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천명
작가 : 임준후
작품등록일 : 2016.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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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화
작성일 : 16-07-12     조회 : 906     추천 : 0     분량 : 6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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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충 숨을 돌린 듯 하니 하던 얘기 마저 합시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멍해졌다.

 남정기가 말문을 연 것이다.

 후원에 깔렸던 살벌했던 분위기의 김이 단숨에 빠졌다.

 그의 말투는 일장의 지루한 연극을 보는 사람의 그것이었는데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남정기는 위지룡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장중의 사람들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어 보였다.

 “여기서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모두 손해인 걸 잊고 있는 듯 하오만? 내게 화를 내면 무엇을 할 겁니까? 실익이 없지 않습니까? 물건의 진위를 가리고 진품이 아니라면 모씨 늙은이를 쫓아야하는 거 아닙니까? 시간이 지체되면 모여드는 사람들은 당연히 많아질 것이고, 그만큼 물건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가능성도 높아질 듯 한데.......”

 “그럼 소협의 생각은 무엇이오?”

 위지룡은 아직 정균과 남정기의 대화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남정기에 대한 그의 반공대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지금 모습을 보인 분들 이외에도 몇 분이 더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말을 들으니 여기 당공자라는 분과 저기 소노인이라는 분이 물건의 진위를 판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모두 인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물건을 당공자에게 주면 소, 막 두 노인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들이 가만 안 있을 것 같고, 소노인에게 물건을 주는 것은 위지대협이 가만 안 있을 듯합니다.”

 “으드득, 그래서?”

 소요명은 이를 갈며 물었다.

 남정기가 말끝마다 그와 막건을 소노인, 막노인하는 식으로 부르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참을 때였다.

 남정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시간을 더 지체하는 것은 곤란했다.

 남정기를 손보는 것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손을 봐주기로 결심한 자를 제 명대로 살게 내버려둔 적이 없었다.

 그가 사도(邪道)의 인물로 분류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소노인과 막노인이 위지대협을 믿을 수 있다면 나는 이 물건을 위지대협에게 넘기겠소. 그리고 위지대협의 주재하에 당공자와 소노인이 물건의 진위를 판별하는 것이지. 내 생각에 이의가 있다면 말해 주시오. 이의가 없다면 난 이것을 위지대협에게 넘기겠소.”

 막건과 소요명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막건이 비록 위지룡과 손을 섞기 일보직전까지 갔지만 위지룡은 믿을 수 있는 자였다.

 그는 불같은 성격과 무위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만 한 번 입밖에 낸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위지룡은 막건과 소요명 그리고 장중의 사람들을 차례로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진위의 판별이 끝날 때까지 위지모는 물건의 주재자의 위치를 지킬 것을 약속하겠소.”

 “만약 물건이 진품으로 판명된다면?”

 소요명은 어느 틈에 평소의 기색을 되찾은 모습으로 물었다.

 자신이 언제 살기를 뿌렸냐는 듯 소요명의 표정은 천연덕스러워서 위지룡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소요명의 태도에서는 강호를 수십 년 종횡한 노회한 자의 연륜이 묻어났다.

 경륜으로 따진다면 위지룡도 소요명에 비해 못하지 않았고, 또 그는 남의 뜻대로 움직일 사람도 아니었다.

 위지룡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슬며시 남정기를 돌아보았다.

 남정기는 위지룡의 미소를 보며 불안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물건이 진품으로 확인된다면 나는 그 물건을 다시 저 소협에게 돌려주겠소. 이 물건이 다시 저 소협의 손에 돌아갈 때까지 나는 중립을 지키겠소. 그 이후의 쟁탈전은 여러분의 몫이요. 자, 소협! 이리 오시게.”

 남정기는 입맛을 다시며 위지룡에게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묶은 매듭이었다. 그는 물건을 던지고 떠날 생각이었지만 위지룡은 순순히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가 개문령을 위지룡의 손에 건네주었다.

 위지룡의 손은 솥뚜껑처럼 커서 개문령은 그의 손바닥에 숨듯이 쏙 들어갔다.

