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천명
작가 : 임준후
작품등록일 : 2016.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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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화
작성일 : 16-07-18     조회 : 703     추천 : 0     분량 : 6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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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장

 혈사(血事)

 

 

 

 

 남정기가 돌덩이처럼 굳은 안색을 한 전중걸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주점으로부터 삼십 리 정도 떨어진 산이었다.

 주변이 야트막한 구릉지대인 탓에 그 사이로 우뚝 솟아있는 산은 이천 오백 척 정도의 높이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규모로 보였다.

 그리 험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 수명(壽命)이 오래된 고목들이 십여 리에 걸친 산 전체에 퍼져있어서 산은 실제보다 위압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두두두두

 중턱까지 나 있는 외길을 쉬지않고 달려온 전중걸은 산의 정상을 끼고 우측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산의 나무들이 담처럼 늘어서서 괴괴한 그늘을 만들고 있는 곳을 향해 달리면서도 전중걸은 말의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렇게 일각 정도를 달렸을까.

 정상 뒤편에 펼쳐져 있는 숲의 그늘이 점점 짙어졌다. 햇빛이 나뭇가지를 뚫고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울창한 숲이었다.

 사오장 뒤에서 전중걸을 따르던 남정기는 숲과 박치기라도 하겠다는 듯 맹렬하게 달리던 전중걸의 모습이 서너 아름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의 옆으로 접근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사라지자 눈을 크게 떴다.

 푸르르 푸르르

 전중걸이 사라진 고목을 스쳐 지난 남정기는 흑운의 고삐를 당겼다. 전중걸은 고목을 지나 십여 장 정도 더 간 곳에서 말을 세우고 있었다.

 천천히 흑운을 움직여 전중걸의 옆에 선 남정기는 고삐를 잡고 있는 전중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폭이 삼십 장에 입구에서 끝까지 백여 장 정도 되는 계곡의 입구에 서 있었다.

 계곡안은 평평한 평지였고 중앙으로 난 길 양편으로 잘 가꾸어진 밭이 보였다. 길의 오른 편으로는 산의 물줄기를 끌어들여 만든 것인 듯 폭 다섯 자 정도의 냇가도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계곡의 후미는 절벽이었고 그 앞에 통나무와 진흙으로 만들어진 집 한 채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이었지만 그것은 평소의 모습이었다.

 통나무집의 출입문은 도끼로 부순 듯 박살이 난 채 간신히 벽에 붙어 있었고 마당은 피비가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곳곳에 붉은 색 웅덩이가 패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날 듯이 집앞에 도착한 전중걸은 마당에 쓰러져 있는 사람옆으로 뛰어 내렸다.

 “제수씨!”

  전중걸이 무릎을 꿇고 가슴에 끌어안은 사람은 삼십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거친 마의를 걸치고 있었지만 아직도 젊은 날의 미모가 남아있는 여인은 푸르스름한 낯빛의 시신으로 변한 모습조차 아름다운 미녀였다.

 여인의 전신은 십여 군데의 상처로 만신창이였다. 치명적인 상처는 아랫배에서 심장까지 사선으로 그어진 검상(劒傷)으로 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전중걸은 여인을 다시 땅에 눕히고 바람처럼 통나무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황급한 기색으로 다시 집에서 뛰쳐나왔다.

 “이쪽으로 간 듯 하군.”

 남정기는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마당의 왼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당으로 뛰쳐나온 후 멍한 표정으로 제수씨라 불린 여인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전중걸의 표정이 변했다.

 “무슨 뜻인가?”

 “적어도 열 다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이곳을 쳤소. 이곳에서 죽은 사람은 그 중 네 명 정도. 저 여인은 누군가 도주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것이라고 생각되고. 여인의 죽음으로 시간을 번 사람들은 이곳을 빠져나가는데는 성공한 것 같소.”

 남정기의 시선은 여인의 상처와 마당에 나 있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훑고 있었다.

 그는 모래바람이 수시로 지형을 바꾸어 놓는 사막에서도 사람을 추적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된 관찰자였다.

 그런 그에게 마당에 나 있는 흔적들은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설명해 줄 정도로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초점이 흐려져 있던 전중걸의 눈이 강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정말인가?”

 남정기는 손을 들어 마당의 왼쪽 바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여러 개의 발자국들이 뒤섞여 있었다.

