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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감만 믿고 본의 아니게 밀당을 한 백희는 찝찝한 마음을 안고서 방에 돌아 가는 중이었다. 백희는 왕궁 안이 너무 넓어 길을 잃을 것 같았으나 다행히도 자신에게 스프를 떠먹이려 했던 시녀 위니를 포함한 백희를 농락한 시녀무리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들은 백희의 등 뒤에서 열심히 길을 가르쳐 주었다.
백희는 어제 보지 못했던 왕궁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여유롭게 걸었다. 이곳은 백희에게 별천지였다.
왕궁 복도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노출되어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다. 복도의 벽은 거울 비슷한 재질로 도포되어 있었는데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상충되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였다. 반질반질한 복도바닥에 창문에서 들어온 빛과 거울에서 반사된 빛들이 춤을 추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장인이 만든 조각품들이 곳곳에 보였고, 천장을 올려다보면 아름다운 천장화가 백희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림을 좋아하는 백희는 천장화를 주의깊게 보았다. 위엄있는 용의 모습과 거대한 산, 그리고 인간들이 어우러진 힘찬 그림이 천장을 수놓고 있었다. 기둥 하나하나에도 용이 승천하는 모양이 조각 되어 있었다.
아직 모든게 생소한 백희는 불안한 마음이 가슴 속에 머물고 있었지만, 화려한 궁궐 안을 보니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아름다운 왕궁 복도는 백희의 불안한 마음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었다.
"위니. 저 궁은 처음 와 봐요. 멋진 예술품이 정말 많네요."
"배키님과 같은 귀족 자제분들께서 궁에 오시면 그림과 조각품을 보고 감탄하곤 합니다."
미소지으며 말하는 위니에 백희는 자신이 귀족이 아니라 아예 딴세계 사람이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거두었다. 방금까지 함께 했던 왕과 유능한 재상이라던 제파도의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대가 이세계인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
'배키님이 이세계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난리가 날것입니다. 분명 배키님의 안위에 해를 가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거에요. 그러니 부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함께 지내다 친해진 사람들 그 누구에게도 말입니다.'
그때 백희는 반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만요. 그런데 제 기억이 맞다면 어제 저를 본 사람이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건 맹….'
'그 자리에 있던 인간들 중 그대가 이세계인이란 사실을 다른이에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 하나 뿐이다.'
백희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제파도의 마지막 말을 왕이 가로챘던 것이 신경쓰였다. 왕은 어제 그 자리에 있던 수 많은 사람들에게 백희가 모르는 어떤형태의 압박을 넣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백희는 왕의 말에 코웃음 쳤다. 그 많은사람들의 입을 어떻게 막는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뚫린 입을 어떻게 막겠다고. 그게 가당키나 하나.'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다. 백희는 왕이 멍청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모든 생각을 떨쳐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 수록 머리속에는 물음표만 떠다녔다. 그리고 제파도의 말이 떠올랐다.
'배키님의 안위에 해를 가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거에요.'
이세계인이라는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감이 오질 않았다. 백희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눈치로 보아하니, 이곳 세계의 사람들에게 이세계인은 좋은 징조다. 하지만 백희 입장에서 안전을 위협 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몹시 별로였다.
백희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궁궐 복도의 모퉁이를 돌 때였다.
'쿵!'
"앗!"
가장 앞서 걷고 있던 백희의 몸에 백희의 허리만한 어린아이가 부딪혀 나동그라 졌다. 그러자 백희가 곧장 어린아이를 부축했다.
"아이구, 애기야. 괜찮니?"
"뭐?! 애기?"
백희에게 부딪혀 뒤로 넘어진 어린아이는 곧장 백희에게 눈을 부라렸다. 어린아이는 백희의 부축하는 손을 매섭게 쳐내며 분노했다.
"이름이 뭐냐! 내 당장 너를 잡아 쳐 넣어버리겠다!"
어린아이의 앵앵대는 목소리가 백희의 귓전을 때렸다. 백희는 은근히 손이 매운 꼬맹이를 째려봤다. 건방진 언사에 어린아이에서 꼬맹이로 강등시킨 백희는 금방 일어난 아이를 살펴보았다.
갈색 밤톨같은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꼬맹이었다. 바깥에서 열심히 놀았는지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있었고 작은키로 보아 7~8살 정도 되어 보였다. 아주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하지만 이 건방진 꼬맹이가 못된 말들을 찍찍 내뱉는 모습이 백희의 눈에는 아주 싹수가 노래 보였다.
"이 꼬매…, 컥."
순간 백희는 욱해서 꼬맹이라고 말할 뻔했으나 초인적인 힘으로 자신의 목울대를 스스로 조여 멈췄다. 백희의 눈에 꼬맹이 뒤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시종 한명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혹시나 이 꼬맹이가 신분이 높으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것 같았다. 하지만 뒤에 시종이 한명 뿐이니 그리 높은 신분은 아닐 터였다. 백희는 순간 조선시대를 떠올렸지만 자신에게 적용시키기가 힘들었다. 눈 앞에 있는 꼬맹이는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다.
