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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종의 다리
작가 : 밈밈밈
작품등록일 : 20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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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꿰다_6
작성일 : 17-06-10     조회 : 318     추천 : 0     분량 : 6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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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 그래지한은 루크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왔다. 사실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으나 루크와 단둘이 있기 위해선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지한은 제파도에게 바람을 조금 쐬고 오면 일을 잘 할 수도 있을것 같다고 설득하고 나왔었다. 하지만 일을 하기 싫었던 그는 제파도의 눈을 피해 몰래 도망 칠 생각이었다.

 

  그래지한은 혀를 차며 집무실 안에 있던 시종들을 물렀다. 그런 다음 아까 백희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은 루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루크."

  "예. 아바마마."

  "아까 걔 어땠냐?"

  "네?"

 

  루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크는 처음에 그래지한이 무슨말을 하는지 잘 몰랐으나 곧 백희를 떠올리고는 분기탱천했다. 루크가 어린아이 특유의 가는 목소리로 소리를 높였다.

 

  "그 배워먹지 못한 계집애 말씀이십니까? 전 살면서 그런 계집은 처음 봅니다!"

 

  그래지한은 루크를 보며 속으로 크게 웃었다. 10년도 못되게 살아온 루크가 그런 말을 하니 귀여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마음껏 웃으면 어린 루크가 상처 받을걸 알기에 꾹 참았다. 우스운 마음을 애써 무표정으로 대체하며 그래지한이 입을 열었다.

 

  "걔 이세계인이다."

  "게다가 생긴것도 이상하게 생겼어요! 막 코가 낮고 눈도 작고 얼굴 색도 뭔가 노랗고!"

 

  그래지한이 말하거나 말거나 흥분한 루크는 열심히 자기 할 말만 했다. 아까만해도 어른스러움을 흉내내던 아이가 흥분을 하자 아이다움을 마구 드러냈다.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이 사라지고 아버지와 둘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세계인이라 그래."

  "네?"

  "이세계인. 아직 안배웠느냐?"

 

  루크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게 뭐에요?' 라는 표정으로 그래지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젊은 아낙네들이 보았다면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또래보다 작고 귀여웠던 루크는 자신을 귀엽게 여기는 사람들이 싫었다.

 

  루크는 멋있는 남자이고 싶었다. 전장을 누비며 검을 휘두를 때 마다 적들을 해치우는 기사처럼 말이다. 루크는 눈 앞에 앉아있는 아버지 그래지한을 훌륭한 기사로 생각했다. 그런데 정확한 사실은 그래지한이 왕이기 때문에 기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루크가 자신의 아버지이자 로코의 왕인 그래지한을 멋진 기사로 봤을까.

 

  그 이유는 그래지한이 왕좌에 앉자마자 10년 동안 셀 수 없는 정복전쟁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친히 전장에 들어가 적군을 도륙해 나간 정신나간 왕이었다. 왕들은 자기가 군을 지휘하긴 해도 직접 몸을 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래지한은 달랐다. 아주 물만난 물고기 마냥 로코 인근 왕국들에게 시비를 걸고 전쟁을 일으켜 자기가 직접 발로 뛰어다녔던 것이다. 왕이 그러자 귀족들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이 뛰어드는데 귀족들이 뒤에 앉아 있다는게 말이나 되겠는가. 귀족들은 왕이 어떻게 해서든 전장에서 죽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전쟁을 하다보니 로코는 10년만에 영토를 두배로 늘릴 수 있었다. 그래지한은 재위 15년 중 10년을 전쟁으로 보내고 후반 5년 동안은 귀족들의 간절하디 간절한 요청에 의해 왕궁 안에 얌전히 머물고 있었다.

 

  다른 나라 왕들과 달리 유난히 비범한 그래지한의 현란한 이력들은 왕자인 루크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어린 루크에게 남자 중 남자는 기사였다. 그리고 아버지 그래지한의 행보는 기사들 중 특급기사였다.

 

  루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래지한은 그저 난감해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루크는 아직 이세계인에 대해 배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직 10살이다 보니 모르는게 많은건 당연했다. 그래지한은 한숨을 내쉬며 루크에게 이세계인에 대해 설명해나갔다. 어쩌면 오늘은 해가 질 때까지 집무실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

 

  제파도와 백희는 한참만에 왕궁도서관에 도착했다. 원래 왕궁도서관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나 재상이라는 직함은 프리패스나 다름 없었다. 밖에 시녀들을 대기 시켜놓고 안에 들어간 둘은 사서의 눈을 피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제파도를 따라가며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백희의 얼굴은 볼 만했다. 백희 평생, 이렇게 많은 책들은 처음 보았다. 백희가 종종 책을 빌리러 갔던 지역 도서관도 제법 크고 책도 많았지만 로코의 왕궁도서관에는 비할바가 못됐다. 왕궁도서관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컸고 그만큼 많은 책들이 백희를 압도 할 정도로 많았다. 백희는 왕궁 도서관이니 그렇겠지 싶다가도 '그래도 너무 많은것 같은데. 도서관 안에서 길 잃는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파도는 사서에게서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되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백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루크 왕자님이랑은 무슨일이 있으셨던 거에요?"

