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하나 없는 어두운 밤하늘.
그리고 산 중에 아무도 모르는 어두운 성 안의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여자.
잔을 빙빙 돌리다 들고 마시며 미소를 보인다.
한 공원에서 관을 둘러싼 사람들 속에 검은 상복을 입은 한 소녀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다. 고개를 들며 흐르는 눈물을 닦자 그녀의 눈동자가 더욱 빛나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를 본 사람들이 탄식을 하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기 시작한다.
소름 돋는 눈동자라며 기가 막혀 하는 듯한 목소리와 신기하다는 목소리..
그리고 눈 때문에 저주 받아서 부모가 죽었지 않냐는 소리가 들리자 소녀가 지금까지 참고 있던 분을 분출하기도 전에 소녀의 할머니가 고개를 저으며 말없이 소녀의 손을 잡아준다.
할머니의 눈동자엔 그녀의 슬픈 눈동자가 비춰진다.
소녀는 왼쪽 눈은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 그리고 오른쪽 눈은 영롱한 갈색 눈동자였다.
그녀는 오드아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소녀는 눈물 젖은 얼굴로 나무에 기대앉는다.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죽음에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어린 18살이었다.
쪼그려 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붉은 기가 도는 갈색머리로 자신을 가리고 엉엉 울어볼까 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있어보려고 노력하던 차에 그림자 하나가 다가온다.
고개를 들어보니 할머니가 소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안나, 할머니랑 가자.”
할머니의 다정한 목소리에 안나는 일어나 할머니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안나의 할머니 마가렛은 센드레라는 영국의 북부 지방에 살고 있었고, 교수 셨던 부모님이 바쁠 때가 많아 안나는 방학마다 할머니 집에 가서 지내곤 했다.
안나에겐 마가렛이 또 다른 부모인 셈이었다.
의문의 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마가렛이 나서서 안나를 데려오기로 한 것이다.
날씨가 거의 매일같이 화창한 콘월과 다르게 센드레는 매우 습하고 어두운 곳이다.
영국 날씨 상 변덕스러운 것은 당연했고 그 곳은 유독 동떨어지고 어둡고 다른 느낌이었다.
안나는 그 곳에 갈 때마다 신기한 숲에 온 기분이라고 생각을 했고, 콘월과 다른 느낌을 좋아했다. 비 오는 것과 눈 오는 것을 특히.
안나의 엄마 레이첼은 센드레를 무척 싫어해 대학을 무조건 남부 지방으로 가겠다며 벗어났다가 아빠 매튜를 만나게 되어 그 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벌어진 안나에게는 마가렛은 구원이었고, 따뜻한 집이었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상복을 남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집으로 돌아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날씨가 달라서 옷가지들은 의미가 없어서 몇 개만 챙기고 사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집에서 나오면서 현관에 있는 거울을 보고 선다.
렌즈통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왼쪽 눈에 갈색 렌즈를 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엄마가 남겨준 별모양 펜턴트를 하면서 혼자 중얼거리며 다짐을 한다.
“거기에 가면 울지 말자. 할머니랑 행복하자.”
그리고 곧장 집에서 나와 마지막으로 18년 동안 살아온 자신의 집을 향해 인사를 한다.
해변을 따라 걸으며 이제 이런 풍경은 거의 못 본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씁쓸해졌다.
일 년 내내 강렬한 햇볕 아래에서 썬탠 할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런 햇볕 아래에 있어도 항상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던 안나였기 때문에 살짝 아쉬운 듯 햇빛을 바라보더니 선글라스를 쓰고 캐리어를 끌며 걸어간다.
센드레 인근 작은 공항에 도착을 하자 벌써 온도부터 달라 쌀쌀하게 느껴졌다.
가져온 가디건을 입고 선글라스를 벗고 공항 밖으로 나가자 자동차 앞에서 할머니가 손을 흔들고 있자, 안나는 반가워 얼른 할머니에게 달려가 안겼다.
고생했다며 얼른 집으로 가자는 할머니의 따뜻한 말에 안나는 울컥했지만 참았고 트럭 운전석에서 여자 목소리 하나가 들린다.
“안나, 잘 지냈지?”
“안녕하셨어요?”
빨간 단발머리의 조이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조이는 30대 초반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마가렛의 찻집인 ‘선셋’에서 일을 시작했다. 쾌활한 사람으로 마가렛과 센드레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다.
혼자 지내던 마가렛에게는 가족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조이가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 캐리어와 짐을 실고 뒷좌석으로 마가렛과 안나를 안내한다.
1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가 오늘따라 멀게 느껴졌지만 안나는 안심을 했다.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고, 무엇보다 마가렛이 좋아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조이가 신나는 음악을 틀어 안나가 슬퍼할 틈도 없었다.
시간이 꽤 지나 밖을 보니 어두워졌고 울창한 나무들이 줄줄이 보이기 시작한다.
짙은 초록색의 나무들을 보자 이제야 센드레에 온 것을 실감이 됐다.
조이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벨소리가 울리자 백미러로 미안하다며 전화를 받는다.
“아, 오늘은 늦으셨네요. 네. 네. 얼른 갈게요.”
“무슨 일이니?”
조이가 전화를 끊자, 마가렛이 물었고 조이가 백미러를 보며 대답을 한다.
“아무래도 찻집에 가봐야 될 거 같아요. 찻잎이랑 커피콩이 조금 전에 도착했다네요.”
“아이고, 그러니? 나도 가봐야겠다.”
“안나는 어떻게 하고요?”
“아, 저는 혼자 갈 수 있어요! 방학마다 왔었잖아요.”
“괜찮겠어?”
“그럼요.”
안나가 쾌활하게 대답하자, 마가렛이 신경 쓰이는 듯 안나를 계속 바라보자 안나가 웃으며 정말 괜찮다고 마가렛의 손을 꽉 잡는다.
어느 덧, 숲을 지나서 마을 안으로 들어왔는지 조그만 상점들이 보이고 집들이 보인다.
마을의 거의 끝에 있는 찻집에 도착하자 조이가 급하게 차에서 내려 안나의 짐을 꺼내준다.
마가렛은 같이 가는 것이 낫지 않냐고 다시 묻자 안나가 괜찮다며 겨우 마가렛을 안심 시키고 트렁크를 끌고 걸어가기 시작한다.
마가렛의 집은 찻집을 지나 오솔길로 들어서 가면 숲의 입구 쪽에 있는 집이었다.
어두운 오솔길을 걷자 높은 전나무들 사이에서 부엉이가 우는지 소리가 들렸고, 평소에 방학마다 오던 분위기와 달랐다.
숲의 입구에 다가와 집이 보이고 주변을 둘러보자 숲 속에 누군가 있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곳을 쳐다보는 안나의 오른 쪽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진한 고동색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