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금선탈각(金蟬脫殼)
“다가닥, 다가닥”
어둠에 잠긴 난주성내의 길을 따라 규칙적인 말발굽소리가 울려퍼졌다.
최근 연이어지는 살인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때문이진 인적이 끊어진 거리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달빛에 드리워진 말의 그림자는 거대했다.
본래 다른 말보다 어깨가 한자는 더 높은 말인 데다가 달빛이 말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말은 전신이 검은 털로 뒤덮여 있었고, 안장에 타고 있는 사람도 전신을 검은 피풍으로 감싸고 있어서 어둠과 일체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용화객잔을 나선 남정기였다.
“흑운아, 화화원의 심부름꾼이 말해준 개구멍이 정말 있다고 생각하느냐?”
남정기는 흑운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흑운이라 불린 말은 남정기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큰 머리를 끄덕였다.
“허긴, 몇 푼의 동전값으로 해준 말이니 거짓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만은....”
남정기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달빛은 창백할 정도로 푸른빛이었다.
남정기는 난주에 들어서자마자 들린 화화원에서 심부름꾼에게 구리동전 몇 문을 주고 난주성의 개구멍에 대해 물어보았었다.
그는 어디를 가든 성으로 이루어진 지역에서는 개구멍에 대해 알아보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가 언제나 칼날위에서 살아가는 무인이기에 갖게 된 습관이었다.
어느 곳에서든 우선 퇴로를 확보하라는 것은 그를 가르친 두 번째 사부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흑운 때문이었다.
성은 야간에 출입을 통제한다.
보통 술시(戌時)에 성문을 닫고 다음날 아침 묘시(卯時)에 문을 연다.
성문이 닫혔을 때도 그 혼자 몸이라면 성벽을 넘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흑운을 데리고 성벽을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국경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성벽 높이는 삼 장에 달한다.
흑운이 신마(神馬)소리를 듣는 말이긴 해도 삼 장 높이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 때문에 남정기는 성에 들어서면 개구멍을 먼저 알아놓는 것이다.
성마다 흑운이 통과할만한 개구멍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리고 화화원의 심부름꾼은 난주성에 흑운이 통과할만한 개구멍이 있다고 말했었다.
남정기가 화화원의 심부름꾼에게 들은 개구멍을 발견한 것은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지나온 인가는 그의 백여 장 뒤에 있었다.
난주성은 고원지대에 건축된 성이라 언덕과 야산을 따라 성벽을 쌓은 부분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돌로 된 야산의 아래로 이어진 경사면 한 구석에 흑운이 무릎을 구부린다면 간신히 통과할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그 개구멍을 출입한 지 꽤 된 듯 개구멍은 그 앞에 돌을 쌓아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말에서 내려 흑운을 엎드리게 한 후 흑운의 엉덩이를 밀어 개구멍을 통과한 남정기는 다시 일어선 흑운의 등에 올라탔다.
그는 개구멍을 보며 피식 웃었다.
“명(明)의 정세가 혼란스럽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도가 심한 걸. 국경 부근의 성이 이 지경이라니 생각보다 더하군.”
흑운은 덩치가 보통의 말보다 훨씬 크다.
그런 흑운이 통과할 수 있는 구멍이었으니 그가 지나온 개구멍은 중무장한 병사 한 명이 무리없이 통과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그런 구멍을 보수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은 그 성에 있는 관리들의 정신상태와 병사들의 군기(軍氣)가 어떤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일이었다.
성을 벗어난 남정기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흙먼지가 날리는 황량한 평야였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나무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두두두두두두!”
남정기를 태운 흑운은 긴 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성안에만 있어서 답답했던 모양이다.
남정기가 뒤집어쓰고 있던 두건이 훌쩍 등뒤로 젖혀지고 걸치고 있던 검은 피풍이 바람을 맞아 지면과 수평으로 부챗살처럼 활짝 펼쳐졌다.
달리는 흑운의 속도는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한 줄기 검은 빛 번개가 지면을 치달리는 듯 했다.
흑운은 한혈마의 혈통을 잇고 있는 말로 신마(神馬)로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은 속도와 지구력을 갖고 있었다.
남정기는 그런 흑운을 제지하지 않았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살갗을 찢어놓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얼굴에 부딪쳐왔지만 간만의 질주여서인지 그의 가슴도 후련해졌다.
난주성의 동문(東門)앞으로 나 있는 관도(官道)에 들어선 후에도 흑운의 질주는 멈출 줄을 몰랐다.
야심한 시각이라 인적이 끊긴 관도는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이 전혀 없었다.
흑운이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서서히 속도를 줄인 것은 족히 칠팔십 리를 쉬지않고 달린 후였다.
평야는 어느 틈엔가 끝이 나 있었고, 관도 양옆은 울창한 나무들이 늘어선 숲이었다.
