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천명
작가 : 임준후
작품등록일 : 2016.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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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화
작성일 : 16-07-14     조회 : 668     추천 : 0     분량 : 5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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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장

 스치는 인연

 

 

 

 

 흑운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안장에 앉아 있는 남정기의 신형이 잔잔한 강물위를 흘러가는 쪽배처럼 작지만 규칙적인 출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왼손에 잡은 고삐를 느슨하게 늘어뜨리고 흑운이 전진하면서 천천히 그의 뒤로 물러나고 있는 주변의 풍광에 가끔씩 시선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자연을 감상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하나둘 나뭇잎을 떨구며 벌거벗어 가고 있는 주변의 숲은 황량해서 찬바람도 간혹 부는 이런 날씨엔 아무래도 풍광을 감상하기 어렵기도 했다.

 관도엔 그와 흑운만이 길을 가고 있지는 않았다.

 반 시진쯤 전 남정기는 그의 앞을 걸어가고 있는 십여 명의 행인들을 만났다.

 그 중 일곱 명은 남녀노소가 섞인 두 패의 가족이었고 세 명은 중년의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함께 길을 가고 있기는 했지만 서로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 일행은 아닌 듯 했다.

 그들은 모두 작든 크든 보퉁이를 하나씩 어깨에 매거나 등에 짊어진 것이 먼 길을 가는 행색들이었다.

 남정기는 그들과 자연스럽게 보조를 맞추었다.

 급한 일도 없었고 일부러 그들을 떼어놓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자신의 행적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귀찮음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지 상대가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그의 성격은 상황을 모두 계산하고 움직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필요할 때는 머리를 쓰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언젠가 그의 부재(不在)를 그들도 알게 될 것이고 그땐 그들도 움직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 걱정할 일도 아니었고, 설사 그들이 움직인다 해도 그는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무언가를 걱정하며 머리를 굴리기보다는 그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쪽을 택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사람이었다.

 그와 길을 같이 가게 된 사람들은 처음엔 자신들의 행렬에 합류하는 그를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검은 피풍으로 전신을 감싸고 역시 검은 두건을 눈썹밑까지 눌러쓰고 있는데다가 흑단처럼 검은 윤기가 전신에 흐르는 거대한 말위에 타고 있는 언뜻 보아도 장신인 사내.

 남정기와 흑운의 모습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경계심과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세상은 어지러워지고 있어서 길에서 만나는 낯선 자가 언제 강도로 변할지 모르는 것이 작금의 세태였다.

 하지만 반 시진 정도가 흐른 지금 그들의 경계심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남정기의 태도에서 그가 자신들에게 위험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데 그 사실을 알게 해 준 사람은 이제 십여 세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꼬마 여자아이였다.

 “아저씨, 이 말 몇 살이에요?”

 계집아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이 동그랗고 코가 낮았다.

 요모조모 뜯어보아도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었고, 귀엽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아이의 천진난만한 표정은 사람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흑운과 남정기를 번갈아 쳐다보는 아이의 눈빛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호기심과 놀라움이 가득한 눈빛이다. 아마 흑운처럼 커다란 덩치의 말은 처음 보는 듯했다.

 남정기는 그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삼시 세끼 끼니를 찾아먹을 형편은 못되는 듯 아이는 광대뼈가 높게 불거지고 볼은 푹 꺼져 있었다.

 남정기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 녀석은 아마 다섯 살 정도 되었을 거다. 이 녀석이 태어날 때부터 내가 옆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서 나도 이 녀석의 나이를 정확하게는 잘 모른다.”

 “이렇게 큰데 다섯 살밖에 안되었어요? 저희 옆에 살던 장씨 아저씨네도 말이 한 마리 있었는데 이 말에 비하면 반도 안됐었는데. 이 말은 어떻게 이렇게 큰 거예요?”

 아이는 신기한 듯 흑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아이의 옆에서 걷던 삼십 중반의 아낙네가 불안한 표정으로 남정기를 흘깃거리며 아이의 손을 잡아끌었지만 아이는 흑운의 옆에서 떨어져 걸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낙네도 남정기가 아이에게 보내는 담담한 눈길을 본 후로는 그가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아이를 강제로 흑운의 옆에서 떼어내려는 행동을 슬그머니 그만두었다.

 “이 녀석의 부모가 덩치가 커다랬거든. 그래서 그들의 자식인 이 녀석도 덩치가 커다란 거지.”

 “아하!”

 아이는 남정기의 말을 이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남정기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아이는 아이였다. 그가 한 말은 정답이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아무런 알맹이도 없었다.

 흑운의 외모가 남다른 것은 당연히 핏줄때문일 것이지만 남정기도 흑운이 어떤 핏줄을 이었는지 모르니 아이에게 해 줄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너는 어디로 가는 길이냐?”

 “몰라요.”

