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천명
작가 : 임준후
작품등록일 : 2016.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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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화
작성일 : 16-07-18     조회 : 604     추천 : 0     분량 : 5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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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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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의 입구는 호리병의 목처럼 좁고 가늘었다.

 마차 한 대가 통과할 넓이밖에 되지 않는 입구는 좁은 대신 길었다.

 백여 장에 달하는 입구의 양옆은 붉은 빛을 내는 바위로 이루어진 수백 장에 달하는 절벽이었다.

 입구를 통과하면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고색이 창연한 크고 작은 건물들이 사방 천여 장에 달하는 분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 아름은 될 법한 기둥들이 햇빛을 반사시키는 대리석 지붕들을 떠받치고 있는 이국적 형태의 건물들이었다.

 분지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 쌓였고, 절벽 너머엔 그 끝을 알 수 없는 원시림이 펼쳐져 있다.

 분지에 세워진 건물들은 중앙에 우뚝 솟은 탑 형태의 거대한 7층 누각(樓閣)에서 시작된 십자대로(十字大路)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건축되어 있었다.

 분지의 외곽에 위치한 절벽들이 천연의 방벽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면 건물들이 중앙의 누각을 중심으로 연속적인 동심원을 그리며 순차적인 성벽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외곽에 위치한 건물들은 그 높이가 낮았고 중앙으로 가면서 높아졌다.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엔 일정한 간격이 있었고 중심부에 가까운 건물에서는 그 앞 건물과 건물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어느 방향에서든 동일했다.

 분지의 사방에는 한 방향마다 넓은 연무장(鍊武場)이 조성되어 있었고, 연무장마다 무예수련 중인 백 수십 여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두터운 옷을 걸친 많은 사람들이 분지에 조성된 거리를 걷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연무장에서도 거리에서도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지에 이룩된 도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침묵이었다.

 중앙의 누각이 멀리 보이는 분지의 북쪽 끝 야트막한 구릉지대에 두 다리를 쭉 뻗은 편안한 자세로 나무에 기대어 앉아있는 삼십 전후의 사내가 있었다.

 이목구비가 수려한 장신의 사내로 걸치고 있는 얇은 백색 장삼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미남이었다.

 구릉은 높지 않았지만 분지는 완전한 평면에 가까워서 사내가 있는 위치에서는 분지 전체가 한 눈에 들어왔다.

 반듯한 이마를 손가락으로 매만지고 있던 사내의 입이 열렸다. 청아한 음성이었다.

 “관(觀), 그는?”

 “이곳을 떠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사내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그가 기대고 있는 나무였다.

 정확히 말한다면 나무의 그림자에 숨듯이 시립해 있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사십대 사내였다.

 그의 시선은 백의인의 등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디로?”

 중년인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백의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딘지 장난기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그는 중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원이라....”

 백의인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중년인이 말을 받았다.

 “이틀 전 그의 오른팔이라고 알려진 천웅의 모습을 타클라마칸 사막의 입구에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년만에 움직이다니. 그자도 생각보다는 엉덩이가 무거워.”

 “그 성격에 오래 참은 겁니다.”

 중년인의 차가운 눈매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는 웃고 있었다.

 “지랄맞은 성격이긴 하지.”

 중얼거리던 백의인의 손이 왼쪽 가슴께를 어루만지듯 스쳐 지나갔다.

 입가의 미소와는 달리 서늘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은 어느 시점인가의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백의인의 등을 바라보던 중년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추적도 그리 어렵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럴까?”

 백의인의 시선이 누각 위쪽의 하늘을 향했다. 까마득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분지 중앙의 빈공간으로 모습을 드러낸 하늘은 넓지 않았다. 사방이 막혀 있는 것이다.

 중년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자의 성격이 중원으로 나갔다고 바뀔 리가 없습니다. 어쨌든 타지(他地)니 이곳에서보다야 더 참긴 하겠지만 오래 가진 못할 겁니다. 흔적은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네 말이 옳아. 추적할 흔적은 충분하겠지. 중원이 아무리 넓다해도 말이야.”

 “소주(小主). 이제는 척살대를 보내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보내긴 해야겠지. 하지만 아버님은 좀 더 그자를 지켜보실 생각인 모양이다.”

 “예?”

 “이유는 알 필요없다. 어쨌든 척살대는 보낸다. 이미 일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아버님의 지시가 있었던 것이니까. 별도의 지시를 받을 필요도 없다. 출발 준비를 하도록. 흠, 그럼 모레쯤 떠나볼까!”

 백의인은 마치 소풍갈 날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기대에 부푼 얼굴이 되었다.

 ‘표관(杓觀), 자네는 모르네. 우리가 왜 전쟁을 중지해야만 했는지를. 그를 제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네. 하지만 우리는 많은 준비를 해왔어. 모든 것이 아버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나는 믿네.’

 그의 잘 생긴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중앙의 누각을 바라보는 백의인의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는 그가 앞으로 할 일을 진심으로 즐길 준비가 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중앙의 누각 일층 현관에는 가로 이장에 달하는 거대한 편액이 걸려 있었다.

 편액에 양각된 자운루(紫雲樓)라는 자색(紫色)의 글자들이 백의인, 진립(榛立)의 검은 눈동자안에서 은은한 자색의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 유마천룡진기(唯魔天龍眞氣)라는 무공 말인데.....”

 서편으로 많이 기운 태양을 흘깃거리던 전중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가 입을 여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남정기의 눈살은 자동적으로 찌푸려지고 있었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좀 주면 안될까!”

