았다.
“...뭐야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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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닦고 옷을 입으며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생각했다. 과연 상황 자체만으로 보면 누구의 잘못인지. 일단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별도로 주문한 따뜻한 물을 이용해, 화장실에 있는 간이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갈아입을 옷은 가지고 들어왔지만, 몸을 씻을 수건을 안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건을 비치하면 여행객들이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보니, 좋은 여관이 아니면 방 안에 수건이 있는 경우가 없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별도로 주문하거나 자기 짐에 가지고 다니는 편인데 카샤는 후자에 속한다. 그래서 카샤는 옷을 입고 수건을 가지러 갈 것인가, 맨몸으로 수건을 가지러 갈 것인가 고민했지만 지금 방 안에 아무도 없으니 맨 몸으로 가지러 간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설마 그 사이에 이나드가 돌아오겠어?’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다시 그 상황을 생각하자 얼굴이 부끄러워졌지만, 비교적 객관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내 잘못”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의 잘못이었다. 공용으로 같이 사용하는 방에서 아무런 사전설명 없이 알몸으로 다닌다는 것, 그것도 사제의 몸으로
“으으읏”
잘못된 행동이다. 그렇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자 감정이 다스려지며 이나드를 이성적으로 볼 자신이 생겼다. 조금은
“...들어와”
그 말과 함께 이나드는 방 안으로 들어오며 카샤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처럼 땋은 머리가 아닌,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촉촉이 젖어있었고 목욕 때문인지 방금 전의 상황 때문인지 빨갛게 상기 된 얼굴이 보였다. 그런 평소와 다른 모습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건 카샤도 마찬가지였다. 카샤는 이나드의 얼굴을 보자 ‘이젠 이성적으로 볼 수 있다’라는 조금 전의 생각이 헛된 자신감이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시선을 그의 양 손 가득 담겨 있는 종이바구니로 향했다.
“...뭘 저렇게 많이... 샀어?”
평소라면 카샤의 드문드문 떨리는 목소리에 이상함을 느꼈겠지만 조각난 기억에 정신이 팔린 그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글쎄요...”
“글쎄요오?”
그 말에 종이바구니를 빼앗다시피 건내받곤 물품을 살펴봤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급히 생각난 듯 이나드를 보며 외쳤다.
“남은 돈!”
그제서야 이나드는 자신의 몸을 뒤져봤고 동전 여러 개가 그의 품에서 나왔다.
“여기...”
이나드가 카샤에게 돌려준 돈은 약 50실링이었다.
“......절반!? 1골드가 어떤 돈인데!”
“어떤 돈인데요?”
“평범한 4인 가정이 한 달 동안 사용할 돈이라고!”
그리고 카샤의 한 달 동안의 활동비 겸 용돈이었다. 이나드는 그 금액의 절반을 반나절도 안 걸려서 소모한 것이다. 실링으로 바꿔서 가지고 다니면 거치적거려서 1골드 통째로 가지고 다녔는데, 그 결정으로 이렇게 후회 할 줄은 몰랐다.
“...그렇군요”
하지만 삼시세끼 수도원에서 먹여주고 재워줬으며 용돈조차도 받아보지 못한 이나드에겐 그게 큰 금액인지 와 닿지 않았다. 그런 이나드와 말싸움을 해봤자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물건들을 살펴봤다. 대부분이 사과 같은 과일이나 군것질거리 같이 먹을 것들이었다. 다행히 생고기나 야채같이 조리를 해야 하는 물품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머리핀에 장난감에... 당장은 전혀 쓸모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이런 것들은 그녀로서도 시세를 잘 알진 못했지만 바가지를 몇 곱절, 그 이상으로 썼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이 빠졌다.
“식량은?”
지금 있는 것도 식량으로 사용 할 수 있지만 5일치 식량으로는 전혀 안 되었다. 고로 요리를 할 줄 모르는 그들에겐 여행을 하는데 있어서, 완성된 보존식이 가장 중요했다.
