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천명
작가 : 임준후
작품등록일 : 2016.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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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
작성일 : 16-07-12     조회 : 639     추천 : 0     분량 : 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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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귀향(歸鄕)

 

 

 

 

 간혹 불어오는 거친 바람이 온 세상을 누렇게 만들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거대한 황금빛 모래의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죽음의 대지라고도 불리는 타클라마칸사막(塔克拉瑪干沙漠)이 시작되고 있었다.

 타클라마칸은 위구르어로 ‘한 번 들어가면 돌아 나올 수 없는'이란 뜻을 갖고 있는 사막으로 생명이 살아남기 어려운 척박한 환경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신강의 토착민들도 생사를 다투는 급박한 경우 이외에는 타클라마칸에 거의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런 타클라마칸에 생물의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중천에 뜬 태양이 사막을 용광로처럼 달구는 오시(午時)경 이었다.

 바람이 쌓아놓은 삽십 장 높이는 됨직한 모래언덕 너머에서 목단을 연상시키는 검은빛 윤기가 전신에 흐르는 한 마리의 말이 나타났다.

 흑마의 어깨는 보통의 말보다 한 뼘은 더 높았고, 입의 가운데가 붉으면서 윤기가 흘렀다.

 모래로부터 올라오는 사막의 열기속에서도 맑게 빛나는 커다란 눈동자가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 말이었다.

 말안장에 앉아 있는 사내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는데 그가 타고 있는 말의 비범한 모습에 비하면 그의 외모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단지 사막의 열기속에서도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먹물처럼 검은 흑색 장포를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그는 모래언덕의 중턱부근에서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운 후 머리에 쓰고 있던 회색 두건을 손으로 살짝 걷어올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뜨거운 백색의 태양이 그의 머리위에서 작열하고 있었다.

 사내의 머리를 덮은 두건 아래로 정리되지 않은 거친 턱수염에 맺혀있던 굵은 땀방울이 말등에 떨어졌다.

 흑마(黑馬)의 등에 떨어진 땀방울은 말등에 닿자마자 사막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때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이 두건 밑으로 흘러내린 그의 숱이 많고 긴 머리카락을 휘감아 올리며 흐트러뜨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이십 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그는 고생을 많이 한 듯 피부가 검게 그을려 있었고, 광대뼈가 눈에 띄게 두드러져 보일 정도로 말라 있었다.

 사내의 얼굴은 이목구비의 균형이 잡혀 있긴 했어도 미남이라고 부르기는 모자랐다. 하지만 흑백이 분명한 맑은 눈과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진 입술이 강인한 느낌을 주었다.

 그의 얼굴은 땀에 절어 있었지만 특이하게도 사막의 열기에 그다지 구애를 받고 있지는 않은 듯 피로가 엿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이마위로 끌어올린 두건을 눈썹까지 잡아 내리며 정면에 펼쳐진 모래바다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9년만이로군. 이곳만 넘으면 난주(蘭州)가 코앞이다. 하지만 이곳을 넘는다해도 갈 곳이 없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구나.”

 나직한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음성은 듣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굵은 저음이었다.

 그는 왼쪽 허리춤의 요대혈(腰帶穴:칼매듭고리)에 매달려 있는 도의 도파(刀把:칼손잡이)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그가 도파를 어루만지는 도(刀)는 중원(中原)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도와는 형태가 약간 달랐다.

 길이가 일반 도(刀)보다 한자(30센치미터) 정도 더 길었고, 도신을 감싸고 있는 도갑의 폭으로 보아 도신의 폭은 한치 반(5센치미터)이 약간 넘어 보였는데 폭이 일정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유엽도(柳葉刀)와는 달리 도배(刀背:칼등마루)가 일직선으로 쭉 뻗어나가 있었다.

 도배에 곡선이 있다면 왜국에서 사용한다는 도와 비슷한 형태였지만 도배엔 곡선이 없었고, 어찌 보면 동방의 조선국에서 병사들이 소지한다는 환도와도 비슷했다.

 하지만 도파와 도신의 길이가 환도(還刀)보다 훨씬 길어서 환도라고 보기도 어려운 특이한 도(刀)였다.

 장식이 없는 검은 빛의 도갑에 들어있는 도는 그가 입고 있는 칙칙한 흑색장포와 묘하게 잘 어울렸다.

 “앞으로 당분간은 칼을 쓸 일도 없을 듯 한데..... 흑운(黑雲)아, 가자. 네가 가보지 못한 내 고향을 보게 해 주마. 비록 반기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고향이긴 하지만.....”

 사내는 흑운이라 부른 말의 목부분을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으며 웃었다.

 쓸쓸한 여운이 남는 웃음이었다.

 잠시 그렇게 중원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흑운의 등에 앉아있던 사내는 손을 들어 턱수염에 맺힌 땀방울을 훑어냈다.

 그의 발길이 슬쩍 흑운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주인의 뜻을 읽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흑운의 말발굽 뒤로 희뿌연 모래 먼지가 풀썩이며 일어났다.

 일인(一人) 일수(一獸)의 모습은 곧 사막의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그는?”

 차분하지만 어딘지 번민의 기색이 어린 음성이 거대한 대전에 울려퍼졌다. 듣는 사람의 가슴을 파고드는 미묘한 기세가 실려있는 음성이었다.

 새벽의 어스름한 여명에 잠긴 대전은 그 거대함만큼이나 신비로운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대전은 은은한 붉은 빛이 흐르는 수십 개의 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입구에서 맞은 편 끝이 제대로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컸다.

