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천명
작가 : 임준후
작품등록일 : 2016.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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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화
작성일 : 16-07-18     조회 : 1,006     추천 : 0     분량 : 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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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의 상황을 파악한 남정기의 시선이 차갑게 응결되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싸움이기는 주점이나 이곳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직 전중걸의 친구라는 죽은 중년인의 이름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점과는 상황이 달랐다.

 전중걸은 강했지만 그가 상대하는 흑의인들도 강했고 가담하지 않고 있는 흑의인은 더 강해 보였다. 그것은 남정기가 나서지 않는다면 전중걸이 이 상황을 쉽게 헤쳐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중걸은 그의 동행이었고 고향까지 문제없이 가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다.

 ‘그곳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갈 수 있을까?’

 남정기는 전중걸이 왠지 미덥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에 잠겨있을 만큼 한가한 상황은 아니었다.

 마음을 결정한 남정기는 동굴의 어둠속을 빠져나갔다.

 남정기가 공지에 모습을 드러내자 전권(戰圈)을 지켜보던 흑의인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의 두 눈에 짧은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남정기가 접근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넌 누......!”

 남정기를 보며 입을 열던 사내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냉정하게 가라앉은 눈길로 흑의인을 응시하며 걸음을 떼던 남정기의 신형이 갑자기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중원으로 들어서며 많이 참고 있었지만 본래 남정기는 싸움을 마다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걸어오는 싸움은 이유를 불문하고 부딪치고 보는 사람이 그였다.

 그리고 그는 싸우기 전의 대화가 왜 필요한지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일단 쓰러뜨리고 나서도 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정기가 어떤 사람인지 흑의 복면인이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싸움은 수세(守勢)로 시작되었다.

 복면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남정기의 움직임을 놓친 사내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왼쪽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복면인의 등뒤에서 한 줄기 푸른 섬광이 일어났다. 복면인의 손에는 언제 빼들었는지 서늘한 살기를 뿌리는 검이 들려 있었다.

 복면인의 왼쪽으로 파고들던 남정기의 허리가 구십 도로 꺾였다.

 그의 뒷머리카락을 말아 올리며 수평으로 지나가던 복면인의 검이 수직으로 뚝 떨어졌다. 남정기의 머리가 수박 쪼개지듯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남정기의 오른쪽 입매가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 그의 눈은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그는 근 일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람과 싸우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간만에 몸을 풀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것이다.

 “조심하게. 이자들이 쓰는......”

 남정기가 복면인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본 전중걸이 남정기에게 경고를 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정기와 복면인이 그가 말할 틈도 없을 만큼 빠르고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리가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던 남정기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왼쪽으로 일척을 이동했다. 복면인의 검이 남정기의 머리가 있던 곳을 수직으로 가른 것은 간발의 차였다.

 복면인의 검세가 다시 수평으로 변하며 남정기의 몸을 베어가려 할 때 직각으로 구부러졌던 남정기의 상체가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발끝으로 슬쩍 바닥을 걷어찬 그의 두 발이 무서운 속도로 복면인의 턱을 걷어 올렸다.

 쐐애액

 남정기의 발이 복면인의 턱에 닿을 즈음에야 공기가 찢어지는 파공음이 들렸다.

 그가 움직이는 속도를 소리가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복면인은 검을 움직이는 것보다 뒤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검이 방향을 바꾸어 남정기를 베는 것보다 그의 턱이 부서지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쑤와악

 복면인이 물러나며 남정기의 발끝이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복면인의 턱을 스쳐 지나갔다. 복면이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처럼 세차게 복면인의 뺨을 두드렸다.

 복면인의 신형이 바람처럼 일장을 물러났지만 그는 검을 다시 휘두를 수 없었다.

 허공에 떠 있던 남정기의 신형이 마치 바늘에 달린 실처럼 복면인을 따라붙었다.

 그의 발목이 방금전과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 복면인의 턱을 차며 치솟았던 그의 오른발이 대부(大斧)의 날처럼 중년인의 미간을 내려찍었다.

 복면인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남정기의 오른발을 피하려고 철판교를 시전하며 뒤로 눕는 그의 가슴을 향해 남정기의 왼발이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퍽

 쿵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둔중한 격타음과 함께 남정기의 왼발에 가슴을 얻어맞은 복면인의 몸이 동굴 바닥과 거칠게 충돌했다.

 ‘맷집이 제법이군’

 생각하는 동안에도 남정기의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그의 사성(四成) 공력이 담긴 삭혼각(削魂脚)에 맞은 복면인이 뇌려타곤의 수법으로 몸을 굴려 이장을 물러난 후 퉁기듯 일어나 그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검을 잡고 있는 복면인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은 창졸지간에 당한 타격으로 지진을 만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심한 심적 충격을 받은 모습이 확연했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일초를 견디지 못하고 무림인이라면 혀를 빼물고 죽을 정도로 수치스럽다는 뇌려타곤을 사용하고서야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그는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피를 억지로 삼켰다.

 피를 토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야 그가 모를 리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럴 틈이 없었다.

 일초만에 그를 땅에 구르게 만든 자가 어둠의 나락같은 검은 피풍을 펄럭이며 어느 사이 그의 검권(劒圈)내로 뛰어들고 있었다.

 “이런 개같은....”

 복면인은 치미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치려 했지만 역시 그 말도 끝을 맺지 못했다. 폭풍처럼 그를 향해 접근한 남정기의 신형이 그의 검앞에서 갈지자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급박하게 숨을 멈추었다.

