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개문령(開門令)
남정기는 상황이 묘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모현이 느닷없이 그를 향해 달려들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그에게 달려든 모현이 무엇인가를 그의 가슴에 쑤셔 넣으며 그를 스쳐 지날 줄은 더욱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잘 간직하게나. 곧 되찾으러 올 테니!”
남정기의 귀에 나직한 한마디를 남긴 모현의 신형은 단숨에 후원의 담을 넘어갔다.
그가 모현을 막으려고 했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무공을 드러낼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현은 아주 험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의사와 다르게 자신을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을 곱게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물론 모현을 비롯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아우는 그자를 확인하게!”
정환의 신형이 모현의 뒤를 따르고 뒤를 이어 그들을 지켜보던 시선의 절반 이상이 후원에서 사라졌다.
객방의 문이 부서지고 모현이 후원에서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차 한잔 마실 정도에 불과했다. 한 줄기 회오리바람이 후원을 휩쓸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
남정기는 그들과 같이 후원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정면에 검을 그의 가슴에 겨눈 정균이 도끼눈을 뜨고 있었던 것이다.
남정기의 귓가에 남긴 모현의 한마디는 나직했지만 전음입밀(傳音入密)의 수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후원에 있던 사람들이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남정기의 입에서 가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객방에 그대로 있을 걸 그랬다는 일말의 후회가 그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현이 남긴 물건을 내놓아라!”
정균의 음성은 차가웠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의 검봉(劍鋒:칼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남정기는 정균의 검봉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기가 조금씩 증폭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정균이 주변에 은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면 벌써 손을 썼을 거라는 것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씨형제의 눈빛엔 탁한 기운이 거의 없어 사도(邪道)를 걷는 자 같지 않았는데도 물건에 대한 탐심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보며 그는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예전의 그였다면 정균은 지금처럼 성한 몸으로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분란을 피하고 싶었다. 더구나 난주에서라면 그들과 너무 가까웠다. 그에 대한 소문이 그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정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뜸 웃옷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그의 손에는 푸른 색 천으로 감싼 손바닥만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그는 손에 들린 물건을 정균에게 불쑥 내밀었다.
남정기가 내민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보는 정균의 눈이 의혹과 탐욕으로 이글거렸다.
그는 상대가 물건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해도 무림중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빼앗으려고 하는 물건을 마치 돌덩이 취급하는 남정기의 의도가 못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물건에 대한 그의 욕망은 의혹을 간단하게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남정기의 손에 들린 물건을 잡기 위해 검을 잡지 않은 왼손을 내밀었다.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는 것처럼 빠른 손길이었다.
막 물건에 손이 닿으려던 정균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지며 그의 검이 빠르게 반원을 그렸다.
"따당, 따당"
그의 검에 부딪친 무엇인가가 맑은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튀어나갔다.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것은 흔한 구리 동전들이었다.
동전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는 정균의 눈에 무서운 살기가 어렸다.
"웬 놈이냐?"
"다짜고짜 웬 놈이라니, 입이 험하시구먼.“
일층 객방의 문이 열리며 느긋한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이십 대 중반의 귀공자였다.
긴 머리를 영웅건으로 질끈 묶고 남색의 장삼에는 여인들이나 함직한 패옥이 이곳저곳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패옥들이 부딪치며 맑은 소리가 났다.
다른 사람이 저런 장식을 하고 있었다면 분명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 것이지만 그에게는 무척이나 어울렸다.
여인을 연상시키는 깨끗한 피부에 조각이라도 한 듯 수려한 외모덕이었다.
나타난 귀공자를 본 정균의 안색이 진중하게 변했다.
무림인 중에 몸에 저렇게 패옥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움직일 때 거치적거릴 뿐만 아니라 패옥이 부딪치며 나는 소리는 위치를 숨기기에 치명적인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저런 장식을 하고 다니는 귀공자에 대한 소문을 정균은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귀공자는 정균도 무시하기 어려운 자였다.
“천수미랑(千手美狼) 당엽(唐葉)!”
“호오, 제 이름이 청해까지 알려졌다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무정검객께서 알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당엽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여자였다면 가슴이 떨릴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였다.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안 정균의 안색이 더욱 무거워졌다.
난주에 고수가 속출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사천당가(四川唐家)도 이곳에 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당엽의 나이는 이제 스물 다섯에 불과했지만 정균은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당엽의 가문이 천하에 이름 높은 칠대세가(七大世家)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천당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엽은 당가(唐家)의 후지기수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이라는 당가사룡(唐家四龍)의 일인으로 사천 뿐만아니라 중원 전역에 명성이 높은 암기와 독의 고수였고, 외모와는 다르게 심성이 독해서 눈밖에 난 자는 반드시 손을 본다고 알려진 독심장부였다.
