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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종의 다리
작가 : 밈밈밈
작품등록일 : 20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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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꿰다_9
작성일 : 17-06-19     조회 : 311     추천 : 0     분량 : 5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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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코의 왕들은 대대로 원예가 취미였다. 왜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그랬다. 심지어 혈육인 왕자들도, 왕들의 사랑을 받는 여인들도, 왕의 충직한 충신들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왕의 침실에는 항상 온갖 식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흡사 작은 밀림과도 같았다.

  대대로 내려온 로코 왕들의 침실은 어마어마하게 넓고 사방이 창문들로 둘러져 채광이 좋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침실 안에서 원예를 즐긴 결과 들어오는 빛은 극소량이었다. 식물들이 햇빛을 찾아 창가로 달라 붙었기 때문에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모든 귀족들은 그래지한이 왕위에 앉자 마자 선왕이 가꾸어 놓은 침실 안 모든 식물들을 없애 버릴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지한은 왕자시절 부터 원예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래지한도 로코의 왕이 되자 마치 식물과 사랑에라도 빠진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그래야만 했다.

 

  "내가 왜 원예를……."

 

  그래지한은 손에 쥔 헝겊으로 이파리를 닦아내며 중얼 거렸다. 그래지한은 선왕이자 아버지인 '얀 토르지아 로코'를 떠올렸다. 그래지한의 아버지 얀 또한 원예를 사랑하는 왕으로 로코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선왕을 따라 그래지한까지 원예를 하게 되자 로코의 안팎으로 여러 소문이 나돌았다.

 

  '로코 왕의 침실 안에 있는 식물들은 로코 왕을 암살로 부터 지켜준대!'

  '그래지한도 왕이 되자 원예를 즐기게 되다니. 아무도 모르는 귀한식물이라도 기르고 있는걸까?'

  '침실 안이 소규모 밀림같다며? 그 안에 뭔가 소중한 걸 숨기고 있는게 틀림없어!'

  '아니면 로코 왕가의 전통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래지한은 언제든지 암살 위협이 와도 상관 없으니 제대로 된 곳에서 편히 잠들고 싶었다. 어찌 보면 왕가의 전통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로코의 왕들은 그말을 들으면 고개를 저을 것이다. 로코의 왕들이 대대로 침실에 원예를 즐기는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였다.

 

  로코의 왕들은 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고 값어치 조차 매길 수 없는 '귀한 식물'을 기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소중한 물건'도 이 작은 밀림 안에 식물들과 한데 어울려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것들은 로코라는 성을 가진 한 남자가 지금의 로코의 수도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울 때 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똑똑.

  "전하. 재상께서 알현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때 시종장 마일드가 문을 두드리며 그래지한에게 알렸다. 왕비와 후궁들도 오지 못하는 왕의 침실에 시종장 마일드는 가까이 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알았다."

 

  왕은 '옳다구나!' 하며 바닥에 헝겊을 내팽개치고 침실을 나섰다.

 

 

 

 

  제파도는 알현실에서 그래지한과 독대했다.

  그래지한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호오~. 겨우 하루를 배웠는데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고?"

  "그렇습니다. 배운지 하루 밖에 안되어 아직 맞춤법은 정확하지 않으나 그것은 배키님에게 차차 배워 나가면 해결될 것입니다."

 

  제파도는 백희에게 단 하루 동안 한글을 배웠다. 제파도는 백희에게 배운 바로 그날 더듬더듬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자 충격으로 기절할 뻔 했다. 신이 빚어 놓은 글자였다. 제파도는 한글을 만든 이세계의 세종대왕님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보내며 당장에 '한글 배포 계획서' 를 작성해 그래지한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문자입니다. 전하. 백성들이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다면 로코에 대한 충성심이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음."

 

  그래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전쟁 동안 늘린 영토의 백성들은 기존의 백성들 보다 로코에 대한 충성도가 낮았다. 한글을 배포한다면 그 영토의 백성들도 로코인이라는 민족의식이 싹틀 수 있을 것이다.

 

  "제가 드린 '한글 배포 계획서' 를 보시면, 우선 제가 배키님에게 한글을 배워 익히고 정리한 후 교재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 저와 배키님이 선정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그들을 로코 각지로 보내 한글을 배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지한은 제파도의 계획을 단번에 찬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난세의 서쪽 대륙에서 글자를 배포한다는 것은 의심을 사기 딱 좋았다.

 

  "그러나 한글을 배포한다면 이세계인에 대한 다른나라의 의심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들이 눈치채고 배키를 노리면 어떻게 되겠느냐."

 

  갑자기 그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가 배포 된다면 여러 국가에서 로코에 이세계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파로는 이세계인의 가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세계인이 나타났다는 소문만 나도 파로 전체가 들썩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기에 전하께서 나서주셔야 합니다."

  "음? 내가?"

 

  제파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글을 읽지 못하는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 로코의 백성을 위한 글자를 만들겠다고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그 연구를 지휘하는 학자는 저를 지목해 주시면 됩니다."

  그래지한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음. 괜찮군. 하지만 오랜시간 연구하는 척 하도록 해라. 그래야 이세계인에 대한 의심이 없을것이다."

  "예. 배키님에게 한글을 배워 교재를 만들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릴것으로 사료됩니다. 천천히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지한은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한 그래지한은 제파도에게 이만 나가보라 말 하려고 했다. 그런데 제파도의 얼굴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미소를 보자 무언가 꺼림칙함을 느꼈다. 그래지한은 제파도가 짓는 미소의 대부분이 습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짓는 제파도의 미소는 습관적인 미소가 아니었다.