“왜 멈추느냐?”
남정기는 흐트러진 두건과 피풍을 끌어당겨 머리와 몸을 덮으며 흑운에게 물었다.
흑운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탐스러운 검은 갈기가 물결치듯 흔들렸다.
“따라오는 자들이 힘들 것 같으니까 쉬어가자는 뜻이냐?”
그의 말에 흑운의 고개가 아래위로 흔들렸다. 정말 말을 알아듣는 듯했다.
“녀석, 그들이 적의를 갖고 있지 않은 듯 해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 사람이다. 내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그는 말을 하며 흑운의 옆구리에 슬쩍 박차를 가했지만 흑운의 걸음은 빨라지지 않았다.
“다가닥, 다가닥”
흑운의 마음이 바뀔 것 같지 않자 남정기는 헛웃음을 지으며 흑운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쳤다.
“그래, 네 맘대로 해봐라. 녀석, 이제는 머리가 굵었다고 주인의 말도 듣지 않는구나."
남정기의 귀에 숲속의 나뭇잎들이 무언가에 쓸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흑운이 천천히 걷기 시작한지 일각(一刻)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자, 이제 네 뜻대로 된 듯한데....소란을 한 번 겪어볼 작정이냐?”
남정기는 흑운의 목덜미에 상체를 붙였다.
그의 귓속말을 알아들은 듯 흑운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그의 음성엔 마치 협박이라도 하는 듯한 미묘한 울림이 있었다.
흑운은 이 털털하고 느긋하기까지한 주인이 성질이 나면 얼마나 거칠고 험해지는지 그동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의 손에 길들여질 때도 식음을 전폐한 것은 물론 잠도 자지 않는 7일 동안의 사투를 겪은 바가 있지 않았던가.
절대 포기할 줄 모르는 독종중의 독종이 자신의 주인이었다.
게다가 그에게 사로잡혀 길들여질 당시 얼마나 험하게 두드려 맞았는지 그 때의 기억을 털어 버리고 오백여 마리의 야생마를 이끌던 신마(神馬)의 기상을 되찾는데 걸린 시간만 3년이었다.
지난 기억을 되살린 흑운의 건장한 네 발굽이 땅을 박차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지면이 흑운의 네 발굽을 밀어내는 듯 했다.
남정기를 태운 흑운은 다시 한 줄기 검은 바람으로 화했다.
긴 검은 머리와 피풍을 휘날리며 상체를 숙인 남정기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순수한 장거리 질주(疾走)만을 따질 때 현존하는 무림의 고수 중 흑운을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흑운의 속도와 지구력은 하늘이 부여한 천부의 능력인 것이다.
남정기는 자신의 뒤를 쫓는 자들에게 일말의 미안함을 느꼈다.
놀리려고 한 것은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곧 사라졌다. 어차피 다시 볼 일이 없는 자들이었으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의 모습은 곧 까마득히 멀어지더니 한 점이 되었다.
일인일수(一人一獸)의 모습이 지평선을 넘어 사라진지 얼마 되지 않아 남삼을 걸친 한 사내가 관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고, 매서운 겨울 날씨인데도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는 삼십대 중반의 장년인이었다.
“헉헉, 빌어먹을 놈의 말! 더럽게 빠르네!”
사내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남정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흑운이 눈앞에 있다면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 눈빛이었다.
사내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추적과 경공에 능해 그동안 이런 낭패를 당한 경우가 별로 없는 그였는지라 마치 짐승에게 농락을 당한 듯한 지금의 상황은 그의 기분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사내는 그렇게 잠시 숨을 고르며 남정기가 사라진 관도를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므로 이제는 보고를 해야했다.
“휴우....엄총관님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사내는 낭패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최근 수년 동안 그는 상대를 놓쳐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왔는지 그 정체도 불분명한 촌뜨기의 추적에 실패한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사내는 이번 실패를 그다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기색은 아니었다.
남정기의 행태는 특이한 구석이 있었지만 그는 이름없는 촌뜨기에 불과했다.
대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고, 남정기의 행로로 보아 개문령과도 상관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비록 추적엔 실패했지만 그것이 사내에 대한 지금까지의 평가를 뒤바꾸게 할 만한 무게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어쨌든 보고를 빨리 해야겠지. 이 방향으로 가면 정서(定西)와 천수(天水)를 거쳐 섬서(陝西)로 들어서게 된다. 그곳의 분타들이 그자를 찾아낼 거다.”
사내는 왔던 길을 되짚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건 그렇고 정말 탐나는 말이야. 저런 촌놈이 탈 말이 아닌데.... 거참 아깝군.”
흑운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는 그의 등뒤로 검푸른 달빛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난주성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사내는 알지 못했다.
그 외에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는 사람이 숲속에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남정기를 추적한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