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천명
작가 : 임준후
작품등록일 : 2016.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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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화
작성일 : 16-07-18     조회 : 622     추천 : 0     분량 : 5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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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장

 동행(同行)

 

 

 

 

 두두두두두

 관도의 한복판에서 천천히 흑운을 몰고가던 남정기는 뒤에서 들리는 말발굽소리에 약간 비켜섰다.

 히히힝, 푸르륵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잘못 생각한 듯 했다.

 전속력으로 달려온 말을 일순간 정지시키는 놀라운 기마술을 보여준 기수는 머리를 휘젓는 말의 목덜미를 두어 번 두들겨 진정시키고는 흑운과 걸음을 맞추어 걷게 했다.

 “손속이 아주 무정하시더구먼.”

 호쾌한 미남형의 중년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친근하게 느껴지는 어조였지만 남정기의 대답은 곱지 않았다.

 “누군가 했더니 숲속에 쥐새끼처럼 숨어 계시던 양반이로군.”

 중년인은 멋쩍은 듯 턱에 난 짧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눈치채리라고는 생각했었네. 하지만 말도 손만큼이나 거칠구먼. 게다가 쥐새끼는 좀 심하지 않나? 그래도 한 때는 잘나가던 풍류남아소리를 듣던 사람인데 말일세.”

 남정기의 말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중년인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지간한 말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연륜이 엿보였다.

 “왜 나를 따라오는 거요?”

 “알고 있었나?”

 “여자도 아닌 남자가 한 시진 가깝게 빤히 쳐다보는데 당신같으면 그걸 모를 수가 있겠소?

 “대충 모른 척 해주게. 그냥 길가다 만나 인사를 트고 길동무가 된 사람처럼 생각하면 자네도 편하고 나도 편하지 않겠나!”

 “장난하는 거요?”

 남정기는 되지도 않는 말을 태연하게 내뱉는 사내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중년인을 존중했다.

 나이가 아니라 그의 전신에서 은연중 흘러나오는 기운때문이었다.

 그 기운은 용화객잔에서 만났던 위지룡이나 막건에 비할만한 것이었다.

 “장난은 아닐세. 자네 정체가 궁금해서 말이야. 강호의 인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이 날세. 그런데 자네가 누군지는 모르겠어. 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잠이 오지 않는 사람일세. 지금 자네가 누군지 내게 말해주면 난 그대로 말을 돌리겠네. 하지만 자네가 누군지는 말해주지 않겠지. 그래서 하는 제안인데 나를 길동무 삼아 줄 수는 없겠나? 말하는 행색이나 아까 그 아해들을 상대하는 걸 보아하니 자네도 강호사정엔 어두운 것 같으니 내가 도움이 될 걸세.”

 남정기는 머리가 아파왔다.

 생긴 건 멀쩡한 중년인이 태연자약하게 뱉어내는 말이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년인은 남정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답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년인은 그와 일행이 된 것이 기정사실이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몰고 있는 중이었다.

 남정기는 더 이상 중년인을 상대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중년인의 정체가 궁금하기는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궁금증이 정신이 이상한 나이든 혹을 달고 다니고 싶지 않다는 감정보다 강한 것은 아니었다.

 “잠깐 잠깐! 갈 때 가더라도 내 말은 듣고 가게. 자네가 지금 천수(天水)를 거쳐 섬서성으로 가려고 한다면 그 길은 정말 어려운 길이 될 걸세”

 흑운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려고 하던 남정기의 발이 멈추었다.

 “무슨 소리요?”

 중년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남정기에게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문을 열었다.

 “자네가 당분간 팔을 못쓰게 만든 그 두 어린애들이 누군지 아나?”

 “모르오.”

 “섬서성에 아주 유명한 가문이 하나 있네. 역사도 길지. 이백여 년 동안 수많은 고수를 배출했고 당대엔 그 성세가 절정에 달한 가문일세. 화산과 종남이라는 거대문파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정도지. 이 정도 말하면 짐작이 가지 않나?”

 “.....혁련세가?”

 어린시절 그의 고향을 떠나 신강으로 향하는 긴 여정 속에서 두 사부는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중에는 강호무림에 우뚝 선 일곱 개의 가문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섬서(陝西) 혁련세가(赫連世家)

 다른 이름으로는 검문(劒門)이라고도 불리는 가문으로 칠대세가(七大世家)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혈연으로 뭉친 수많은 고수들이 웅거하고 있는 강력한 가문이다.

 혁련세가의 표식은 포효하는 백호다.

 혁련호의 손바닥에 절반 쯤 가려져 있던 양각된 문양은 혁련세가의 상징인 백호였던 것이다.

 “역시 자네도 아는군.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자로 혁련세가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 그 세 어린애들 중에 자네가 손목을 부러뜨린 아이는 혁련호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당대 혁련세가의 가주 신검(神劒) 혁련월(赫連越)의 조카라네. 그러니까 혁련월의 셋째 동생인 검광(劒狂) 혁련환(赫連煥)의 아들이라는 말일세. 혁련환은 외호에 미칠 광(狂)자가 들어가 있네. 그가 미쳐 있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가문의 무공이고 다른 하나는 외아들 혁련호라고 알려져 있지. 이제 자네가 천수를 거쳐 섬서로 들어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는가?”

 남정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중년인의 설명이 그처럼 자세했는데 그가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혁련광이 미쳐 날뛸 거라는 말이로군요.”