  그래지한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제파도를 쳐다보았다.

 

  "잠깐. 이 모든걸 진행하기 위해서는 대전제가 필요한데?"

 

  그러자 제파도가 씨익 웃었다.

 

  "그렇습니다. 저의 재상 은퇴가 전제 되어야 겠지요."

 

  제파도는 항상 재상 자리의 은퇴를 꿈꾸어왔다. 겨우 5년 동안 이 자리에서 일했지만 일이 너무 많아 항상 과로를 하곤 했던 것이다. 봉급도 많이주고 심지어 작위도 올랐지만 으스러지는 건강 앞에서 다 필요 없었다. 제파도는 종종 일을 하다가 아무도 모르게 과로사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지한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다.

  제파도는 그래지한이 왕위에 앉은 후 우연히 찾은 최고의 일꾼이었다. 제파도 전에 있던 재상도 일을 잘하긴 했지만 그는 나이가 들어 은퇴하기를 원하기도 했고, 일처리가 신중하나 그만큼 속도가 느렸다. 반면 젊고 팔팔한 제파도는 속전속결에 정확한 솜씨로 일을 처리했다. 그 때문에 그래지한은 제파도를 믿고 놀 수 있었다.

 

  "불허한다."

  "허해주십시오. 세가지 일은 못합니다."

  "왜 세가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불허한다."

  "첫번째는 재상으로서의 일, 두번째는 루크 왕자저하와 배키님의 스승으로서의 일, 세번째는 한글 배포를 위한 학자로서의 일 입니다. 이 세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 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래지한은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제파도의 말이 너무나 타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지한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허하도록 하겠다. 단."

 

  제파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려던 순간 그래지한은 말을 덧 붙였다.

 

  "은퇴는 6개월 뒤. 그 후 3년간 잠정은퇴라는 조건으로 허한다."

 

  그래지한은 자신에게 6개월 동안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제파도가 재상직에 위임했던 순간부터 야금야금 놀았던 터라 다시 일을 하기 위한 적응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파도의 얼굴은 볼 만했다. 마치 모든 절망들이 그를 강타한 것 같았다. 6개월 뒤 은퇴라는 점은 상관 없었으나 3년간의 잠정은퇴는 '열심히 한글 배포에 힘쓴 후 다시 내 뒷바라지를 해라.' 라는 그래지한의 뻔한 속마음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찼다.

 

 

 

 

  백희는 그래지한이 만들어 준 이상한 공부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백희는 매일 제파도의 수업을 마친 후 다른 수업을 하나 더 들어야 했다. 깐깐하게 생긴 중년 여선생의 '여자로서의 덕목.'이라는 수업이었는데 여간 짜증나는게 아니었다.

 

  '여자는 소리내어 걷지 말아야 하고 웃을 때도 큰 소리로 웃지 말하야하며, 정 웃고 싶을 때는 입을 가려서 웃도록 하고, 가족이 아닌 다른 사내에게는 눈을 마주쳐서는 아니되며…등등.'

 

  백희는 이 모든것을 들을 때 마다 기도 차지 않았다. 저 불합리한 '여자의 덕목'을 배울 생각이 일절 들지 않았다. 백희의 생각 같아서는 이 곳 여자들이 당하고 있는 불평등에 대해 동네방네 일장 연설을 하고 다니며 여자들을 깨우치고 싶었다.

  하지만 백희는 이 곳 파로에서 이상한 위치의 사람이다. 파로인이 아니라 지구인이었다. 백희는 완벽한 이방인이다.

 

  '……이방인인것은 상관 없어. 그냥 집에 돌아가고 싶어.'

 

  백희는 우울한 표정으로 공부방의 책상에 앉았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아 방 안은 조용했다. 창 밖을 바라보니 백희의 마음과 달리 파란 하늘 위로 햇빛이 쨍하고 떠 있었다.

  그 때 제파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배키님."

  "안녕하세요. 제파도 선생님."

 

  제파도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재상으로서 일 하면서 백희와 루크를 가르치고 있는 제파도였다. 두 가지 일로 워낙 바빠 한글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지만 제파도는 시간만 나면 백희에게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백희가 제파도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좀 쉬시는게 어떠세요?"

  "아닙니다. 제가 맡은 일은 책임지고 해야지요. 그나저나 루크님은 오늘 '또' 안 오셨나요?"

 

  유난히 한 글자에 힘을 주고 말하는 제파도였다.

  루크는 백희와의 수업 첫날 자신의 책상을 두 주먹으로 치고 나간 후 일주일이 넘도록 수업을 오지 않고 있었다. 그런 루크에 대한 제파도의 인내심도 바닥을 쳤는지 제파도는 무서운 미소를 지으며 백희에게 말했다.

 

  "배키님?"

  "네?"

  "기억하시나요? 배키님이 루크 왕자님을 잘 구슬려서 수업을 듣게하겠다던 약속을요?"

 

  백희는 몸을 움찔 하고 떨었다. 분명 그런 말을 하긴 했다. 하지만 백희는 루크가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좋았기에 굳이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런 백희를 제파도가 한기어린 미소를 띄우며 일깨운 것이다.

  백희는 시인했다.

 

  "…기억납니다."

  "그럼 어서가서 루크님을 데리고 와주셔야겠지요? 아마 왕실 전용 훈련장에서 검술 훈련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네에……."

 

  백희는 제파도의 성화에 말을 늘이며 대답했다. 밍기적 거리던 백희는 제파도의 다크써클 낀 서슬퍼런 눈이 번뜩이자 서둘러 공부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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