 물건이 남정기의 손에서 위지룡의 손으로 건네지자 당엽과 소요명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위지룡의 손에 들린 물건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그들은 손으로도 개문령을 만지기는 했지만 의심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엽뿐만 아니라 소요명도 마찬가지였다.

 사자철검 위지룡이 그들의 코앞에 있는 것이다. 위지룡은 그들이 암수로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싶었을 때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소요명이었다.

 “누군지 꽤 공을 들였군.”

 “모현이 물건을 손에 넣은 것은 며칠 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그 사이에 어떻게 이런 물건을 만들었는지 불가사의하군요.”

 소요명의 말을 받으며 당엽은 고개를 들어 위지룡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두 사람의 말을 듣던 위지룡이 말문을 열었다.

 “가짜로군.”

 예상했던 일이라 그다지 놀람은 없는 음성이었다.

 “그렇습니다. 위지대협. 소노사의 말씀처럼 꽤 공을 들이긴 했지만 가짭니다. 개문령은 유성이 타고 남은 금속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은 한철(寒鐵)에 색을 입혀 광을 낸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 자체로도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물건이긴합니다만.”

 “증명할 수가 있나?”

 위지룡의 궁금증은 상황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의 궁금증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에 내력을 주입해 힘주어 쥐어 보십시오. 위지대협의 내공이라면 한철에 손상을 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개문령은 신병이기로도 흠집을 낼 수 없고, 내공으로 손상을 가하려면 백년 내공도 부족하다는 얘기를 윗분들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물건에 손상이 생긴다면 당연히 그것은 가짜입니다.”

 당엽의 말에 위지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개문령을 노려보던 그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개문령의 모습이 그의 커다란 손바닥 사이로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의 굵은 눈썹이 용트림을 하듯 꿈틀거렸다. 개문령을 움켜쥔 그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흐음.”

 잠시 후 옅은 침음성과 함께 그가 말아쥐었던 주먹을 펴자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위지룡의 손안에 들렸던 개문령이라 적힌 패(牌)는 본래의 형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곳엔 밀가루 반죽처럼 우그러진 뭉툭한 쇳덩이가 있을 뿐이었다.

 우그러진 쇳덩이를 보는 막건의 눈에 놀람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놀란 것은 개문령이 가짜로 밝혀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철(寒鐵)은 일반의 철과는 다르다.

 얼음으로 뒤덥힌 북방의 철광에서만 생산된다는 한철은 그 단단함이 일반 철의 다섯 배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한철로 만들어진 병장기는 무림인들에게 보물취급을 받는 것이 현재의 무림인데 그런 한철로 만든 물건을 순순한 내력으로 저렇게 고철 덩어리로 만들려면 족히 오십 년 내공이 필요했다.

 지금 위지룡이 보여준 한 수에서 드러난 수준은 막건 자신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온 신음성은 짧게 끝났다.

 사람들은 눈을 번뜩이며 몸을 날렸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어지럽게 났다.

 당엽과 정균의 모습이 가장 먼저 후원에서 사라졌다. 그들을 따라 후원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사라지는데는 촌각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모현이 남긴 물건이 가짜라고 밝혀진 이상 이곳에 있는 것은 시간낭비였다.

 사라진 사람들 중엔 막건과 소요명도 있었다. 하지만 용화객잔의 후원을 떠나기전 소요명은 한마디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말문을 여는 그의 시선은 남정기를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담긴 얼음처럼 차가운 살기가 후원의 공기를 한겨울처럼 냉각시켰다.

 “꼬마, 곧 다시 보게 될 거다. 조금 한가한 시간에! 그때 오늘 나누지 못한 나머지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남정기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사람 막은 적 없소. 언제든지 오시구려. 키작은 노인!”

 남정기의 말에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걸음을 멈추려는 소요명의 소맷자락을 잡은 사람은 막건이었다.

 그는 눈짓으로 소요명을 말리며 몸을 날렸다.

 한마디도 지지 않는 젊은 녀석을 손봐주고 싶은 생각은 그도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가야할 때인 것이다.

 살기가 철철 흐르는 눈으로 남정기를 한번 째려본 소요명이 막건을 따라 후원을 떠났다.