 

  백희가 몸을 움찔 거렸다. 백희는 제파도를 바라보았다. 제파도는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보였다. 긴 남색 머리를 뒤로 묶어 내리고 동그란 안경너머로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코와 입은 이곳 사람들에 비해 조금 더 작았다. 단정한 남색 옷차림새는 제파도를 더욱 착실한 인상으로 보이게 했다. 키는 백희보다 조금 컸으나 체격은 왜소했다.

 

  "배키님?"

 

  제파도가 재촉하자 백희는 머뭇거리며 루크와 부딪혀 생긴 말다툼을 다 말했다. 그러자 제파도는 당황하며 백희에게 말했다.

 

  "아, 아무리 몰랐어도 왕궁 안에 돌아다니는 어린 남자아이라면 왕자님일거라는 생각은 못해보셨어요?"

  "못했죠. 하하. 원래 왕자들은 뒤에 딸린 시종들이 한무더기 아닌가요? 근데 한명만 있길래……."

  "아…. 그건 루크 왕자님께서 사람들이 많은걸 싫어하셔서 그래요."

  "그렇군요. 근데 전 그 애가 왕자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우리 가족을 건드렸기 때문에 똑같이 했을거에요."

 

  제파도는 입을 다물었다. 제파도는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백희를 바라보았다.

 

  "혹시 공주셨어요?"

  "네? 아뇨. 평범했는데요."

 

  백희는 바람 빠지는 소리로 대답했다.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파도는 계속해서 질문을 했다.

 

  "그럼 고위귀족?"

  "아뇨. 그냥 국민 중 한 사람이요."

 

  백희의 표정도 제파도의 표정도 점점 이상해졌다. 백희는 이 사람이 무슨의도로 이러나 싶었고 제파도는 백희와 말이 어긋난 느낌을 받았다.

 

  제파도의 머리속은 복잡했다. 혹시 백희가 있었던 세계의 사람들은 안하무인이 미덕인가 싶었다. 제파도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쪽 세계는 어떤 세계에요?"

 

  백희는 제파도의 물음에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제파도의 물음이 너무 광범위 했기 때문이다. 제파도는 그런 백희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질문을 다시 바꾸었다.

 

  "그쪽 세계에서 지배자들은 어떤가요?"

 

  백희는 제파도가 바꿔 묻자 더욱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입을 딱 다물었다. 백희는 그제서야 제파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제파도는 자신을 아주 예의 없고 몰상식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백희의 표정을 보자 제파도는 당황하면서 급히 말을 꺼냈다.

 

  "아니, 그러니까. 그 차이점이 좀 궁금해서……."

  "차이점을 말하면 싫어하실 것 같은데요."

 

  제파도가 변명하듯 말하자 백희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백희의 말에 제파도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제파도는 역시 백희의 세계가 안하무인이 미덕인가 싶었다. 세상은 넓고 문화는 다양하다. 게다가 백희는 이세계에서 왔으니 그 쪽 세계에서는 백희가 보통 일 수 있다.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제파도는 미소지었다.

 

  "괜찮으니 말해보세요."

 

  그러자 백희가 한참을 머뭇거렸다. 항상 거침없이 말하던 백희가 우물쭈물 거리자 제파도는 더욱 궁금해졌다. 제파도가 다시한번 재촉하자 백희는 눈을 찡그리더니 엉뚱한 말을 했다.

 

  "그쪽도 귀족일거 아니에요. 그럼 제 말에 충격 받을지도 몰라요."

 

  백희의 말에 제파도의 머리속은 물음표로 가득찼다. 자신이 귀족인것이 무슨상관이란 말인가?

 

  사실 제파도는 로코의 어느 시골에 아주 작은 영지를 가진 남작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남작가의 다섯째 아들이면 아버지의 뒤를 잇는게 거의 불가능 하다고 볼 수 있다. 제파도는 남작가에서 첫째가 아닌 다섯째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이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기에는 앞서 태어난 네명의 형들이 있으며, 그 형들과 피터지게 싸워 물려받고 싶을 만큼 남작이라는 작위가 탐나지 않았다.