 “적어도 여섯 명의 발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소. 아래 두 개는 경신술이 약한 자들의 자국이지만 네 개는 발면을 볼 때 경신술이 약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무거운 물건을 들고 있기 때문에 난 거요. 신발의 앞코부분이 향하는 건 이 집의 뒤편인데 모두 방향이 같소.”

 다급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물으려는 전중걸을 손으로 제지한 후 남정기는 말을 이었다.

 “나같으면 되물을 시간에 그들을 쫓겠소. 이곳을 친 자들은 죽은 동료의 시신을 메고 갈 정도로 여유가 있소. 목표를 잡을 자신이 있지 않다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 이 시간에도 당신의 친구는 사경을 헤매고 있을 거요.”

 남정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전중걸은 몸을 날렸다.

 “뒤에 동굴이 있네!”

 계곡의 뒤편으로는 말을 타고 갈 수 없다. 그는 이 곳을 수삼 년에 한번씩은 꼭 들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뒤쪽의 계곡이 끝나는 절벽 밑에 산 아래로 통하는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정기는 다리가 안보일 정도로 빠르게 사라지는 전중걸의 모습을 지켜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평소의 걸음걸이로 통나무집에 들어갔다.

 집안의 중간은 부엌겸 마루로 보였다. 넓은 공간이었고 이곳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방이 있었다. 방은 오른쪽에 하나 왼쪽에 두 개. 모두 세 개였는데 모두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이리저리 넘어져 있는 의자와 한 쪽 면이 잘려나가고 표창들이 꽂혀 있는 탁자는 그들이 도착하기전 이곳에서 벌어진 상황이 얼마나 흉험했는가를 알려주고 있었다.

 집안을 간단하게 둘러 본 남정기는 오른편의 방으로 들어가 이불보를 손에 들고 밖으로 나왔다.

 ‘부부와 1남1녀. 네 명중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죽었으니 셋이 남았다. 아이들은 무공을 배운 듯하지만 발자국으로 보아 그 경지가 깊지 않아.’

 남정기는 전중걸이 제수씨라고 부른 여자의 시신을 들어 이불보에 둘둘 만 후 전중걸이 타고 온 말의 안장에 얹었다.

 ‘전중걸의 친구라는 남자는 분명 고수다. 이 여자는 남편이 자식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킬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처를 남겨두고 떠날 남자는 별로 없는데.....이 여자도 대단해. 그리고 과단성있는 사내다. 하지만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는 건 그도 이곳을 습격한 자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는 뜻. 피가 아직 굳지 않았다. 동굴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아직 빠져나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커. 이 여자를 죽인 검상을 남긴 자는 일류다. 전중걸의 진정한 실력을 볼 수 있겠군.’

 남정기가 전중걸의 뒤를 바로 쫓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정체불명의 동행은 늘 긴장을 동반시킨다. 그는 긴장을 즐기는 사람이긴 했지만 뒤통수를 맞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남정기는 전중걸이 타고 온 말의 고삐를 흑운의 입에 물렸다. 그는 손을 들어 집 뒤 절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데리고 산 뒤편에 가 있거라.”

 남정기의 뜻을 알아들은 흑운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그도 집의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절벽 아래 나무들이 교묘하게 가리고 있는 동굴은 성인 두 명이 허리를 반쯤 굽히고 들어가야 했다.

 채애애앵, 채애애앵

 동굴의 안에 들어선 남정기는 아련한 금속성이 웅웅거리며 공명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먼 곳에서 나는 소리였고 동굴의 벽면에 반사된 소리는 정확한 거리를 측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문가지였다.

 ‘벌써 만났나?’

 동굴 안은 좁아졌다가 넓어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고 사오 장을 전진하기도 전에 이리저리 구부러졌다. 경공을 전개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동굴이었다.

 남정기는 바람처럼 동굴을 전진했다. 경신술을 펼치지는 않았지만 허리를 숙인 채 달려가는 그의 속도는 대단히 빨랐다.

 빛이 없는 동굴은 칠흑처럼 어두웠지만 그의 안력은 어둠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았다.

 비록 동굴안을 대낮처럼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어둠속에서 사물을 구별할 정도의 능력은 넘치는 그였다.

 그렇게 이백여 장이 넘는 거리를 지났을 때 그는 귓전을 때리는 금속성의 진원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삼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어스름한 빛이 스며들어오는 것이 보이는 곳이었다. 동굴이 끝나기 직전 지점인 이곳에서 동굴은 사방 십여 장 정도의 공지를 만들어 놓았다.