 아이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남정기는 자신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아이의 옆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초라한 행색의 삼십대 부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작은 키에 마른 몸집이었고 둘 다 보퉁이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간단한 여행을 하는 사람의 그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남정기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들은 아마도 고향을 떠나 살 곳을 찾아가는 사람들인 듯 싶었다. 고향을 떠난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가 알 필요는 없었다. 알아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는 잠시 시무룩했지만 금방 활기를 되찾았다. 천성이 밝은 아이였다.

 남정기는 아이의 이런저런 질문에 짤막하지만 부드럽게 답해주며 길을 갔다.

 친화력이 있는 아이여서 짧은 시간동안 그는 아이와 많이 친해졌다.

 남정기는 흑운의 등에서 내렸다. 어린아이가 걷고 있는데 자신만 말을 타고 가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검은색 일색인 그와 자신의 이름을 아홍이라고 밝힌 아이가 보조를 맞추어 걷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남정기도 아홍도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홍은 그런 것에 신경쓰기엔 너무 어렸고 남정기는 본래 남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홍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걸음을 옮기던 남정기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그의 눈이 향한 오른 편의 숲속에 흐릿한 회색 그림자가 무서운 속도로 나무와 나무 사이를 통과하고 있었다.

 회색 인영은 두어 번 눈에 띄는 듯 하더니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인영의 인기척이 남정기의 신경을 건드렸던 것이다.

 ‘무림인?’

 남정기는 잠시 그가 누구인지 생각하려다가 멈추었다. 그와 상관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본 회색의 인영은 평범한 마의를 입고 등에는 봇짐을 지고 있었다.

 짚으로 엮은 모자를 턱 아래까지 푹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여서 생김새를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질풍처럼 숲속을 통과하고 있었다.

 

 

 한 걸음이 삼장 여에 달하는 강량(姜亮)의 전진속도는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 그는 그 속도로 벌써 다섯 시진 째 달리고 있었다.

 같은 무인이 보더라도 놀랄 정도의 속도요 지구력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본가에서 파견된 아홉 명 중 신법으로는 제일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였기에 그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움직이던 강량의 신형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멈추었다. 초립을 푹 눌러쓰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턱밑에 고여있던 땀방울 몇 개가 떨어지는 것이 피로를 느끼는 듯 했다.

 그는 시선을 들어 앞에 놓인 산을 바라보았다.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관도 양편으로 백여 장은 됨직한 절벽들이 연이어 있어서 험해 보이는 산이었다.

 그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법을 펼치지 않는다고 해도 일반인이 달리기를 해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와 일행들은 본가를 떠나며 개인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가문의 정보망이 그들 서로간의 행로를 통제하고 있어서 언제든 합류할 수 있었지만 함께 움직이는 것은 당세를 지배하는 거대세력들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택한 방법이었다.

 그는 지금 난주에서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목표로 하고 있는 자가 그렇게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각 여를 걸어가던 그가 산 정상을 넘어 하산길을 얼마 정도 걸어내려 왔을 때였다.

 초립속 그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리고,

 “어이, 뭐가 그리 바빠 뛰어가시나. 잠깐 나 좀 보고 가시게, 손님.”

 불량기가 가득한 음성이 숲속에서 들려오는 가 싶더니 강량의 전면에 십여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낡은 짐승가죽 옷을 걸치고 언제 씻었는지 모를 정도라 얼굴에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사내들은 손에 대충 만든 창이나 몽둥이를 들고 있었는데 개중에 서넛은 낫이나 박도를 들고 있었다.

 흔히 산적 혹은 녹림이라고 불리는 초적(草賊)의 무리다.

 어지러운 시절이라 유민이 늘고 초적도 많아지고는 있다지만 그런 자들과 이곳에서 부딪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강량이었다.

 그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갈 길이 바빴다. 이런 자들과 실랑이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강량은 앞을 막고 있는 자들을 무시하고 길을 가려 했다.

 박도를 들고 있던 자가 그런 강량을 보더니 그 앞을 막아섰다.

 “이런 예의없는 놈을 봤나! 정중히 초청을 하는데 거절을 해! 좋게좋게 말로 할 놈이 아니로구나!”

 그는 손에 쥔 박도를 위협적으로 휘둘러 휭휭하는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말했다.

 그는 투박한 얼굴에 눈에 실핏줄이 얼기설기 얽혀 있어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험악한 인상을 갖고 있었는데 거기에 더해 박도까지 휘두르는 모습은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 백성들에게나 통하는 위협이었다.

 “꺼져!”

 강량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짧게 내뱉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내들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등에 뭔가 있어보이는 봇짐을 매고 있어 길을 막아서긴 했지만 상대는 평범 그자체인 사내였다. 그런 사내가 간이 얼마나 크길래 그들을 이렇게 상대하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나면 두렵거나 화가 나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리고 사내들은 화가 나는 쪽이었다. 강량의 어디에도 두려워할 구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 일단 패대기를 쳐놓고 말을 풀어가야 할 놈이로세.”

 박도를 든 사내의 말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사내들이 강량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강량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오는 도중 보았던 십여 명의 백성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이들을 그냥 곱게 보내준다면 이자들은 분명 그가 보았던 사람들을 상대로 다시 산적질을 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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