백희는 마음을 다스렸다. 분명 건방진 꼬맹이지만, 듣는 꼬맹이 기분나쁘지 말라고 말을 골랐다.
"어이. 어린, 이. 친구."
백희는 또 순간 적으로 '어이. 어린놈아"라고 말할 뻔한걸 가까스로 참았다. 백희가 백방으로 건방진 꼬맹이를 깔아뭉게지 않으려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린이 친구는 아까보다 더 불같이 화를 냈다.
"뭐라고? 어린이 친구?"
이를 뿌드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문의 여식이냐! 당장 가주를 불러 책임을 물을 것이다!"
어린이 친구가 어린아이 특유의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리고 백희는 짜증이 났다. 백희의 기준으로 봤을 때 결코 화낼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백희만의 생각이었는지 어린이 친구는 길길이 날뛰었다.
"당장 말하지 못할까? 네 가문에서는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것이냐!"
그말에 백희는 코웃음을 쳤다. 안그래도 이 곳에 떨어지고 나서 지금까지 겪은 상황 중 마음에 드는게 별로 없었다. 그런데 자기 허리만큼 오는 꼬맹이가 앵앵대는 목소리로 소리치며 가족을 들먹였다. 백희는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녀석이 가족 교육을 운운하며 속을 긁어 대는데 열이 안받을 수 없었다.
백희는 같잖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이없네. 내가 묻고 싶다. 너야말로 예의는 쌈싸먹었냐? 버르장머리없이?"
"버르장머리?"
"꼬맹이 주제에 바락바락 대드는게 웃기네. 안그래도 누나가 기분이 거지같거든? 건방떨지 말고 꺼. 아니, 가라."
"꼬, 꼬맹……."
백희의 말이 끝나자 마자 어린이 친구 뒤에 있던 시종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침이라도 떨어질 기세로 입을 벌리며 얼굴색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변해갔다. 그리고 백희 뒤에 있던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백희는 몰랐지만 백희가 어린이 친구를 만났을 때부터 안절부절 못했던 시녀들은 백희의 지금 말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사실 어린이 친구는 로코의 왕 '그래지한 얀 로코'의 셋째 아들 '루크 그래지한 로코' 였다. 루크는 로코 왕국의 3왕자로, 어디에서도 이런 하대와 모욕을 받아 본적이 없었다. 루크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말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루크가 어버버 거리고 있을 때 백희는 싸늘한 표정으로 루크를 내려다 보았다.
백희는 이것도 많이 참은 거였다. 가족사랑이 지극한 백희는 마음 같았으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이란 욕은 다 퍼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어린애였기에 상스러운 말들은 가까스로 삼킨거였다.
그때 뒤에서 여러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백희가 뒤를 돌아보니 그래지한과 제파도 그리고 뒤에 딸린 왕의 수행인원들이었다.
그래지한이 백희와 루크를 보자마자 물었다.
"거기서 뭐하는거냐?"
그러자 루크가 바로 고개숙여 인사했다.
"아, 아바마마를 뵙습니다."
"그래. 둘이 만난 모양이군."
그래지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백희와 루크를 번갈아 보았다. 왕은 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백희의 분위기는 더 없이 냉랭했고 어린 막내아들 루크의 얼굴도 붉은것이 흥분을 한 모양새였다.
백희는 굳은 표정으로 속으로 '망했다.' 를 외치고 있었다. 저 건방진 꼬맹이의 아빠가 왕일 줄이야. 그렇다면 왕자라는 소리인데 왕자 입장에서 자신의 언사가 얼마나 건방졌을지 생각했다. 그제서야 루크가 길길이 날뛴 이유를 알게 된 백희는 기분이 더더욱 가라앉았다.
'하지만 우리 가족을 건드리는 사람은 왕자건 왕이건 용서 못해.'
백희는 자기 나름의 기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상대가 아무리 왕자라도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런 생각을 모르는 왕자 루크는 백희가 자신의 아버지이자 왕인 그래지한을 보고서도 꼿꼿이 서있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왕을 보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 왕이 고개를 들라고 할 때까지 숙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백희는 아까 왕을 보았기에 두번 인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만히 있는 백희를 더이상 보고 있을 수 없던 루크는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 건방진…! 당장 아바마마께 예를 표하지 못할까!"
그러자 그래지한과 제파도는 루크와 백희 둘 사이에 좋지않은 말들이 오갔음을 짐작했다. 왕이 제파도에게 눈짓했다. 그리고 루크의 외침을 들은 백희가 발끈하려고 할 때 제파도가 나섰다.
"배키님! 왕궁도서관에 가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로코의 왕궁도서관은 다른 왕국들보다 유난히 크고 웅장하기로 소문이 났답니다. 물론 크기가 큰 만큼 서적도 많습니다. 여인네들이 좋아할 만한 소설도 많이 있고요!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보지 않겠어요?"
제파도가 백희에게 우수수 말하고 있을 때 그래지한은 루크에게 말했다.
"루크. 따라 와라."
"예?"
이 이중 연계에 백희와 루크는 정신이 없었다. 백희는 어떨결에 제파도를 따라가기 시작했고 루크는 아버지 그래지한을 따라 갔다. 그렇게 두 무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