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가 다가와 이만 문을 닫겠다고 하니 제파도와 백희는 내일을 기약했다. 제파도는 백희에게 아직 물어 볼 것이 많았다.
제파도는 도서관을 나가기 전에 얇은 책 하나를 빌렸다. 그리고 그 책을 백희에게 건넸다.
"읽어보세요. 가벼운 이야기 책이랍니다."
백희는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희는 제파도에게 쉴새 없이 말하느라 어찌나 피곤했던지 책 표지도 보지 않고 건네 받았다. 그들이 도서관 문을 열고 나가자 백희의 뒤에 있었던 시녀들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백희는 깜짝 놀라 그녀들에게 사과하기 시작했다.
"정말 미안해요. 기다리는 걸 깜빡하다니……! 정말 미안합니다. 제 잘못이에요."
백희는 몇시간 동안이나 기다렸을 그녀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런데 시녀들은 백희의 사과에 오히려 안절부절 못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위 귀족의 여식이라고 알고 있는 백희가 고개숙여 사과 하자 그녀들은 몸둘바를 몰랐던 것이다. 그러자 백희는 자신이 잘못했는데 왜 고개를 숙이냐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파도는 묘한 눈으로 백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백희는 방에 돌아가자 마자 시녀들이 준비해 준 식사를 하고 목욕을 했다. 그녀들이 다시 한번 백희의 목욕시중을 들려고 했으나 백희는 아침보다 더욱 단호하게 저항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저 혼자 할 테니 나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시녀들은 당황했다. 보통 왕실 여자들이나 고위 귀족의 여자들은 시녀들의 목욕시중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는다. 시녀들도 그 일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녀들은 오늘 아침 백희가 거부의 몸짓을 보였을 때 익숙치 않은 시녀들이라 부끄러워하시나 보다하고 생각했다. 게다가 시녀들은 시녀장도 아닌 무려 왕을 담당하는 시종장에게서 백희를 잘 보살피라는 말까지 들었다.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백희가 못하게 하니 항상 미소를 유지했던 그녀들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그, 그치만. 혼이 날지도 몰라요."
백희는 그녀들이 누구에게 혼이 난다는 건지 몰랐지만 더 이상 그녀들에게 몸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백희는 목욕탕에 가서 단한번도 때밀이에게 몸을 맡겨본 적이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지금 저에게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부디 한시간 뒤에 욕조를 치우러 와주셨으면 해요. 그것도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제 제가 입고 왔던 옷들이 어디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
백희의 끈질긴 설득에 시녀들이 다 나갔다.
드디어 혼자 있게 된 백희는 시녀 위니가 가르쳐준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백희가 입고 온 검은색 옷가지들이 개어져 있었다. 백희는 황급히 상의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찾았다.
"있었구나!"
환희에 찬 목소리로 백희는 핸드폰을 만졌다. 하지만 핸드폰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백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 보았다. 백희는 한 없이 우울해졌다. 앨범 안에 있는 사진이라도 볼 수 있을거라는 희망찼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백희는 가족을 두번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나 슬퍼졌다. 그리고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흘러넘쳐 침대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백희는 다음날이 되자 왕 그래지한과 제파도에게 이곳에 머물 수 밖에 없음을 시인했다. 그래지한의 집무실에 어제와 같이 모인 그들은 백희의 심각한 표정에 무게를 잡고 앉아 있었다.
"완전 심각한 문제가 생겼어요."
"무슨 문제지?"
백희의 표정에 그래지한과 제파도는 긴장했다. 그들은 백희의 심각한 문제를 짐작할 만한 어떠한 단서도 잡지 못했다.
"이 곳 글자를 읽을 줄 몰라요."
그러자 그래지한은 힘이 빠졌다. 백희가 한껏 무게를 잡았기에 무슨 커다란 문제라도 생겼나 걱정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로코에서 글을 못읽는 사람은 넘쳐났다. 심지어 귀족가의 여식들 중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반도 안되었다.
하지만 제파도는 생각을 달리했다. 백희는 파로에 떨어지자 마자 파로의 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글도 무난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백희는 제파도가 어제 빌려다 준 얇은 책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림과 글이 같이 있던데 동화책이 맞나요?"
