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천명
작가 : 임준후
작품등록일 : 2016.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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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화
작성일 : 16-07-18     조회 : 630     추천 : 0     분량 : 5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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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遊星), 다 네 놈 때문이다!”

 묵묵히 채찍으로 말엉덩이만을 두드리던 두 사내중 갑작스레 말문을 연 것은 오른쪽의 사내였다.

 평상시의 음성인 듯 했지만 말들이 깜짝 놀랄만큼 커다란 목소리였다.

 “뭐가?”

 유성이라고 불린 왼쪽의 사내가 앞에서 달려가고 있는 백마위의 여인에게 둔 시선을 유지한 채 물었다.

 “네 놈이 그분을 충동질하지 않았다면 그분이 중원으로 떠나셨을 리도 없고 가뜩이나 힘들어하던 아가씨가 보름이 넘도록 이렇게 몇 시진씩 백운(白雲)을 타실 리도 없잖아!”

 오른쪽의 사내는 소리치듯 말했다.

 “천웅(天雄)아, 천웅아. 왜 그렇게 생각이 짧으냐? 손쓰는 것 반만이라도 머리를 좀 써 버릇 해 봐라.”

 “이 자식이! 뜬금없이 내 머리 얘기는 왜 나와!”

 천웅은 고리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막주(幕主)께서 이곳에 계셨으면 오래 못 사신다.”

 유성의 음성은 천웅의 목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하는 것과는 달리 한결같이 차분했다.

 중얼거리는 듯한 음성이었는데도 천웅은 유성의 말을 알아듣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모습이었다.

 격렬한 말발굽소리가 계속해서 울려퍼지는 가운데 전력질주하는 말등에 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무공이 가볍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소리냐?”

 천웅의 음성에 의혹이 깃들었다.

 “너도 아는 것처럼 그분은 세상에 대한 애착을 잃었다. 그분의 스승님들인 전대 막주님과 어르신이 갑작스레 실종되셨다. 그와 함께 천무맹(天武盟)과 자운루(慈雲樓) 그리고 우리와의 전쟁은 휴전상태로 접어들었다. 휴전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삼파의 수뇌밖에 모르고 있는 비밀이긴 하지만 어쨌든 전쟁은 끝이 났다. 그리고 이어진 평화속에서 그분이 사랑하시던 아가씨도 병을 얻어 돌아가셨지. 어린시절 겪은 참화를 계속 기억하면서도 복수가 가능하지 않다는 현실 때문에 끊임없이 절망하던 분이 그분이다. 그런 불가능한 복수에 대한 열망을 전투로 달래시다가 아가씨와의 사랑으로 잊어가시던 분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을 봐라. 어렸을 때부터 생사를 넘나들던 전쟁은 소강상태이고, 스승님들은 실종되셨어. 게다가 사랑하던 분도 돌아가셨고. 천웅, 너도 그분의 성격을 알잖아. 그분은 천생무골(天生武骨)인데다 어떤 전투든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신 분이고 그것이 무엇이든 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분이시지. 전투도 없고 스승님들도 안계시고 사랑하는 아가씨도 없는 이곳에서 그분이 계속 계셨다면 그분은 아마 숨이 막혀 돌아가셨을 거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하지만 중원은 험한 곳이다. 그분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중원무림인들이 그분을 그냥 두지 않을 걸.”

 “그것도 좋지.”

 “뭐?”

 “적당히 소란스러운 것도 괜찮다는 뜻이다. 일이 생기면 그분의 삶에 대한 애착이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명(明)의 현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니 중원을 돌아다니면서 어느 정도의 위로도 받으실 수 있을 것이고.”

 유성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천웅은 유성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너는 적당히 소란스러운 것도 좋다고 하지만 그분의 성격상 눈앞에 적대행위를 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냥 넘어갈 리 없어. 중원인들의 자존망대함은 정신병에 가깝다. 하지만 그분은 그런 중원인들의 자존심을 지켜줄 분이 아니야. 몇 번 부딪치면서 일이 일파만파로 커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분이 일이 커진다고 피해 갈 분도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즐길 분이지. 하지만 막주의 무공이 아무리 대단하다해도 한 손이 열 손을 당하지는 못한다. 중원엔 막주를 도울 사람이 없어. 나는 그것이 불안하다.”