 공지의 높이는 일장이 조금 못 미였는데 지금 이곳은 뼈를 깎는 살기와 푸르스름한 검광(劒光)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살기의 한복판에 전중걸이 있었다.

 전중걸의 얼굴은 비통함으로 얼룩져 있었고 그의 두 눈은 눈앞에 있는 적들을 갈아 마시기라도 할 것처럼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챙챙챙

 전중걸의 손에 들린 한자 반 길이의 판관필(判官筆)이 번뜩일 때마다 그의 정면과 좌우에서 그를 공격하던 복면을 한 세 명의 흑의인들은 수중에 들린 검이 어지럽게 교차하며 판관필을 막고 있었다.

 흑의인들의 검세(劒勢)는 사납고 잔혹했다.

 도법(刀法)과는 달리 대부분의 검법(劒法)은 찌르는 것을 위주로 초식이 만들어진다.

 베는 것은 방어나 변초를 하는 과정에 주로 배치되고 마무리는 찌르기로 끝이 난다. 검 자체의 묘용이 찌르기에 있기 때문인데 흑의인들이 사용하는 검법은 그런 일반적인 상식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검을 도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찌르기는 아예 없고 보이는 것은 모두 베기뿐이었다. 비상식적인 무기의 사용법은 그만큼 비상식적인 초식을 동반한다.

 전중걸의 판관필이 만들어내는 초식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그들의 검은 일초일초가 모두 사람의 허를 파고드는 형태였고 전중걸의 요혈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형태가 모두 베기였다.

 그들의 칼에 격중된다면 최하가 불구일 것이다.

 ‘이사부(二師父)만큼이나 차가운 사람이 만든 검법에다가 진법(陣法)이로군.’

 남정기는 흑의인들이 진을 이루어 전중걸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우웅

 전중걸의 판관필이 움직일 때마다 발생하는 강력한 압력탓에 동굴은 계속해서 우는 소리를 냈다.

 그의 판관필은 허공에 수십 개의 붓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사방을 휩쓸고 있었지만 진을 깨뜨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중걸이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진이 아니었다면 흑의인들은 쓰러져도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흑의인들의 검세는 매서웠지만 전중걸의 판관필은 더 무서웠다. 그들의 잔혹한 검세가 그의 몸에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흑의인들의 것인 듯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는 여러 개의 천리화통(千里火筒)은 공지의 상황을 환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공지를 살피던 남정기의 눈이 빛났다.

 공지에는 싸우는 사람들 외에 서 있는 사람 한 명과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 한 명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섯 명이 더 있었다.

 그 외에도 네 명의 흑의인이 더 있었지만 그들은 쓰러져 있다고 하기 어려웠다.

 한쪽에 단정하게 포개져 있는 그들은 죽은 지 시간이 좀 지난 것같은 사기(死氣)를 풍기고 있었다. 계곡에서 당한 것으로 남정기가 추측했던 자들인 듯 했다.

 여기 저기 쓰러져 있는 자들 중 다섯 명은 흑의인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남색장포를 걸친 사내였는데 그는 동굴의 입구쪽 벽면에 상체를 절반쯤 걸친 채 쓰러져 있었다.

 남포중년인은 계곡에서 보았던 여인과 마찬가지의 상처를 입고 있었다. 당연히 그도 사망한 상태였다.

 공지를 살피던 남정기의 눈이 빛난 것은 남포를 걸친 중년사내의 시신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열 대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을 본 때문이었다.

 소년은 어둠속에서도 빛이 날 것 같은 대단한 미소년이었는데 남포 중년인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반끔 넋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전중걸은 그들의 앞에서 흑의인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남정기는 전중걸의 판관필이 흑의인들을 처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다.

 전중걸의 판관필은 변화가 극심했다. 하지만 그 변화를 전부 펼치지 못하고 도중에 자꾸 끊어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두 발이 묶여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필법(筆法)은 보법(步法)과 일체가 되어야 그 위력이 제대로 나타날 수 있는 종류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면 소년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 흑의인들은 그를 공격하고 있는 자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공격에 가담하지 않고 있는 흑의복면인이 한 명 더 있었다.

 남정기가 본 자들 중 서 있는 자가 바로 그였다.

 그는 등에 장검을 매고 여유있게 전중걸과 복면인들의 싸움을 관전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가 이 자리의 주재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여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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