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미행
“후욱, 후욱”
검끝으로 땅을 짚은 채 쓰러져 있는 왜소한 체구의 흑의인을 바라보고 있는 정균의 숨결은 거칠었다.
단정하던 그의 머리카락은 땀에 절고 풀어 헤쳐진 모습으로 그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눈은 경악에 가득 차 있었다.
만일 그를 도운 사람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누워 있는 사람은 상대가 아니라 그였을 것이다.
“허허, 이것 참. 이 자는 대체 누구이기에 모현으로 역용을 하고 있는 것인지.....?”
혀를 차며 말문을 연 사람은 정균과 일장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마의를 입고 있는 사십대 중반의 사내였다.
육척의 당당한 체구에 장중한 기도를 갖고 있는 중년인의 옆구리에는 손잡이에 매화문양이 선명한 한 자루 검이 걸려 있었다.
중년인이 중얼거릴 때 거친 숨결을 가다듬은 정균이 검을 거두고 중년인을 향해 포권했다.
“도움을 감사 드립니다.”
“별 말씀을. 모현의 흉내를 내는 자가 누군지 궁금해서 끼여들었을 뿐입니다.”
중년인은 정균의 정중한 인사에 마주 포권하며 말했다.
그의 말에 정균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분명 정균의 흔적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숲으로 뛰어들었었다. 그리고 흔적을 쫓아 추적한 그는 달아나고 있는 모현을 발견했고 그의 발길을 묶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계속 달아나려는 모현과 그 사이에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격투.
그는 곤륜파에서도 인정한 일류고수였다. 그러나 모현과의 격투에서 그는 죽을 뻔했다. 모현으로 변장하고 있는 자는 무서운 고수였던 것이다.
“저는 청해에서 온 정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견식이 일천하여 대협이 누구 신지 모르겠습니다.”
정균은 중년인에게 궁금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정균의 말에 중년인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청해쌍검객 중 한 분을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우일환(宇一環)이라고 합니다.”
중년인, 우일환의 이름을 들은 정균의 눈에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입을 여는 그의 태도가 더욱 정중해졌다.
“화산오검(華山五劒)의 둘째, 비천검(飛天劒) 우대협이셨군요.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우일환은 정균의 인사에 손을 저으며 말을 하려했다.
입을 열려고 하던 그의 눈빛이 살짝 변하며 시선이 왼쪽을 향했다.
빠르게 다가서고 있는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우일환의 기색이 변한 것을 안 정균의 시선도 우일환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향했다.
우일환보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그도 삼십여 장 밖에서 빠르게 접근하고 있는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도 허명을 얻은 자는 아니기에.
숨 두어 번 쉴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나무사이를 통과하며 일남일녀가 나타났다.
고대한 체구의 위지룡과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운지란이었다.
자리에 나타난 그들은 우일환을 보자 입가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사형!”
“이숙부!”
두 사람을 본 우일환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왔구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시선을 돌려 쓰러져 있는 자를 잠깐 훑어본 후 우일환에게 묻는 위지룡의 얼굴은 의혹으로 물들어 있었다.
“흠...누군가 모현을 돕고 있는 자가 있는 듯 하다. 이 짧은 시간에 모현으로 역용한 자를 내세울 수 있는 자라면 범상한 자는 아니겠지. 게다가 저자의 무공 또한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우일환의 말속엔 모현을 돕고 있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며 조직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위지룡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용화객잔에서 모현이 개문령의 위조품을 남겨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사형의 말씀처럼 상황이 기묘하군요.”
“나도 보았다.”
우일환의 대답에 위지룡의 눈이 빛났다.
“사형도 그 자리에 계셨습니까?”
그의 질문에 위지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현의 흔적을 발견하고 계속 추적하면서 이상한 점이 몇 가지 발견되었다. 그 때문에 그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지.”
우일환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위지룡은 왜 우일환이 입을 닫았는지 알아 차렸다. 장내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인인 정균이 있는 자리에서 하기 곤란한 말이기에 우일환은 입을 닫은 것이다.
분위기를 눈치 챈 정균이 그들을 향해 포권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모현으로 위장한 자를 추적하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그는 정환을 만나 다시 모현을 추적해야 했다.
“천하는 창해처럼 넓기도 하지만 겨자씨처럼 좁기도 하지요. 다시 뵙게 될 겁니다.”
우일환은 정균의 인사를 받았다.
정균이 떠난 후 위지룡은 우일환을 바라보았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눈빛이었다.
위지룡의 눈빛을 본 우일환이 입을 열었다.
“개문령은 천하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전설을 담고 있는 물건이다. 하지만 그 물건에 담긴 비밀은 천하를 좌우하는 사람들 외에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 정도의 물건이 모현같은 자의 손에 우연히 들어갈 가능성은 만에 하나도 없다.”