 “맞네. 그는 아들의 손목이 부러진 걸 자네 목을 부러뜨리는 것으로 상쇄하려고 들 사람일세. 평소엔 그렇게 경우없는 사람이 아니지만 아들의 일에는 눈이 머는 사람이지.”

 “과연 혁련호가 무슨 짓을 하려했는지 알고 나서도 그럴 수 있을까요? 그 정도로 형편무인지경인 가문이라면 이백 년을 유지할 수 없었을 텐데?”

 “물론 그렇네. 혁련세가의 기강은 곧고 바르기로 유명하지. 하지만 과연 혁련호가 정직하게 사실을 말할까? 자네의 말을 강탈하려다가 오히려 자네에게 당했다고? 그 말을 한다면 신검은 당장 혁련호의 손목을 잘라 버릴 걸세. 혁련호는 자신의 상처에 대해 거짓을 말할 것이고, 혁련광은 미친 듯이 자네에게 달려올 걸세.”

 남정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본 혁련호는 원한을 잊을 자가 아니었다. 그는 무슨 말로든 혁련세가의 고수들을 끌어들이고 남을 자였다.

 “어떻게 그런 가문에서 그처럼 개차반같은 놈이 나올 수 있었을까?”

 나직한 중얼거림이었지만 중년인은 들은 모양이었다.

 “그 애비 때문이지. 그 어린애의 어미가 일찍 죽고 나서 자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고 하더군. 고래로 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리는 법일세. 혁련광이 그 꼴이 난거지.”

 남정기는 생각에 잠겼다.

 다가닥 다가닥

 관도위로 조용한 말발굽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결정을 해야했다.

 섬서로 갈 것인지, 돌아서 갈 것인지를.

 혁련세가에 고수가 구름처럼 많고 혁련광이 직접 움직인다해도 그는 두려워할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그는 목적지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시간이 지체되는 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곳에 도착한 이후라면 몰라도.

 “나는 산동에 가는 길이오. 당신이 귀찮음을 피해 산동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면 난 당신에게 내 동행의 자리를 허락하겠소.”

 남정기의 말을 들은 중년인의 입이 벌어지며 커다란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으하하하, 내가 자신있는 것이 사람과 지리일세. 당연히 산동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지. 물론 귀찮은 일도 피할 수 있는 길일세.”

 어둠이 내린 관도위로 중년인의 흥겨운 웃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두두두두두두!

 맹렬하게 질주하는 말발굽소리가 드넓은 대평원을 한 시진째 뒤흔들고 있었다.

 눈처럼 흰 빛의 백마가 미친 듯이 갈기를 휘날리며 바람처럼 평원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백마가 달리고 있는 대평원은 멀리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거대한 천산산맥(天山山脈)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탑리목[塔里木]분지였다.

 흰 호랑이의 가죽으로 만든 안장위엔 백마의 피부색과 같은 흰옷을 입은 은발의 여인이 고삐를 양손으로 바짝 거머쥔 채 말의 목덜미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지금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허리까지 늘어진 채 찰랑거렸을 긴 은발머리는 말의 등과 수평을 이루며 깃발처럼 나부꼈다.

 스물이 갓 넘어 보이는 여인의 속이 들여다보일 듯 투명한 피부는 갈색으로 살짝 그을려 있어 건강해 보였고 흑백이 뚜렷한 커다란 눈망울이 머리색과 대비되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가 타고 있는 말의 속도는 무서울 정도로 빨라서 마주쳐오는 바람은 마치 바늘로 찌르는 듯했다. 하지만 여인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으며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가에 간혹 한 방울씩 눈물이 맺혔다가 바람에 흩어졌다.

 ‘언니! 이제 제발 그분을 놓아주세요’

 여인은 같은 말을 벌써 한 시진째 간절하게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소탈하고 거친 사내의 모습이 었다.

 평원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사람이 여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뒤 이백 여장 떨어진 곳에서 두 필의 말이 힘겹게 그녀가 탄 말을 쫓아오고 있었다.

 그 말들도 준마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한 말들이었지만 여인이 탄 백마와의 거리를 좁히지는 못하고 있었다.

 여인이 타고 있는 말은 천리마라 불리는 한혈마의 혈통을 잇고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전력으로 질주하는 백마를 일반의 준마가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놓치지 않고 뒤쫓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 말들 위에는 삼십 전후의 사내가 한 명씩 타고 있었다.

 두 사람도 상체를 구부려 말의 목에 바짝 대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탄 말들이 백마를 따르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의 사내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체구가 말의 반이 넘어 보일 정도로 컸고 등에는 다섯 자는 됨직한 거대한 초승달 형태의 도를 메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은 체구만큼이나 선이 굵었고 턱에는 구레나룻이 무성했다. 그리고 각이 진 두 눈은 연신 강렬한 빛을 발했다.

 어지간한 사람은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기세가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사내가 타고 있는 말은 거친 콧바람을 내뿜고 있었는데 기수의 체구때문인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힘겨워 보였다.

 왼쪽의 사내는 오른쪽의 사내와는 달리 키는 컷지만 호리호리한 체구였다.

 평범한 외모였고 무기도 보이지 않았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지만 눈빛만은 평범하다고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깊게 가라앉은 채 가끔 비수처럼 날카로운 빛을 발하는 그의 눈은 그가 범상치 않은 심기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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