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이른 새벽과 아침 사이의 시간, 이나드는 석연치 않은 마음을 안고 잠이 들었지만 의외로 개운하게 깨어났다. 옆을 돌아보자 그의 옆에는 아니, 옆 침대에는 먼저 일어난 카샤가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자신도 일찍 일어나는 편이지만 카샤는 특히나 일찍 일어난다. 게다가 자신보다 늦게 잠을 자면서 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자신보다 잠을 덜 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비해 잠이 부족하게 보이진 않았다.
‘수행의 차이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이나드는 여느 때와 같이 식사 준비를 했다. 어제 자신도 모르게 산 물품들 중, 애매하게 한 끼 더 먹을 분량이 있었던 것 같아 그걸로 아침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해?”
“그거야 밥 먹을 준비를...”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
“아래에서 먹자”
“그거 좋죠”
어제 산 음식들도 맛이 있지만 식은 음식보단 누군가 방금 만들어 준 음식이 더 맛있는 법이다. 이른 아침이기에 테이블엔 손님이 전혀 없었지만, 주인아저씨는 묵묵히 마른 천으로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이나드가 그런 아저씨를 보며 일의 고단함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을 때 카샤와 아저씨가 눈이 마주치자 묵언의 눈인사가 오갔다.
“아침 식사 2인분 부탁드립니다.”
카샤가 테이블에 앉으며 주문을 하자 주인 아저씨는 알겠다는 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식사가 나왔는데 메뉴는 빵과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베이컨이었다. 눅눅한 빵과 반쯤 마른 베이컨이었지만, 여행동안 딱딱하고 차가운 빵과 건육만을 먹던 이나드에겐 이것도 호화로운 식사였다. 어느 때보다 진중한 식전 기도가 끝난 뒤, 이나드는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웠다. 그 모습에 카샤는 질겁을 했다.
“...저게 사제라고...”
이나드는 그런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식사를 계속했고 카샤는 그 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식사를 했다. 그렇게 수도원을 떠나서 먹은 식사 중 가장 맛있고 품위 없는 식사를 한 뒤, 둘은 영주관으로 향했다.
“이나드. 경비병들과 기사, 모두를 상대할 수 있겠어?”
“...기사? 기사요!?”
“왜...왜 그래?”
“기사란 충성스럽고 정의로우며 강인한 자들이라고 들었는데... 맞죠?”
“...으엑”
그 말에 카샤는 질색하고 말았다. 지금의 이 모습을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세상물정을 오락용 소설책으로 배운 마을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대로 이나드는 책으로 기사라는 존재를 배웠다. 그가 아는 기사란 충성, 사랑, 정의, 강함의 집약체. 한 마디로 쉽게 쓰인 오락용 소설에 속하는 기사들이었다. 그런 존재를 직접 접한다는 사실에 이나드는 감격에 잠겼고 카샤는 그가 뭘 생각하는지 몹시도 궁금했지만 물어봤자 피곤할 것 같아 그것에 대해 물어보는 건 놔두기로 했다. 이나드에 비하면 기사에 대한 카샤의 생각은 현실적이고, 매우 현실적이었다. 자신의 힘만 믿고 나대는 자에, 귀족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는 자, 약자를 깔보고 괴롭히는 자 등등... 이것이 경험에 의거한 그녀의 생각이다. 물론 이나드가 생각하는 대로 충성스럽고 정의로우며 강한 기사가 없는 건 아니다. 확률적으로 계산하면... 기사 전체 중에서 3할 정도? 그것도 강하다는 옵션을 뺀 계산이다. 더군다나 이런 시골에서는 퇴물 용병을 싼 값에 기사로 고용하거나, 어렸을 때 검 좀 배워 본 아무개를 기사로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자들에게 기사도라는 건 정말이지...
“기사도는 개뿔”
“네?”
“아냐 아무것도... 그래서,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겠어?”
“음...”
카샤의 말에 이나드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을의 아저씨들보다 상대하기 어렵고 위험하겠지만, 확실히 경비병들 정도야. 하지만...
“기사의 실력은 어떻죠?”
이나드의 말에 캬샤는 쪽지에 적혀져 있던 내용 중 하나가 생각났다. 그 내용은 바로
‘검 좀 쓰는 별거 아닌 기사 한 명...’