“여기 주인이 내일 출발할 때 마련해 주겠다고...”
“...그럼 그 것까지 해서 남은 금액이 이거겠지?”
“아뇨”
“캬아아악”
결국 카샤는 아까 전에 쌓인 감정을 이곳에 터뜨렸다. 카샤는 이나드를 혼내며 이런 일에 대해 중요한 점과 주의할 점을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쳤고, 잘못한 이나드는 묵묵히 화를 다 받아내며 듣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설교(?)는 끝이 났고 저녁은 이나드가 사온 물품들로 지냈다. 다행히 음식은 맛이 있는지 카샤는 별 말이 없었다. 그 후, 이나드도 남아있던 간이 욕탕에서 목욕을 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나드는 카샤가 욕탕을 먼저 사용했다는 걸 몰랐고, 카샤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느라 이나드가 화장실에 오래 있는 이유를 몰랐다. 그렇게 서로 개인적인 시간과 기도를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평소의 야영과는 달리, 침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나드는 낮의 생겼던 일에 대한 생각에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저쪽은 나쁜 사람 우리는 착한 사람. 하지만 저 나쁜 사람이 보기에 우리는 어떻게 보일까 나쁜 사람일까, 착한 사람일까? 저들은 그냥 가만히 놔둬도 상관없는 사람들이지 않을까? 결국 이나드는 상체를 일으키며 답을 구했다.
“카샤 사제님”
“응?”
이나드가 여태 한 번도 안 쓰던 표현을 써가며 카샤를 부르자, 마침 잠을 못 이루고 있던 카샤는 대답했다. 카샤는 카샤대로 1골드가 반도 안 남아서 생긴 복잡한 마음에, 잠을 못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도 몸을 일으키며 이나드와 얼굴을 마주했다.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어둠 속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여태 못 본 진지한 얼굴이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정확히 뭔가요?”
올 것이 왔다.
이것이 카샤가 느낀 것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다. 안 그래도 오늘은 낮의 일도 있고 해서 이쯤 되면 이런 질문을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라고 생각했다. 오늘따라 생각지 못한 큰일들이 생겨서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저번에도 말했지만 우리가 맡은 역할은 각지의 이단. 즉 정확히 말하자면 교회의 의지와 교리에 부합하는 자나 단체들로부터 어린 양들을 지키는 것. 그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교회에서 인정하는 타 종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금지하는 단체도 많은 편이다. 흑마법사는 물론이고 인정받지 못한 마법을 쓰는 마법사들도 금지, 드루이드도 표면적으론 금지, 민간신앙은 물론 금지. 단지, 현재 교회에서 직접적으로 신경을 쓰고 있는 건 적 리스츠교 라던가 악마신봉이라던가 하는 그런 큼직큼직한 존재나 단체들이다. 그런 것만 강하게 규제와 처벌을 하며 다른 잡다한 것들은 별 문제 안 되면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래서 조그마한 마을 같은 데에서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생각을 짧게 하며 카샤는 이나드에게 할 말을 가다듬었다.
“교회에서도 어쩔 수 없는 게 이런 곳까지 신경쓰기엔 사람도, 돈도 부족해. 교회라는 걸 세우는데 한 두 푼 드는 것도 아니고 사제를 교육하는 데 하루 이틀이 걸리는 것도 아니니까. 반면에 우리가 필요한 곳은 많지.”
그 말에 이나드는 끄덕였다. 그 행위가 알아들어서 하는 끄덕임인지, 그냥 모양새만 취하는 끄덕임인지 모르겠지만 카샤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제 납득한거야?”
“...네”
이나드의 말에서 후련하지 않다 라는 걸 느꼈지만, 현재 카샤가 해 줄 수 있는 답은 이게 다였다.
“잘 자 이나드.”
“안녕히 주무세요”
그렇게 여관에서의 날이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