 “네 말도 일리는 있어. 그분이 풍운에 휩싸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시간은 있어. 그분은 누가 시비를 걸어도 피할 분이 아니지만 산동에 도착하실 때까지는 성격에 안 맞는 일을 하실 거다.”

 유성의 말을 들은 천웅의 눈이 빛났다.

 “산동에....그렇겠지.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고향가는 길을 지체하고 싶으시지는 않으실 테니까.”

 잠시 입을 다물고 말에 채찍질을 해대던 천웅의 눈이 커졌다.

 정면을 향했던 그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가며 시선이 유성을 향했다.

 “그런데 시간이 있다는 건 무슨 말이냐? 너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 거야? 말해 봐!”

 “둔한 녀석!”

 유성은 가볍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운정(雲貞)아가씨를 봐!”

 유성의 말에 천웅은 자신의 앞에서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백마를 탄 여인, 운정(雲貞)을 보았다.

 그의 호목(虎目)에 그늘이 졌다.

 “운경(雲鏡)아가씨가 돌아가신 지 일년이 넘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막주에게 했던 유언 기억하지?”

 “운정아가씨를 부탁한다는?”

 “그래. 그리고 운정아가씨가 막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도 알잖아. 막주의 부인으로 그리고 우리의 주모(主母)로 저 분만한 분은 없어. 막주도 가정을 가지면 달라지실 거다.”

 “그래서?”

 천웅은 유성의 말을 재촉했다.

 그는 유성과는 성격이 정반대라고 할 정도로 판이하게 달랐다. 말보다 주먹이 빠른 사람이고 그만큼 긴 말을 싫어했다.

 지금도 말을 하는 사람이 유성이 아니었다면 뜸들이지 말라고 벌써 한 대 후려쳤을 것이다.

 “막주는 금방 돌아오지 않는다. 몇 년이고 천하를 돌아다니실 거야. 그분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십수 년만에 그나마 조용해진 이곳을 다시 전쟁터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고. 그분이 늦게 돌아오신다면 운정아가씨는 말라죽을 거다. 막주 살리려고 운정아가씨를 죽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네 말처럼 중원엔 막주 혼자 몸이시다. 아무래도 힘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 아가씨를 모시고 중원으로 갈 생각이다.”

 “중원으로?”

 유성의 말에 천웅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가 다시 흐려졌다.

 “누군 가고 싶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 거냐! 뒤를 따라오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셨던 막주님의 말씀을 잊었어?”

 천웅은 답답한 듯 세차게 말엉덩이에 채찍질을 하며 소리쳤다. 그의 채찍을 맞은 말이 거품을 물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유성은 고개를 저으며 말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천웅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자 그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잊을 리가 있나. 입밖에 나온 말은 반드시 지키는 분인데. 하지만 운정아가씨와 함께 가면 우리를 죽이지는 못하실 거다. 몇 대 맞기야 하겠지만. 아가씨에게 약속도 받아놓아야겠지. 우리들의 방패가 되어주신다는 약속 말이다.”

 “그럼 되겠구나!”

 천웅의 얼굴이 그들의 머리위를 지나고 있는 태양만큼이나 밝아졌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을 리 없는 운정은 상사(相思)의 아픔을 가슴에 안은 채 백운과 일체가 되어 화살처럼 탑리목분지의 대평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따가운 햇살이 눈을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잠을 깬 전중걸(田中傑)은 어깨를 비틀며 상체를 일으켰다.

 나뭇잎을 깔고 그 위에 피풍을 이부자리 삼아 잠든 터라 그리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런 노숙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지난밤 발치에 피워두었던 모닥불은 하얀 재만 남긴 채 부스러기로 변해 있었다.

 그는 편안하게 책상다리를 하며 어제부터 동행이 된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끝없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 젊은이는 그와 삼장 정도 떨어진 작은 공터에 있었다.

 남정기는 막 유마천룡진기 제 일단공의 마지막을 진행하던 참이었다.

 느릿하게 춤을 추듯 움직이며 뱀이 또아리를 틀 듯 오른쪽으로 소용돌이치며 뒤틀려 있던 그의 발목과 무릎, 허리와 가슴 그리고 목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였다.

 하지만 그 느리게 움직이는 남정기의 모습을 지켜보던 전중걸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경탄에 가까운 감정이 담긴 빛을 발했다.