"네, 맞습니다. 배키님, 이곳 글자는 읽히지 않으신가 보군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그래지한의 심드렁한 말에 백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엄청 심각한 문제잖아요! 이 세계의 글을 못 읽는 다면 돌아갈 자료 찾는데 커다란 장애물이 될거라고요."
그래지한과 제파도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 입장에서 백희가 파로의 글을 모른다는것은 행운이었다. 그들은 백희가 영원히 이곳 파로의 로코 왕국에서 머물기를 바랐다.
"그럼……. 배키님은 어떻게 하셨으면 좋겠어요?"
"저에게 글을 가르쳐 줄 선생님을 붙여주실 수 있을까요? 군식구 주제에 이런 요청을 하는게 마땅치 않을 수 있겠지만 꼭 부탁 드립니다."
백희의 정중한 부탁에 그래지한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까지 보였던 막나가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이다.
어차피 백희에게 교육을 시킬 생각이었던 그래지한은 이걸로 거래를 하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3왕자 루크와 결혼해라!' 이러고 싶었지만 그래지한은 너무 조급해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지한의 본능이 외치건데 백희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다가는 좋지 않은 일이 생길것 같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한가지 조건이 있다."
"무슨 조건이죠?"
"어제 봤던 왕자를 기억하느냐?"
백희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그 꼬맹이는 얼굴은 귀여워도 말이 너무나 건방졌다. 그렇기에 루크에 대한 인상은 좋지 않았다. 그런 백희의 감정이 표정에 바로 드러나자 그래지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루크는 올해 10살이다. 한창 공부 해야할 때지. 그런데 녀석이 기사가 되겠다고 공부를 등한시 한단말이야. 매일 검술 수련밖에 안하고 있거든."
"그래요?"
별 관심 없어 보이는 백희였지만 그래지한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원한다면 스승을 붙여주는건 일도 아니다. 보아하니 열심히 할테고 말이야."
"당연하죠."
그래야 돌아갈 단서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백희는 어떻게해서든 이곳 글자를 익혀서 악착같이 단서를 모을 작정이었다.
"그런 그대와 함께 배운다면 루크가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겠나."
그제서야 그래지한의 의도를 눈치 챈 백희는 눈썹을 찌푸렸다. 만약 루크와 한 스승아래 함께 배운다면 백희는 분명 루크에게 온갖 무시를 당할게 뻔했다. 자기보다 10살이나 어린 어린아이에게 무시 당하고 싶지 않았던 백희는 그래지한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자는 글을 다 익혔을거 아니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갑자기 끼어 들어가면 수업에 커다란 차질이 생길거에요. 그렇다면 왕자의 배움에 도움은 커녕 걸림돌이죠!"
그래지한은 필사적인 백희를 모르는 체 하며 제파도에게 물었다.
"루크가 글을 다 익혔던가?"
"왕자 저하는 아직 글을 다 익히시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는군."
"아니, 제파도님이 어떻게 알아요!"
백희는 다급하게 외쳤다. 제파도는 한 나라의 재상이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쁠 사람이 왕자의 교육진도를 어떻게 안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백희를 보며 제파도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루크님의 스승입니다. 배키님."
"그게 말이 돼요?"
백희가 소리 높여 말했다. 그러자 제파도는 무언가 놓은 듯한 표정으로 백희에게 말했다.
"하하. 저도 처음에는 두가지 일을 동시에 하기에는 너무 힘들다고 전하께 말씀드렸지만……."
"왜? 할만 하잖아?"
뻔뻔한 그래지한이 끼어들자 제파도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님이 생각보다 훨씬 공부를 안좋아 하시더군요. 정해진 수업시간 중 반 이상을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제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았고요."
제파도의 얼굴에서 부처의 마음가짐을 엿 본 백희는 그가 딱해졌다. 얼마나 학생이 수업을 빼먹으면 저런단 말인가. 백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자 이 때다 하고 제파도가 치고 들어왔다.
"두 분이 어제 다투신게 차라리 잘되었지요. 배키님이 루크님에게 불을 지펴주시면 됩니다. 제 생각대로라면 루크님은 배키님한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할거에요."