당엽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기보(奇寶)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정균 자신이 청해에서 왔고, 당엽의 가문인 사천당가는 사천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의 당가타에 있다.
청해성이나 사천성이나 모두 감숙성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성(省)이다.
감숙 인근의 고수들이 이미 난주에 도착하고 있었다. 조만간 다른 곳의 고수들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생각을 이어가던 정균은 초조해졌다.
모현을 따라간 형, 정환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당엽이 이곳에 남은 이유는 그와 다를 바가 없음은 삼척동자도 추측이 가능했다.
그 뿐만아니라 당엽도 모현이 눈앞의 사내에게 넘겨준 물건이 진품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모현의 머리가 갑자기 돌지 않는 한 그가 물건을 생면부지의 사내에게 넘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물건의 진품여부를 확인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모현의 잔머리에 오히려 허를 찔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엽이 남았다면 그의 일행 중 누군가는 분명 모현을 따라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당엽보다 신분이 높거나 무예가 강한 자일 것은 자명했다.
정균은 더욱 정환이 걱정되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당엽을 바라보는 정균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당공자, 방해할 생각이오?”
“하하하, 감히 정대협의 일을 방해까지 할 생각이야....단지 저 사내의 손에 들린 물건이 진품인지 여부만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죠.”
당엽은 호탕하게 웃으며 남정기의 손에 들린 물건을 가리켰다.
정균은 지그시 이를 물었다.
당엽은 진품여부를 확인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사내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에 손을 대려한다면 손을 쓸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정균의 시선이 사방을 훑었다.
“다른 분들의 생각도 같은 것이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여기저기서 흠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잠시 후 후원의 문 여러 개가 동시에 열리며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타난 자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후원의 지붕에서 바람처럼 뛰어내리는 사람도 있었다.
남녀노소가 섞인 십여 명의 사람들이 남정기와 정균의 주변에 늘어선 것은 순간이었다.
남정기는 물건을 든 채 내밀고 있던 손을 내리고 나타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중에 객잔에서 보았던 위맹한 용모의 중년인과 미모의 아가씨가 섞여있는 것을 본 그는 내심 혀를 찼다.
그는 용화객잔에 이 많은 무림 중의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든 것을 보며 모현이 물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이미 난주에 소문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난주는 좁은 곳은 아니지만 신법을 익힌 무림인들에겐 그리 넓다고 할 수도 없는 곳이다.
‘이 물건이 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은 건가? 그리고 모현은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머물렀던 것일까?’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의 정체에 대해 일말의 호기심과 함께 모현의 행동에 의아심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사그러들었다.
물건이 진품일 까닭도 없었거니와 설사 진품이라해도 그와는 무관한 물건이었고, 모현이 어떤 생각으로 용화객잔을 찾았든 그가 상관할 일도 아니었다.
그는 기보쟁탈전에 끼여들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정균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길을 가고 싶고, 당신들은 이 물건의 진품여부를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요. 그런데 내가 누군가에게 이 물건을 넘긴다면 이곳에서는 당장 피비가 내릴 듯한 분위기고....게다가 그 피속에 내피가 섞이는 것은 정말 사양하고 싶은 일이라서....처음 생각처럼 이 물건을 당신에게 넘기기는 어려울 듯 한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남정기의 느긋하기까지 한 말을 들은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그의 입에서 나온 내용은 그의 촌스런 외형과는 전혀 딴판이었던 것이다.
정균은 남정기에 대한 첫인상을 바꾸어야함을 알았다.
그도 지금까지 모현과 다를 바 없는 시선으로 남정기를 보았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목을 칠 듯한 이런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저렇게 자연스럽게 말을 한다는 것은 남정기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고수라고 생각할 어떤 징후도 느껴지지는 않으나 칼밥을 먹지 않은 보통사람에게서 저런 침착함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남정기의 여유는 은연중 후원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고, 또한 경계심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나타난
사람들 중 이제는 아무도 함부로 움직일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넌 누구냐?”
“내가 누군지는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그건 그렇고.... 계속 반말할 거요?”
“뭐라고?”
심기가 상한 정균의 눈매가 매서워졌지만 그는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는 눈에 거스르는 자를 그냥 둔 적이 없다고 알려진 자였지만 흥분에 몸을 맡기는 강호초출의 철부지가 아니다.
남정기는 후원에서 모현과 정씨형제가 나누는 대화를 다 들은 후였다. 그럼에도 저렇게 대가 세게 나오는 것이 그의 흥분을 가라앉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