 남정기의 두 발은 정면을 향해 이(二)자가 바로 선 형태였는데 그의 두 눈은 뒤로 한바퀴를 돌아 다시 정면을 향하며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았다가 역순으로 풀어지고 있었다.

 남정기의 기괴하게 뒤틀렸던 몸이 정상을 되찾아가는 과정은 그가 모르는 것은 세상 사람 누구도 모른다는 평을 받는 전중걸조차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본래 무림 중의 사람이 무공을 수련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은 금기였다.

 하지만 전중걸은 그런 금기는 개의치 않는 사람이고 남정기도 분명 전중걸이 깨어나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텐데도 수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마치 보여주기 위해서 행공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게 대체 어느 유파의 무공이지? 천축의 유가신공(瑜伽神功)이 신체의 유연성을 극대화시킨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유가신공에 정통해도 저럴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마치 뼈가 고무로 만들어진 것 같군. 어떻게 저런 각도로 틀어질 수가 있는 거지?’

 남정기의 움직임은 기괴하기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 움직임에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신비로움과 지켜보는 사람을 숨죽이게 만드는 강렬한 기세가 실려 있었다.

 완전히 정상의 모습을 되찾은 남정기가 가볍게 목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수련을 마쳤을 때 전중걸의 호기심은 절정에 달했다.

 그는 살아오면서 호기심을 참은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때문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도 여러 차례 맞았었지만 그런 위기도 그의 천성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대체 지금 자네가 시전한 무공의 이름이 무언가? 그렇게 기이하게 전신을 굴신하는 무공은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걸.”

 “가르쳐 주어도 모를 거요.”

 “모르니 물어보는 거 아닌가!”

 전중걸은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그는 남정기에게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천하에 이름높은 무공 중 내가 보지 못한 것이 없네. 그런데 오늘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으니 내가 어떻게 궁금증을 참을 수 있겠나! 말해 주게.”

 남정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선풍(仙風)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분위기를 가진 청수한 풍모의 전중걸이 금방이라도 침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우스웠던 것이다.

 “말해주는 거야 어려울 것이 없소. 하지만 뭔가 대가가 있어야하지 않겠소.”

 “대가?”

 “당신이 말한대로 세상 사람 누구도 이름을 알지 못하는 무공이요. 공짜로 가르쳐 주기엔 너무 아까워서.”

 “장사를 해본 적이 있나? 말하는 것이 완전 상인이군. 하여튼 말해 보게. 가능한 것이라면 대가가 무엇이든 치르도록 하겠네.”

 “호기심이 대단하군요.”

 남정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중걸이 그의 일행이 된 과정은 순수하지 않았다.

 그는 전중걸을 믿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전장을 누빈 사람이고 그 경험은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중걸은 무언가 비밀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저런 식의 말을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남정기가 그의 정체와 목적을 말해달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정기는 그런 질문을 할 생각이 없었다.

 전중걸의 눈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최소한 지금의 그에게 거짓은 없는 것이다.

 나중에 전중걸이 그와 어떻게 얽히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남정기는 뒷일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불가피한 경우라면 어쩔 수 없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개문령(開門令)이 뭡니까? 그리고 현재 무림과 천하의 정세를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주시오. 그럼 나도 답을 해주겠소.”

 전중걸의 얼굴에 환하게 밝아졌다.

 남정기가 까다로운 요구를 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이 있었는데 남정기의 질문이 그런 걱정을 단번에 날려버렸던 것이다.

 “하하하, 잘 물었네. 개문령은 물론이고 무림과 천하의 정세에 대해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 자네는 정말 운이 좋아.”

 전중걸은 일단 자기 얼굴에 금칠을 한 후 말을 이었다.

 그는 웃으며 자신의 말이 매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더니 말 등에 실려있는 짐보따리에서 한 웅큼의 건량을 꺼내 돌아왔다.

 “앉게. 짧은 얘기는 아니니까.”

 남정기는 전중걸의 앞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그의 몸이 검은 피풍으로 가려졌다.

 정리하지 않은 긴 머리가 그의 왼쪽 얼굴을 가리자 거뭇거뭇한 수염과 머리카락 사이로 간혹 빛을 발하는 오른쪽 눈만이 그가 전중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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