백희는 제파도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제파도는 그야말로 현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파도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이번에는 백희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저를 도와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설마 제자를 두명이나 맡기시고서 계속 일을 안 하지는 않으시겠죠?"
"…인력 충원해."
"전하. 위에서 결정이 안나면 충원해봤자 소용 없습니다."
제파도의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말에는 칼을 갈고 있었다. 백희는 제파도에게서 왕을 향한 '일 해! 제발 일하라고!' 라는 소리를 들은 듯 했다. 제파도의 말에 고개를 돌린 그래지한은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모양새였다. 백희는 왜 왕자 루크가 공부를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기 아버지를 빼다 박은 것이다.
그래지한의 대답이 없자 점점 진하게 미소짓는 제파도의 얼굴이 무서워질 무렵 백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루크 왕자도 잘 구슬려 보고요."
그러자 제파도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배키님!"
"하하. 제가 가릴 처지가 아니죠. 감사히 배우겠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하는게 좋을까요?"
"글쎄요. 제파도 선생님이 편하실 때…."
화기애애한 제파도와 백희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래지한은 무언가 떠올린 듯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잠깐. 수업시간은 나중에 잡도록 해라."
"네? 왜요?"
"공부방을 만들어 주겠다. 며칠동안 기다려."
그래지한의 말에 제파도와 백희는 머리속에 물음표를 띄었다.
***
방이 만들어질 동안 백희는 제파도에게 지구와 한국에 대해 설명했다. 제파도도 백희에게 파로와 로코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곤했다.
일주일 뒤, 드디어 그래지한이 말한 공부방이 완성되었다. 제파도는 백희에게 수업 시간을 알려주었고 백희는 수업시간이 되자 공부방으로 향했다.
"수능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또 공부라니……. 끄어어어."
백희는 이상한 목소리를 내며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공부방에 도착했다.
"이 나이에 글자를 배워야 하다니."
연신 절망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공부방 문을 연 백희는 방 안을 둘러보자 황당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게 뭐야?"
백희가 상상했던 공부방은 책상과 칠판 그리고 책장들로 꾸며져 면학 분위기를 절로 조장하는 정갈한 모양새였다.
그런데 그래지한이 일주일이나 시간을 들여 꾸며준 공부방 한 가운데에는 성인 두명이 실컷 굴러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커다랗고 화려한 침대가 놓여있었다. 침대 상단에 달려있는 레이스들을 바라보며 백희는 자신이 방을 잘못 들어왔나 싶었다. 고개를 갸웃 거리며 눈을 돌리니 작고 초라한 책상 두 개와 칠판 하나가 보였다. 책장은 보이지도 않았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마음을 다스리던 백희는 책상과 의자를 바라보았다. 책상의 높이는 같았으나 의자의 높이는 달랐다. 높이가 있는 의자는 10살 루크를 위함이었다.
"그보다, 침대 뭐냐 진짜."
백희는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 분위기가 공부하라고 만들어 준 것 같지는 않았다. 백희가 끙끙 거리며 그래지한의 의중을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
"밤새서 공부할 때 저기서 자라는 거구나."
백희는 전형적인 한국 고등학생들이 할만한 생각을 하며 혼자 납득했다.
그래지한은 꿍꿍이가 있었다.
10살 짜리 아이한테 밤 일을 하라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그래지한은 남들과 생각을 좀 달리해서 멀리 보기로 결정했다. 루크와 백희는 지금부터 이 공부방에서 공부를 할 것이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방안에 있는 침대에 대한 위화감을 느끼지 못 할 것이고 한해, 한해 루크가 나이를 먹으면서 밤일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래지한은 그 때를 위한 포석을 깔아둔 것이었다. 실로 이상한 일에만 머리를 쓰는 왕이었다.
그런 그래지한의 꿍꿍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백희는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그러자 얼마 안있어 발소리가 들리더니 로코의 3왕자, 10살 먹은 루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백희와 루크는 어색한 침묵을 만들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애기가 생긴건 귀여운데 성질머리가 좀.'
백희가 속으로 안타까운 탄식을 하며 루크를 바라보고 있을 때 루크가 입을 열었다.
"너 이세계인 이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