검을 좀 쓴다는 것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이다. 동네양아치가 누군가를 가리키며 검 좀 쓴다고 하면 검으로 삥 뜯어봤다는 것이고 검의 고수가 검 좀 쓴다고 하면 인정받는 검사인데 이 사람은 누구의 관점에서 검 좀 쓴다고 한 걸까. 자기 자신? 너무나 불확실한 정보다.
“...몰라”
그녀의 입에서 자신없는 말이 나왔다. 그러자
“무립니다.”
불가능하다는 즉답이 나왔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상대 할 수 있다는 말보다, 자신을 알고 포기 할 줄 아는 자세가 훨씬 낫다.
“그렇단 말이지...”
어차피 그녀로서도 기사와 경비병을 모두 상대한다는 무리수를 쓸 생각은 없었다. 단지, 최악을 가정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 본 것일 뿐이었다. 그의 답이 이렇게 나왔다면 그녀가 할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으니 어느새 영주가 기거하는 내성 앞까지 도착했다. 과거 고대의 성들은 외성과는 별개로 내성을 만들어, 전쟁이나 몬스터들의 대규모 침공으로 인해 도저히 막아낼 수 없을 때 피난을 용도로 만든 성이다. 하지만 그리 효율성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자, 외성을 내성을 만들지 않고 외성을 보다 견고히 만드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며, 내성은 미관을 중요시한 저택형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둘의 눈앞에는 옛 유물을 상징하는 듯, 외성보다 견고해 보이고 보다 높은 크기의 내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
“......”
같은 건물을 눈앞에 두곤 둘은 같으면서도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 한 명은 감탄의 침묵을, 한 명은 옆 사람에 대한 한심의 침묵을 취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경비병이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시죠”
“리스츠교의 사제 카샤 레플리. 영주님에게 용무가 있어서 왔습니다”
이나드는 내버려두고 카샤가 격식을 차리며 말하자, 잠시 멈칫하던 두 명의 경비병은 속닥거리며 무언가의 대화를 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라는 말과 함께 경비병 중 한 명이 내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원래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보다 낮거나 동등한 사람에게는 거들먹거리며 바쁜 척하며 잘 안 만나주는 법이야. 진짜 바쁠 수도 있고”
카샤의 목소리는 크진 않았지만, 경비병이 못 들을 정도로 작지 않기에 이나드는 흠칫 경비병의 얼굴을 봤다. 그 경비병의 얼굴은 참으로 오묘했다. 화를 내려다 마는 것 같았고 좋아 하려다 마는 것 같기도 하고, 참으로 이상한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카샤와 이나드가 경비병의 얼굴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자, 깨끗하게 차려입은 장년의 사내가 성에서 나왔다.
“누구죠?”
“저는 영주님을 모시고 있는 집사 도튼이라고 합니다.”
이나드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 집사는 자신을 소개했다.
“영주님께서 여러분을 만나보겠다고 하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카샤와 이나드는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이나드는 카샤에게 물었다.
“집사가 뭡니까?”
“성의 관리인이자 영주를 보조하는 사람.”
이번엔 작은 목소리라서 집사 아저씨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카샤는 그런 것보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 솔직히 이런 저런 일이 생겨서 하루, 이틀 정도 이곳에 머무는 사태도 생각했었고 어제 밤에라도 약속을 잡아 놨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다 기우가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카샤가 그렇게 생각하며 집사를 따라가고 있을 때, 일행은 홀에서 한 사람과 마주했다. 갈색의 잘 정돈된 머리에 장년과 노인의 사이에 있어 보이는 나이, 그리고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단련된 몸을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허리에 걸친 검과 흉부를 가린 레더아머를 보자 그가 바로 그 기사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뭐지?”
“영주님의 손님입니다.”
“...따라가도록 하지”
그 말에 카샤는 탄식을 했다. 방 안에 셋만 있게 된다면 쓸 데 없는 마찰없이, 영주와의 볼일만 마치고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기사와의 마찰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마음속으로. 그리고 셋은 집사의 안내에 따라 성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 2층의 한 곳으로 향했다. 방문만 봐도 다른 방에 비해 다른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들어가시죠”
집사는 문의 손잡이를 돌리며 안내를 했고, 노기사는 그의 반대편에 서며 대기했다. 카샤는 아무 말 없이 들어갔지만, 이나드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노기사와 눈을 스치며 지나갔다.