 “뭘 말이요?”

 “유마(唯魔)와 천룡(天龍)을 따로 따로 나누면 생각나는 무공들이 서너 개씩은 되는데 그걸 합치면 도무지 생각나는 것이 없단 말이야.”

 “더 머리를 굴려 보시구려.”

 매정하게 말을 자른 남정기는 흑운의 옆구리를 슬쩍 눌렀다.

 주인의 기분을 짐작한 흑운이 크게 발굽을 몇 번 띄는 것으로 전중걸과의 거리를 사오장 벌려 놓았다.

 수일 전 전중걸이 개문령과 강호정세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대가로 남정기는 전중걸에게 수련중이던 유마천룡진기의 명칭을 말해 주었다. 그때부터 벌써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는 일이었기에 흑운도 어느새 적응이 된 것이다.

 전중걸은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남정기의 뒤를 따랐다.

 그도 고집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람인데 남정기에게는 두손 두발 다 든 상태였다.

 남정기는 말이 통하질 않는 상대였다.

 행로(行路)에 필요한 말 이외에는 그가 하는 말은 귀담아들어 주지도 않는 것이다. 강호 최고의 달변을 자부하는 전중걸로서는 남정기와의 동행길은 고행길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가 원한 동행이니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요?”

 “섬서성의 남단인 석천(石泉)의 남쪽 칠십 리 정도 되는 곳일세.”

 남정기와 전중걸이 걷고 있는 길은 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십여장에서 삼십여장 높이의 구릉이 연속되는 곳으로 무릎 정도까지 오는 잡목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지역을 뒤덮고 있었다.

 잡목이 숲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은 탓인지 걸음을 옮기는데 충분한 불편을 줄 정도는 되었다.

 전중걸이 타고 있는 말은 보통의 말이라 흑운과는 달리 무릎까지 오는 잡목을 뚫고 앞으로 전진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당신이 말한 친구집은 얼마나 남았소?”

 “두 시진 정도만 더 가면 될 걸세. 경치가 좋은 곳이니 하룻밤 분위기 있게 머물 수 있을 거야.”

 자신이 타고 있는 말과 함께 헐떡이며 남정기의 뒤를 따르던 전중길이 반각 정도 앞에 있는 구릉지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앞에 보이는 구릉을 넘어가면 요기를 할 수 있는 주점이 있네. 그곳에서 배를 채우고 가세. 친구가 사는 곳은 조금 높은 지역이라 가다가 배가 고플 거야. 그곳에서 하룻밤을 쉬고 내일부터 사흘 정도만 이런 속도로 움직이면 호북성(湖北省)에 들어설 수 있네.”

 남정기는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동행한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전중걸의 해박한 지리지식을 인정하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마각(?)을 드러낼지 알 수 없었지만 전중걸이 탁월한 길잡이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어느 곳을 가든 그는 먹을 곳과 쉴 곳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가 말한 곳에서는 어떤 문제도 생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릉을 넘어서자 전중걸이 말한 주점이 보였다.

 주점은 통나무를 잘라 지은 단층 건물이었는데 추운 날씨탓인지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뒤편의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뭉클거리며 솟고 있었다.

 주점의 출입문 옆에 세워진 기둥에 말고삐를 묶으며 전중걸이 말문을 열었다.

 “선객(先客)이 몇 명 있나 본데....”

 그의 시선은 먼저 온 사람들이 묶어놓은 다섯 필의 말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말들은 짐승가죽으로 만든 안장을 얹고 있었는데 한눈에도 잘 보살펴지던 말들임을 알 수 있었다.

 남정기는 난주에 들어섰을 때부터 객잔에서 꼭 시비가 될 일을 겪어온 터라 이렇게 외진 주점에 있는 선객들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난밤도 노숙을 하고 아침을 건량으로 때운 참이라 따뜻한 차가 그리웠다. 그리고 흑운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 했다.

 주점안엔 밖에 묶어둔 말들의 주인인 듯 싶은 청의인 세 명이 한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식사는 이미 끝이 났는지 그들은 차를 마시며 나직한 음성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청의인들은 이마에 같은 색의 수건을 둘렀고 모두 눈매가 날카로운 데다가 수건으로 가려진 태양혈 부위가 불룩했다.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전중걸과 남정기를 한 번 흘낏거렸지만 별다른 기색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뭘 드실라우?”

 어깨에 수건을 얹은 오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몸집이 큰 사내가 휘적휘적 걸어오더니 전중걸에게 물었다. 급할 게 없는 걸음걸이였다.

 구레나룻이 무성하고 헝클어진 머리가 제멋대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도저히 음식점 주인이라고는 봐줄 수 없는 주인이었다. 산길에서 보았다면 산적으로 오인받기 딱 좋은 외모였다.

 “구운오리 두 마리, 만두 한 접시, 죽엽청 한 병.”

 전중걸의 주문을 들은 주점 주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 우리집에 오셨던 적 있수?”

 “몇 년 전에 지나는 길에 들린 적이 있었소.”

 “그래서 아는구랴!”

 주인은 전중걸과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대화를 나눈 후 주방으로 사라졌다.

 남정기의 시선이 전중걸을 향했다. 주인과의 대화가 무슨 뜻인지를 묻는 눈빛이었다.

 전중걸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려 툭 던지든 말했다.

 “이 집에서 하는 음식은 그 세 가지가 전부거든.”

 요리는 반각이 지나기 전에 나왔다.

 대단한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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