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를 든 산적 열한 명을 그 짧은 시간내에 처리했다는 것은 손을 쓴 사람의 솜씨가 일류라는 것을 뜻했다.
무림중의 일류고수가 직접 손을 쓰는 장면을 보는 것은 같은 무림인들에게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곳은 용화객잔에서와는 상황이 달랐다.
산적을 처리하는 무림인이라면 그가 옆에 있다해도 그때처럼 휩쓸릴 일도 없는 것이다. 그가 아쉬워할 만 했다.
산적들 중 제일 뒤에서 서로를 부축한 채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이 남정기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한 번 주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곧 숲속으로 사라졌다.
“혹시 무림인이십니까?”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길을 걷던 중년의 사내들 중 한 명이 남정기의 눈치를 보며 주저하다가 물었다.
남정기는 그 사내를 일별한 후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침묵에 찔금한 사내도 입을 다물었다.
남정기가 정말 무림인이라면 그의 질문에 미주알고주알 답변할 리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산을 다 내려오자 관도는 다시 넓어지며 두 갈래로 갈라졌다. 정면으로 나 있는 길은 정서(定西)로 가는 길이고, 남서쪽으로 나 있는 길은 탕창(宕昌)으로 가는 길이다.
남정기가 섞인 일군의 사람들이 중간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마을을 거쳐 정서(定西)에 도착한 것은 신시(申時)가 다 지나갈 무렵이었다.
정서는 난주에서 섬서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곳이다.
“아저씨, 함께 가실 거죠?”
아홍(兒紅)은 기대에 찬 눈으로 남정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정서를 관통하는 대로를 걷는 중이었다.
며칠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그들의 걸음을 따라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남정기는 두건을 뒤로 젖히고 있었다.
꺼칠한 수염이 턱을 휘감고 있어서 뚜렷한 얼굴선이 조금 무뎌진 탓인지 좀 더 부드러워진 인상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콧등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다. 여기서 헤어져야겠구나. 아저씨는 갈 길이 멀어서 이제는 말을 타고 달려야 하거든.“
그의 대답에 아홍은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발끝을 보았다.
아홍이 그와 함께 한 시간은 몇 시진에 불과했지만 아이는 그에게 정이 많이 든 상태였다. 집을 떠난 외로움이 낯선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게 했을 것이다.
남정기는 미안했지만 더 이상 아홍과 보조를 맞추기는 곤란했다.
아홍의 부모는 정서에서 하룻밤을 묶어갈 생각이었다. 앞으로도 긴 여정이 남아있는 그들은 정서에서 하룻밤을 묶으며 수일 동안의 여독을 풀고 몸을 추스르려는 것이다.
하지만 남정기의 갈 길은 멀었고 아홍의 부모와 같이 정서에서 묶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노숙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한 후 난주에서 떠났고 또 그들과 함께 간다면 속도를 낼 수 없는 것이다.
남정기는 아홍의 가족과 짧게 인사를 나눈 후 흑운의 등에 탔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아홍의 부모는 그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했다. 아홍과는 달리 그들에게 남정기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다가닥 다가닥
멀어져 가는 남정기와 흑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홍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정서를 거의 벗어날 무렵 남정기는 눈앞에 나타난 주루에 들렀다. 그가 기억하기로 정서를 벗어나면 며칠 동안인가를 만나기 어려웠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 어려운 것이다.
열빈루는 단층의 크지 않은 주루였다.
흑운을 여러 마리의 말이 묶여있는 주루의 입구 옆 기둥에 묶어놓고 들어선 남정기는 이 곳이 주로 지나가는 뜨내기를 상대하는 곳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안에는 예닐곱 개의 탁자가 무질서하게 놓여져 있었고 대충 돌을 깔아놓은 바닥은 지저분했다. 탁자는 두 개만이 손님이 앉아있을 뿐 나머지는 비어 있었다.
남정기가 의자에 앉자마자 열대 여섯쯤 되어 보이는 점소이가 별 표정없는 얼굴을 한 채 털레털레 걸어나왔다. 손님이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남정기는 간단한 음식 몇 가지를 시키고 흑운에게 먹이를 주라고 말한 후 동전 몇 개를 점소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대번에 얼굴이 환하게 변한 점소이가 그를 향해 허리가 부러져라 인사를 하고는 잽싼 걸음으로 주방으로 달려갔다.
'무예를 익힌 자들인데.....눈빛이 얼굴을 망쳐놓았군‘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주루안을 별 생각없이 둘러보던 남정기의 뇌리에 문득 든 생각이었다.
그는 탁자를 하나 건넌 자리에 앉아있는 백의인 세 명을 보고 있었다.
백의를 입고 있는 사내들은 스물 한두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입고 있는 백의는 먼지가 조금 묻어있긴 했지만 질좋은 비단으로 되어 있었고, 같은 색의 영웅건으로 정수리까지 틀어 올린 머리를 묶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하나같이 보기 드문 미남자들이었는데 탁자위에는 그들의 것으로 보이는 화려한 섭선 세 개가 놓여져 있었다.
초겨울의 감숙땅에서 섭선을 가지고 다니면 미친놈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섭선을 들고 다닌다는 것은 그들이 대단히 멋부리기 좋아하는 젊은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들의 탁자에는 석자가 조금 넘는 길이의 길죽한 나무로 만든 함이 기대듯 세워져 있었다.