 

  형들이 투닥거리며 싸울 동안 제파도는 자신이 머리가 좋고 공부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주로 로코의 역사, 로코 왕들의 역대 업적, 로코의 정치, 로코 수리학, 로코의 법학, 로코의 문학 등등.. 로코관련 모든 도서를 핥고 씹듯이 삼킨 제파도는 어느새 로코 왕궁의 말단 행정관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어찌어찌 왕 그래지한의 눈에 띄어 고속 승진 절차를 받아 재상이라는 자리에 앉은 것이다. 제파도는 자신이 굉장한 행운의 사나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만약 제파도가 계속 자신의 고향에 남아있었더라면 평범한 농부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추수시기에 농민들을 도와주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배경을 둔 제파도는 다른 귀족들보다 특권의식이 낮았다.

 

  하지만 제파도의 속사정을 알리 없는 백희는 제파도가 굉장한 귀족가문의 천재일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재상이라는 지위가 그랬고 그런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너무 젊었기 때문이다.

 

  제파도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귀족 출신이긴 해도 농민들과 어울려 지냈어요. 편히 말해보세요."

 

  제파도의 적절한 설득에 백희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내가 살던 곳은 왕이 없어요. 아, 있는 나라도 있는데 우리나라는 없어요."

 

  그러자 제파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수민족인가 보군. 아니면 마을 단위던가. 가장 나이가 많고 명망있는 노인이 마을의 결정자였겠군.'

 

  여기까지 생각한 제파도는 미소지으며 백희에게 계속 물었다.

 

  "그럼 누가 나라를 다스리나요?"

  "대통령이요."

  "대통령이 뭔가요?"

  "대통령은 국민이 투표를 해서 뽑은 대표에요. 우리는 신분의 고하가 없어요."

  "아, 인구수가 굉장히 적은 나라인가 보군요."

  "아뇨. 5천만명인데요."

 

  그러자 제파도는 두 눈을 부릅 떴다.

 

  '오, 오천만……!'

 

  제파도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파로의 서쪽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로코 왕국의 인구수가 약 3천만명이었다. 그리고 서쪽 대륙의 인구수는 대략 6억정도로 파악 되고 있다. 서쪽 대륙에서 크고 작은 어떠한 국가도 천만명이 넘어가면 투표로 대표를 뽑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파도가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놀라자 백희는 초조해졌다. 괜히 말한게 아닌가 싶었다. 제파도가 놀랄거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놀랄 줄은 몰랐다.

 

  백희는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 곳을 조선시대에 대입해 보았다. 그리고 곧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조선시대에 어떤 이상한 사람이 '왕이 없고 귀족이 없으며 국민의 손으로 지도자를 뽑는 국가가 있다' 라고 말하고 다닌다면 당장에 목이 날아갈 것이다. 그리고 목이 날아가기 직전, 지도자를 뽑는 국민의 수가 오천만명이라고 하면 조상님들께서 얼마나 황당해 하실까. 분명 미친놈이로구나-! 외치며 망나니에게 칼을 쥐어 주실거다. 거기까지 생각한 백희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다, 다른 사람한테 절대 말하지 말아요. 특히 왕한테는 더더욱 말하면 안돼요."

 

  그러자 제파도의 눈이 가라앉았다. 백희의 반응은 백희의 말들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꼴이었다. 백희가 겁먹은 표정으로 안절 부절 못하고 있자 제파도는 숨을 들이키며 계속 물었다.

 

  "배키님. 몇년 마다 대통령을 뽑나요?"

  "……."

  "괜찮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요.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 우리나라는 5년에 한번씩이에요. 다른나라는 4년에 한번씩 뽑는 나라도 있고. 근데 왕이 통치하는 국가도 있어요."

 

  백희는 의도적으로 왕이 통치하는 국가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파도는 5년에 한번씩 지도자를 뽑는다는 사실이 놀라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대통령을 뽑을 때 얼마동안 시간이 걸립니까?"

  "하루면 끝나던데요."

  "오, 오천만명이?"

  "아, 20세 이상 성인만요."

  "남녀 전부를 말하는 겁니까?"

  "네. 당연하죠."

 

  제파도는 두 눈을 감았다. 백희의 말로 미루어 보아 백희의 세계에서는 파로와 전혀 다른 방식의 정치체계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제파도는 백희가 어째서 그렇게 무례했는지 알것 같았다. 제파도는 생각했다.

 

  '배키님의 세계에 대해 알아야겠다. 이건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세계야. 후세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알아야 이곳에서 배키님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거야.'

 

  그때 부터 제파도는 백희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백희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민주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의회와 시민단체, 남녀 평등사회등 여러가지를 대답했다.

 

  그날 제파도는 해가 질 때까지 왕궁도서관 구석에서 백희의 말을 경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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