그의 말을 들은 위지룡은 굵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우일환의 말은 끝나지 않았기에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장문인께서 우리를 내려보낸 뜻은 그 물건이 가짜임이 분명한지 확인해보라는 뜻에 불과하다. 사제, 너는 이번 일에 너무 깊게 개입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위지룡의 호방한 얼굴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우일환이 용화객잔에서 상황의 중심에 서 있던 그를 보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사형.”
“감숙을 지배하는 공동파의 인물들이 이번 일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의미는 작지 않아.”
우일환의 말에 위지룡은 무언가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구파일방의 일원이면서 감숙성의 패자인 공동파의 인물들은 그동안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이것은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섬서성에 있는 화산에서도 이미 도착한 난주였다. 같은 감숙성의 남부에 있는 공동산에서 난주까지는 말을 달리면 사흘거리도 되지 않는다.
말을 마친 우일환은 위지룡과 꿀먹은 벙어리처럼 옆에서 다소곳이 서 있는 운지란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흑의인의 시신만이 남은 숲속에 귀기서린 정적이 내려앉았다.
“짹, 짹, 짹, 짹”
남정기는 이름 모를 새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깊지 않은 동굴안으로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그는 담요처럼 깔고 잤던 피풍이 어느 틈에 온 몸을 둘둘 말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피식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간밤에 숲의 마른 나무를 모아 피워놓았던 모닥불은 희뿌연 재만을 남기고 있었다.
지난밤은 꽤 추웠다. 계절은 바야흐로 본격적인 겨울을 향해 달려갈 채비를 하는 듯했다.
그는 한서불침(寒暑不侵)에 근접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자연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가볍게 목을 비틀며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일정한 순서를 갖춘 동작으로 관절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손끝을 움직여 몸을 풀어나가는 그의 동작은 완만하면서도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손가락 관절부터 손목, 팔꿈치, 어깨, 목, 허리, 다리 관절의 순서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던 그의 육체가 어느 순간 믿어지지 않는 각도로 꺾이기 시작했다.
그의 팔과 다리 관절이 부러지듯 밖으로 꺾이고, 등이 무릎 뒤쪽과 밀착하며 그의 머리 뒷부분이 발뒤꿈치에 닿았다가 벌어진 다리 사이로 머리가 빠져나왔다.
뼈가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이각(二刻) 동안 그의 자세는 일흔 두 번 변했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갈 때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좋군.”
그의 눈빛은 활력이 가득해서 그가 행한 것이 단순한 몸풀기가 아닌 동공(動功)에 속하는 진기운행법(眞氣運行法)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행한 것과 같은 진기운행법은 중원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의 몸이 그와 같이 상식을 무시한 방향으로 굴절되는 기법은 무예에 해박한 무림의 원로들이라해도 그 연원을 제대로 추측해내지 못할 터였다.
그가 시행하고 있는 무공은 그의 첫 번째 사부가 전해준 유마천룡진기(唯魔天龍眞氣)였다. 그러나 유마천룡진기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그의 사부가 말해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 공능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하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구단공(九段功)으로 이루어진 유마천룡진기의 제 일단공 일부를 운행한 것만으로도 그의 전신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최적의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남정기는 상쾌한 표정으로 동굴 한쪽에 놓인 보따리를 풀어 난주의 장터에서 구한 건량을 꺼내 씹었다.
털썩 주저앉아 건량을 씹고 있는 그의 식사방법은 기괴했던 몸놀림만큼이나 특이했다.
건량은 쇠고기를 바짝 말린 것으로 그의 손바닥만했는데 그는 그것을 조금씩 뜯어 입에 넣고는 완전히 풀어질 때까지 씹고 또 씹었다.
손바닥만한 건량이 없어지는데 일각이나 걸렸다.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답답해서 숨이 막힐 정도로 느린 속도였다.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곳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이 보았다면 남정기가 건량을 먹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자가 아니라는 것과 최소의 음식으로 최대의 영양을 섭취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식사를 마친 남정기는 잠을 자며 풀어놓았던 도(刀)를 허리에 걸어 뒤로 돌린 후 피풍을 한쪽 팔에 감고 동굴을 나섰다.
동굴앞은 방원 십여 장 정도의 평지였고, 평지 너머로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 보였다.
그가 잠을 잔 동굴의 뒤쪽으로는 구릉이 점점 높고 가파르게 변하고 있어서 그가 서 있는 곳이 산으로 들어서는 입구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입과 코로 스며드는 아침 공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시원했다.
크게 숨을 들이킨 남정기는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느낌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겨울을 좋아했다.
겨울은 적당하게 몸을 긴장시키고 정신을 늘 깨어있게 해주는 계절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화화원을 나선 후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꺼칠해진 수염이 그의 미소를 따라 꿈틀거렸다.
평지의 한복판에서 긴 갈기를 늘어뜨리고 이야기속의 천마(天馬)라도 되는 양 늠름한 모습으로 동굴의 입구를 지키듯 서 있던 흑운이 남정기를 보고는 날 듯이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가슴에 머리를 비볐다.
“녀석, 푹 쉰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