윤기가 흐르고 단아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나무함은 한눈에도 귀해 보였다.
야간은 거만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사내들은 부잣집 귀공자들로도 보이고 한편으로는 무림세가의 자제들로도 보였다.
그들의 눈빛이 얼굴을 망쳐놓았다는 남정기의 생각은 보통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기 어려운 것이지만 한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을 것이다.
그 한 부류는 무림인이다.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전신은 안정되어 있었다.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는 자세였다.
그런 자세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체계적인 수련을 오랫동안 거친 자세였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운신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깊숙이 가라앉지 못하고 약간 떠 있는 그들의 눈빛은 그들이 강호경험이 거의 없는 풋내기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하긴 그들의 나이에 비하면 당연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남정기의 스쳐지나가던 시선이 사내들 중 그와 정면으로 앉아있던 사내와 마주쳤다.
남정기는 곧 시선을 돌렸지만 사내의 시선은 남정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 남정기가 주루에 들어서기 전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남정기가 아니라 흑운을 주시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남정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두 사람은 흥미가 동한다는 얼굴로 일어서서 남정기가 앉아있는 자리로 걸어가는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실례하겠소.”
남정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앞에 서서 말하는 사내의 어디에도 실례를 하고 있어 미안하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반말을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예의는 배운 자였다.
“실례인줄 알면 하지 마시오”
남정기가 심드렁하게 대답한 후 고개를 돌려버리자 사내의 얼굴이 붉어졌다.
면전에서 이렇게 면박을 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알아도 실례해야겠소.”
사내의 음성에 불쾌감과 함께 분노가 깃들었다.
그는 눈앞에 앉아있는 흑의인의 시큰둥해 하는 얼굴에 주먹을 한 대 먹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곳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감숙에는 그와 일행들만 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문중의 어른들 귀에 생면부지의 사내를 별 이유없이 두드려 팼다는 소리가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했다.
아마 참회실 독방에 한 달은 갇혀 있어야할 것이다.
사내는 끓어오른 화를 참으며 남정기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의 강한 시선이 남정기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나와 얘기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듯 하니 용건만 말하리다. 당신이 타고 온 말을 내게 파시오. 값은 후하게 쳐 드리겠소.”
사내는 말을 하며 품에서 주먹만한 비단주머니를 꺼내어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사내가 주머니의 입구를 열자 그 안에 들어있던 누런 금자들이 드러났다.
남정기는 피식 웃었다.
그는 허리를 의자에 기대며 팔짱을 끼고 고개를 비스듬히 틀며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형제를 돈받고 팔 수 있소?”
짤막한 대답이었다.
“나는 한 번 노린 것을 놓친 적이 없소. 충분한 값을 쳐줄 수 있소. 지금 파시는게 당신에게도 이롭소.”
사내의 말투에는 은연중 협박조가 섞이고 있었다.
“나는 내 물건을 남이 가져가게 내버려둔 적이 없지. 한 번 가져가 보시오.”
귀찮다는 듯이 내뱉은 남정기의 말에서 사내는 그의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내는 비단주머니를 거둬 품에 넣고 일어났다.
‘순순히 물러날 자 같지가 않은데, 또 시끄러워지는 건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사내의 등을 보며 남정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간 사내는 잠시 일행과 눈짓을 주고 받더니 금방 다시 일어났다. 일행인 다른 두 명과 함께였다.
그들은 주루의 문을 열고 나갔다. 남정기에게는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였다.
잠시 열렸다가 닫히는 문 사이로 찬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점소이가 주문한 음식을 갖고 왔다.
“손님, 그런데 술은 안 드세요? 길을 가시려면 한 잔 하시는 게 좋으실 텐데....술 마시면 추위를 견디기 한 결 낫거든요.”
“생각없다.”
남정기는 간단하게 거절한 후 탁자위에 놓인 음식을 먹었다.
남정기의 주량은 센 편이었지만 술을 즐기지는 않았다.
적당한 술은 약이 된다고도 하지만 무인(武人)에게 술이란 득보다 실이 많은 물건이라는 것이 평소 그의 생각이었다.
술은 신체의 감각을 흐리게 하고 손을 떨게 만든다.
무림은 도산검림(刀山劒林)이라고도 표현되는 세상이다.
그런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자로 몸과 정신을 흩트리는 것은 적에게 자신의 목을 가져가라고 두 손으로 바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채 몇 가지와 고기완자를 비롯한 음식의 가짓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남정기가 그것을 모두 먹어치우는데는 반 시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 특유의 식사습관 때문이다.
남정기가 주루를 나서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손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십대를 전후한 나이로 보이는 중년인은 회색의 장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시원시원해서 젊었을 때는 아가씨들 방심을 꽤나 흔들었을 용모를 갖고 있었다.
“재미있는 젊은이로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듯한데도 태연자약한 걸.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나서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중년인은 중얼거리며 찬바람이 부는 거리로 나섰다.
그가 주루를 나섰을 때 흑운을 탄 남정기의 모습은 이미 까마득한 점으로 변해 있었다.
남정기가 주루에서 만났던 흰 옷 입은 귀공자들을 다시 만난 것은 정서를 벗어난 지 이각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미 해가 떨어지고 있는 시각이라 관도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엉덩이가 너무 무거운 자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