 대전의 통로에는 입구에서 끝까지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그 양탄자가 끝나는 지점부터 계단이 시작되었는데 계단의 수는 모두 서른 여섯 개였다.

 붉은 양탄자가 깔려있지 않은 부분은 모두 투명한 빛을 발하는 흰색의 대리석으로 뒤덮여 있었다.

 대리석의 흰빛과 기둥과 양탄자의 붉은빛이 조화를 이루어 사람을 위압하는 웅장함이 느껴지는 대전이었다.

 지금 그 계단이 시작되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붉은 색의 장포를 걸친 장년의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고 있었다.

 “그의 흔적은 신강(新疆)의 사차(莎車)에서 사라졌습니다."

 신강성(新疆省)의 사차(莎車)는 서역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중원으로 향할 때 반드시 지나게 되는 관문과 같은 곳이다.

 물론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타클라마칸을 넘어 중원으로 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천산북로나 남로를 통하는 것보다 시간은 단축되겠지만 시간과 함께 생명도 단축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사차? 사막을 건널 생각인가?“

 음성은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른 여섯 개의 계단이 끝나는 지점은 반투명한 장막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장막뒤에는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사람의 윤곽은 드러났지만 모습을 정확하게 알아볼 수는 없었다. 장막의 재질이 일반의 천이 아닌 듯 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막뒤의 음성에 대답하는 중년인의 모습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엔 장막뒤의 인물에 대한 공경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의 짙은 검미 아래 자리잡고 있는 푸른빛의 두 눈에서 간혹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신광은 그의 무예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중년인의 음성이 이어졌다.

 “타클라마칸을 넘어 그를 추적한다는 것은 위험하기에 일단 사차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사막을 넘는다면 감숙성(甘肅省)이 십여 일 거리에 있습니다. 맹도(盟徒)들이 감숙에 들어섰을 때 생길 문제들이 간단치가 않기 때문에 사막을 넘는 것은 맹주(盟主)님의 허락을 받아야할 사안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중년인은 화제에 오른 인물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말하고 있었다.

 “자네 판단이 옳아. 그곳을 넘는다면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미친놈들과 만나야만 하지. 그들이 지난날처럼 우리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귀찮게 굴 소지는 아직 충분하다. 잊어버리기엔 흐른 세월이 너무 짧으니까.”

 장막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곤혹스러운 듯 약간 떠 있었다.

 “그가 의도적으로 추적을 뿌리치고자 한다면 그를 쫓을 수 있는 사람은 맹내(盟內)에서도 몇 되지 않는다. 사차(莎車)라....그가 중원으로 향한 것은 확실하다고 보아야하겠군.”

 “제 판단도 그렇습니다.”

 “그가 우리의 제의를 뿌리치고 중원으로 간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을 따르는 휘하를 모두 내버려두고 단신으로?”

 “죄송합니다. 맹주님.”

 중년인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그도 지금 화제의 중심이 된 자가 왜 중원으로 향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흠, 그가 중원으로 떠난 것을 그자들이 알고 있을까?”

 “아직은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의 행적은 본래 표홀해서 어느 한 곳에 잘 머무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서약에 매여 있어서 그의 행적을 쫓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의 능력은 우리에 못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게. 그들이 그가 떠난 것을 오래도록 모를 것이라는 가정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가정일세. 그가 중원으로 떠난 것을 그들이 알게 된다면 그들은 참지 않을 것이야. 서약은 이 땅에서만 유효하니까.”

 장막뒤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는 중년인의 눈밑에 짙은 그늘이 졌다.

 그때 다시 음성이 들렸다.

 “중원으로 가기 적합한 사람들을 추려 보게. 중원인들과 그들에게 의심받지 않을 사람들로. 그리고 그를 안전하게 데리고 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그들이 중원으로 들어선다면 그의 목숨은 바람앞의 등불과 같은 신세가 된다. 만약을 대비해야 해. 이곳과 중원은 사정이 달라. 이곳이라면 그들은 그에게 결코 손을 대지 않을 테지만 중원이라면 얼마든지 그를 도모할 수 있네. 그가 일신에 지닌 무위(武威)가 놀라울 정도라는 것은 인정하네. 그렇지만 그들이 그보다 못하여 참고 있는 것은 아닐세.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 땅을 떠난 것인지... 중원이라면 서약의 효력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가, 그리고 자신이 떠난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치 못할 리도 없는데....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움직이다니...... 흠, 어쨌든 이미 그가 떠난 것은 바꿀 수 없는 사실. 중원에서 그가 우리보다 먼저 그들의 손에 떨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자네도 잘 알 테니 사람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시켜서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맹주님.”

 중년인은 정중하게 한쪽 팔을 들어 가슴에 댄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맹주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현맹주를 모신 지 이미 삼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비록 드러난 명예는 없었으나 맹주의 그림자로 살아온 그는 누구보다도 맹주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맹주를 비롯한 그 누구도 타클라마칸을 넘어가고 싶은 사람들은 없었다. 그곳을 넘어갈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넘어가야 했다. 그가 사막을 건넌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중원에 볼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볼 일이 있는 것이다.

 그의 존재는 맹(盟)뿐만 아니라 이 땅에 반드시 필요했다. 그가 있을 곳은 중원이 아니라 이곳이었다. 그는 돌아와야만 했다.

 성큼성큼 대전을 나서는 중년인의 얼굴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맹주에게 했던 간단명료한 대답과는 달리 그가 맡은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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