방을 들어가자 정면으로 손님맞이용으로 보이는 나무탁자가 있었고 의자들이 앞뒤로 마주보게
끔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왼쪽 벽면엔 책으로 가득 찬 책장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각종 액자들과 장식품이 있었는데. 그 물품들은 이곳이 귀족의 방이라는 걸 알려주려는 듯 고풍스러웠다. 마지막으로 탁자 너머엔 개인 업무용으로 보이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그 책상의 옆에는 척 봐도 영주처럼 보이는 자가 자신의 몸매처럼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하지만 카샤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영주는 예의로 목례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이나드의 시야에만 보인 얼굴엔 불쾌감 비슷한 무언가가 보였다.
“베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 갈렌 베로 남작이라고 합니다.”
영주는 간드러지게 자신을 소개했다.
“리스테레츠를 모시는 신실한 사제. 카샤라고 합니다.”
“이나드입니다.”
“예.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한 가지 협조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협조라...”
잠시 생각하는 듯 자신의 염소 수염을 만지던 그는 재차 말했다.
“어떤 협조를 바라시는 건가요”
“간단한 겁니다. 최근에 영주님이 어떤 사람을 만났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 알려주시면 됩니다.”
“...그래야 할 의무는 없다고 봅니다만.”
“교회의 청이라고 해도 말입니까?”
“사제님의 부탁이 교회의 청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지요?”
그러자 잠시간의 침묵이 일며 둘 간의 안 보이는 기싸움이 일었다. 그리고 이나드는 그 동안 카샤와 같이 다닌 결과, 지금 그녀는 심각하게 고민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제가 여러 사람의 이름을 말할테니, 그 중 아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면 알려 주시는 것 정도라면 어떤가요”
“흠? 그 정도야 뭐...”
영주가 재차 말하기 전에 카샤는 말을 했다.
“제크, 다리오, 마렌, 벨루아, 커스크, 랜달,”
“모르는 이름입니다.”
“에르쉐, 비탄, 칼. 토르코, 푸웬”
“전혀 모르는 이름입니다.”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이름들이 계속해서 나열되자 긴장했던 영주의 얼굴이 점점 느슨히 풀어져갔다. 그리고 카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이 이름은 어떤지요 푸스-로”
“!”
정곡이다.
여태까지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던 영주가 순간적으로 놀랐다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표정변화는 이나드가 알아챌 정도였다.
“아시는 분 같군요”
“...그런 사람 모릅니다.”
“그건 다른 곳에서 확인 하도록 하죠.”
“지금은 영지가 한창 바쁠 때라 자리를 비울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제가 없는 사이에 벌어질 손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확인해서 아닐 경우 그에 합당한 보상금이 주어질 것이니 걱정마시죠.”
확실히, 의심받은 자를 조사해서 이상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 자에게 보상금이 지급되고 그를 의심한 자에겐 합당한 벌이 주어진다. 그러나 한번 끌려가면 없는 죄도 만들어 내서 못 나오거나 곱게 나오지 못한다는 웃지 못할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었고 영주는 그 소문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순순히 끌려 갈 것이라는 생각에 영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볼살이 푸르르 떨렸다. 카샤는 끝났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었고 이나드는 영주의 얼굴이 웃겨서 미소를 지을 뻔했다.
“이이잇. 노반!”
“예.”
결국 영주는 자신의 기사를 불렀고, 대답과 함께 문 밖에서 보았던 기사가 곧바로 들어왔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다시 보니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의 행동거지는 검을 겨우 1, 2년 배운 실력이 아니라 판단하게 만들었고, 이나드의 짐작대로 그는 용병일로 사선을 꽤나 넘어들며 실력을 키운 베테랑이다. 말년에 월급이나 받으며 조용히 보내려 이런 영지의, 이런 귀족의 기사역할을 맡게 되었고 귀족 또한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호위기사를 데리고 있으려고 한 것이지만 실력만은 적당하지 않았다.
스륵
이나드는 천천히 장갑을 착용하며 자세를 잡았고,
스릉
노기사는 천천히 검을 뽑아들며 자세를 잡았다. 오른손잡이에, 롱소드였다.
수도원에서 무기의 종류들에 대해서 배운 이나드는 무기들의 종류와 특징들을 간단하게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세하게까진 알지 않지만.
“살면서 전투사제와 싸워 본 적은 없지만, 잘 부탁하지 어린 친구”
“저도 기사랑 싸우는 건 처음이지만, 잘 부탁해요 늙은 아저씨”
그렇게 말하며 숨 한번 크게 쉴 시간이 지나고 노반이 먼저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