 피동에 몰린 자신의 상황을 참지 못하고 몇 마디 하려했지만 그도 검에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쏟아부은 자.

 고수와의 대결에서 입을 연다는 것이 자살행위와 같은 짓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것이다.

 쉬잇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시퍼런 살기를 뿌리며 남정기의 어깨를 향해 떨어졌다. 검은 보이지 않고 푸른빛만이 번뜩일 정도로 빠른 검격(劒擊)이었다.

 그가 평생을 수련해온 낙백구검(落魄九劒) 중 가장 자신있어 하는 유성낙영(流星落影)이다.

 남정기의 전신이 복면인의 검에서 쏟아진 여섯 갈래의 검기로 난자되는 듯한 순간 갈지자로 움직이던 남정기의 신형이 뿌옇게 흐려졌다.

 접근전시 그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귀영전마보(鬼影戰魔步)였다.

 복면인의 두 눈은 유성낙영의 검세가 허무하게 남정기가 움직이던 공간을 베는 것을 보며 암울하게 변했다.

 남정기의 모습은 그의 정면에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적의 모습을 놓쳤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복면인은 너무 잘 알았다.

 유령처럼 사라졌던 남정기의 신형이 검을 쥔 복면인의 손목 부근에서 허깨비처럼 솟아오른 것은 복면인이 유성낙영의 검세를 거두고 방어로 전환하려고 할 때였다.

 복면인은 자신의 정면 두자도 안되는 곳에서 불쑥 솟아오른 남정기의 입가에 소리없이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전율했다.

 남정기의 왼손이 사내의 검을 쥔 손목의 맥문을 움켜쥐는가 싶더니 바람처럼 한 걸음을 전진하며 오른손 팔꿈치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쇳덩어리같은 그의 팔꿈치가 복면인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빠빠박

 “으아악”

 콰앙

 연속적인 격타음과 처절한 비명, 격렬한 충돌음이 동굴에 메아리쳤다.

 삼장은 떨어져 있던 동굴벽에 날아가 쳐박혔던 복면인의 신형이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큰 대자로 바닥에 누운 복면인의 입가가 검붉은 빛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그의 복부 위쪽은 심하게 함몰되어 있었는데 남정기가 팔꿈치로 그의 얼굴을 치면서 왼쪽 무릎으로 그의 복부를 동시에 차올렸기 때문에 발생한 상처였다.

 잠시 후 꿈틀거리던 복면인의 몸이 그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반쯤 열려 있는 눈에 빛이 사라졌다.

 우두둑

 펄럭이던 피풍이 다시 몸을 덮자 남정기는 목을 좌우로 슬쩍 비틀어 목뼈를 퉁겨 보았다.

 그는 복면인을 보며 조금 아쉬운 눈빛을 던졌다. 쓸만하긴 했지만 그의 몸을 완전하게 풀기엔 많이 모자란 자였다.

 그가 복면인에게 마지막으로 선사했던 수법은 삭혼각(削魂脚) 중의 슬격(膝擊)과 쇄혼권(碎魂拳)중의 주법(肘法)으로 사람에게 사용한 것은 일 년만의 일이었다.

 복면인의 검은 꽤 날카로웠지만 그의 삼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그것은 무공이 차이도 있었지만 대적(對敵)하는 마음가짐의 차이 탓도 컸다.

 복면인은 남정기를 전중걸의 일행이라고 판단했고 그 능력을 전중걸과 비슷한 수준으로 판단하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고수들의 승패를 가르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다. 집중력은 그가 지닌 바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다.

 엇비슷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부딪칠 때 집중력이 약한 자는 패배한다. 그것은 뒤집을 수 없는 격투의 진실이다. 능력의 차이가 심한 경우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전투시 남정기의 강렬한 집중력과 두려움을 모르는 불굴의 정신력은 지난날 그의 적들에게 경탄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의 적들은 그를 철마(鐵魔)라고 부르며 경원했었다. 복면인의 패배는 시작도 하기 전에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크헉!‘

 “우웁”

 “으악”

 세 번의 처참한 비명 소리가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이 차례대로 울려퍼졌다.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린 남정기는 전중걸이 상대하던 복면인 세 명이 목에 구멍이 난 채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우두머리가 쓰러지는 것을 본 그들의 집중력이 잠시 흐트러지자 검진에 순간적이나마 파탄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전중걸이 절초를 사용해 그들을 시신으로 만든 것이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판관필을 늘어뜨리던 전중걸이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과 거칠어진 호흡은 전중걸이 복면인들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말해 주었다.

 전중걸은 남정기를 향해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에겐 남정기보다 중요한 사람이 동굴안에 두 명이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다는 듯 소년의 앞에 누워있는 남포중년인은 이미 사망했음에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검은 수염이 탐스러운 청수한 사내였다.

 그를 내려다보는 전중걸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손을 내밀어 중년인의 눈을 감긴 후 옆에 앉은 소년을 가슴에 안았다.

 “건(建)아!”

 “..숙부님...숙부님....”

 전중걸이 소년을 끌어안았지만 넋을 잃고 앉아 있던 소년은 파리하게 질린 입술로 숙부님 소리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소년의 눈은 동공이 풀려 있었다.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제 정신도 아닌 것이다.

 오늘 벌어진 일을 맨정신으로 받아들이기에 열 다섯의 아이는 너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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