 후원엔 위지룡과 남정기, 그리고 위지룡의 사질이라는 여인 세 명만이 남아 있었다.

 위지룡은 입맛을 다시며 손에 들고 있던 고철덩어리를 남정기에게 툭 던졌다.

 “모현이 소협에게 주었으니 소협 것이오. 구워먹든 삶아먹든 마음대로 하시게.”

 남정기는 다시 그의 손에 들어온 고철을 보다가 싱긋 웃으며 품에 집어넣었다.

 한철은 쇠 자체만으로도 꽤 돈이 된다. 그는 여행에 필요한 경비가 필요했다.

 중원의 여인들이 소문처럼 예쁜지 확인하기 위해 들린 화화원에서의 삼일이 그의 경비중 삼분지 일을 뺏어 갔다. 그리고 그가 가야 할 목적지는 아직도 멀었다.

 “나는 위지룡이라고 하오. 강호에서는 사자철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오. 이쪽은 내 사질녀 운지란이고. 소협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오?”

 위지룡은 자신과 그의 옆에 서 있는 운지란을 소개한 후 남정기의 대답을 기다렸다.

 “남정기라고 합니다. 들으신 적이 없는 이름일 겁니다. 저는 중원무림에서 활동한 적이 없습니다.”

 남정기는 고철을 품에 넣기 위해 늘어뜨렸던 피풍의 한쪽 끝을 잡아 앞을 가리며 말했다.

 위지룡이 어떤 의도에서 그의 이름을 물은 것인지 짐작 못할 바는 아니었다.

 아마도 이름으로 그의 정체를 추측해보려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그는 중원에서 활동한 적이 없었다.

 혹시 위지룡이 흔히 중원무림인들이 세외무림이라 부르는 지역의 정세에 정통하다면 그의 이름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역시 위지룡은 남정기의 대답에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강호의 일류고수들 사이에서 저렇게 태연자약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강초초출의 풋내기일 수는 없었다.

 분명 말과 행동을 보면 강호경험이 있는 자였다. 게다가 위지룡은 남정기에게서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남정기에게 반공대를 계속하는 진정한 이유였다.

 그에게 그런 인상을 준 인물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무언가 생각할 여지가 있는 일이었다.

 “사숙, 추풍서 모씨 늙은이를 잡아야죠?”

 그때 위지룡의 옆에 서 있던 운지란이 초조한 기색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미인의 음성을 묘사할 때 옥구슬이 쟁반을 굴러가는 목소리라는 표현이 있는데 운지란의 음성이 그러했다.

 듣기좋은 맑은 음성이었다. 지금은 초조함 때문에 약간 흐트러져 있었지만.

 위지룡은 운지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 움직임 생각은 없는 듯했다.

 “모현은 수중의 물건을 쉽게 남에게 빼앗길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그 물건은 그 혼자만의 것인 것 같지도 않고.”

 “예? 무슨 말씀이세요, 사숙?”

 위지룡은 운지란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남정기를 응시하며 물었다.

 “소협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저는 무슨 말씀이신 지 잘 모르겠습니다.”

 남정기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위지룡은 혀를 찼지만 상대가 그와 더 대화를 나눌 의사가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도 시간이 없기는 막건 등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모현의 행사에는 의문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지체할수록 개문령의 행방은 점점 더 그에게서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또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오. 사해(四海)가 동도(同徒)라! 언젠가 다시 보게 되길 바라오.”

 위지룡은 남정기에게 포권을 한 후 운지란을 끌고 사라졌다.

 운지란은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남정기를 흘낏거리며 객잔을 후원을 나섰다.

 예쁜 입술이 꼬물거리는 것이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그녀도 상황이 한가롭게 상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쉬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위지룡을 따라나서야만 했다.

 남정기는 위지룡에게 마주 포권을 한 후 걸음을 옮겼다.

 꼬일 듯 했던 일련의 상황은 그가 원했던 대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그는 애초부터 이곳을 떠나려했던 사람이다.

 마구간으로 통한 후원의 문을 통과하던 남정기는 고개를 돌려 후원의 객방 지붕을 훑었다.

 다시 정면을 향하는 그의 눈매는 가늘게 찌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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