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훈련장에 도착하니 눈을 가늘게 뜬 루크가 백희를 반겼다.
"네가 여긴 왜 온거야?"
그 말을 듣자 위니는 백희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니는 무례한 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백희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괜시리 따끔거리는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백희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오, 밤을 닮은 레이디. 절 보기 위해 이렇게 오셨군요! 뒤에 꽃 같은 레이디들도 어서 오세요."
매력적인 미소를 띄우며 백희를 열렬히 환영하는 유루린이었다.
유루린은 왕실 기사단 제11사단의 단장이면서 루크의 검술 스승이다. 그는 매일 루크의 검술을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실 훈련장에 자주 있었다. 물론 기사 훈련장이 바로 옆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유루린은 훈련을 하지 않는다. 로코의 기사들은 그런 유루린을 보며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검술을 구사하고, 어째서 아무도 당해내는 자가 없는지 단체로 패닉에 빠지곤 했다. 그 어느 누구도 유루린이 혼자 수련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백희는 유루린을 보며 솔직한 감상을 내렸다.
'잘생겼다. 몸도 완전 좋아.'
유루린의 얼굴도 물론 잘생겼지만 몸은 그야말로 신이 공들여 깎아 놓은 최고의 걸작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구릿빛 피부, 육감적인 근육들이 걸을 때 마다 탄력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백희로 하여금 야릇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벗겨놓고 여러 포즈를 주문하며 그림 그리고 싶다.'
미대를 진학하고자 했던 백희는 유루린을 보며 누드크로키를 하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그는 최고의 누드 모델감이었다. 물론 옷에 감춰져 있어 아쉬움이 컸지만 드러나 있는 팔뚝과 상의에 밀착되어 유난히 돋보이는 가슴 근육은 유루린의 맨 몸을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백희는 왜 이제서야 유루린의 외형을 제대로 훑어 봤는지 후회를 하며 유루린에게 인사했다. 그러면서 유루린의 눈동자를 자세히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유루린. 전 강… 아니, 백희 에시카르 라고 합니다. 저번에는 미안했어요. "
백희는 서둘러 가짜 신분을 댔다. 유루린의 눈동자 색은 노란색이었으나 동공은 그 때와 달리 동그란 인간의 것이었다. 백희는 자신이 잘못 보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백희를 바라보는 유루린은 뭇 여성들을 설레게 만드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리고 동굴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레이디의 이름이 배키였군요. 이름도 아름답습니다. 밤을 닮은 레이디의 환한 미소가 온몸에 힘을 빠져나가게 만드는군요. 저 유루린, 이 자리에서 주저 앉아 버릴 것 같습니다."
백희와 뒤에 있던 시녀들이 얼굴을 붉혔다. 여자라면 이 말을 듣고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물론 백희의 온몸에는 소름도 함께 돋아났다. 동시에 이 곳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지는 백희였다.
그때 루크의 골이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왜 왔냐니까? 게다가 계집이 그 꼴은 또 뭐냐?"
그제서야 루크의 존재를 느낀 백희는 쏫아오르는 살심을 누르며 루크에게 입을 열었다.
"나도 운동 좀 해보려고요."
"뭐? 계집이?"
"그래서 남성복을 입고 계신 거군요. 그런데 웃옷의 형태는 처음 봤습니다."
유루린의 말에 속으로 뜨끔한 백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하, 하하. 그게 제단사께서 혁신적인 의상을 실험해 보고 계시더라구요."
"흥. 알게 뭐냐. 계집이 그런 옷을 입는건 말도 안된다. 더불어 계집 주제에 운동을 한다는 것은 말 할것도 없다. 당장 돌아가라."
오늘 따라 유난히 날카로운 루크를 보며 백희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백희는 루크가 계집, 계집거리는 것에 대해 이제부터 본격적인 대응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자꾸 계집이라고 할래? 요? 꼬맹아?"
백희의 말이 제대로 먹혔는지 루크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의 모습을 눈을 반짝이며 흥미롭게 바라보는 유루린과 얼굴을 흙빛으로 만든 시녀들의 대조는 볼 만했다.
"뭐라! 꼬맹이라고 하지마!"
"싫~은데. 자꾸 계집이라고 하면 나도 똑같이 꼬맹이라고 할거지롱~요."
"이익!"
루크가 분하고 원통하다는 얼굴로 백희를 째려보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 보며 혀를 내밀어 보이는 백희였다. 그러자 루크는 폭발할 것 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이! 못생기고 멍청하고 바보같은 계집!"
"하하하, 그럼 루크 왕자님은 꼬마 중에 꼬마, 상꼬마!"
백희의 말에 루크는 정신이 혼미해 지는 것을 느꼈다. 시녀들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는지 백희의 뒤에서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유루린이 웃으며 제재를 하고 나섰다.
"하하. 재미있군요. 하지만 이 쯤 하도록 하지요."
"그럴까요, 그럼."
유루린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백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이디께서 운동을 하고자 오셨다고요?"
"네. 루크왕자가 검술을 배운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어릴 때 부터 검도 배워보고 싶었거든요."
그 말을 들은 루크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래봤자 어린아이의 목소리였기에 커다란 위협은 느낄 수 없었다.
"계집이 검을 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맨날 앉아서 공부만 하니까 몸도 찌뿌듯하고."
"그렇군요."
백희와 유루린이 자신을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자 몹시 분한 루크였다. 루크가 빨개진 얼굴로 분을 삭히고 있을 때 유루린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백희를 내려다 보았다. 백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루린을 올려다 보았다.
유루린이 입을 열었다.
"저는 레이디가 검을 들기엔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유루린의 말에 루크는 활짝 웃었고 백희는 울상을 지었다. 루크는 역시 그럼 그렇지 하며 유루린을 보고 조그마한 얼굴을 끄덕였다. 마치 상사가 부하직원을 자랑스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반면 백희는 골이 난 얼굴로 유루린을 쏘아보며 말했다.
"아니, 어째서, 왜요? 제가 여자라서요?"
한국에서는 남녀 불문하고 자신이 원한다면 검도를 배울 수 있다. 그런 세상에서 살다 온 백희에게 이곳 사람들의 불평등은 이해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유루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게 아닙니다, 레이디. 그나저나 인상을 찌푸려도 귀여우시군요."
백희는 갑자기 치고들어온 유루린의 말에 순식간에 얼굴이 풀어졌다. 표정이 헤- 하고 풀어졌다가 얼른 정신차리며 다시 유루린을 쳐다보았지만 이미 눈빛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럼 뭐 때문인데요?"
"첫번째로 레이디께서 들기에 검이 무거울 거라 생각 됩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엑?"
유루린은 자신의 왼쪽 허리에 달랑달랑 걸어 놓았던 검을 검집 채 백희에게 건네 주었다. 얼떨결에 검을 받아들게 된 백희는 순식간에 팔이 바닥으로 끌어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보다 무거운 검 때문에 백희는 당황한 얼굴로 유루린을 쳐다보았다. 유루린은 그 모습을 보고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며 백희에게서 다시 검을 가져갔다.
당황한 백희가 말했다.
"생각 보다 무겁네요. 하지만 전 목검이나 이런걸로 훈련 하는 줄 알았는데……."
"물론 처음에는 목검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진검을 사용해야 하지요. 물론 제 검은 저에게 맞추어진 것이라 다른 기사들의 검보다 무겁습니다. 그리고 가녀린 레이디들이 휘두르기 좋은 가벼운 검도 있습니다만, 글쎄요."
유루린의 말을 듣자 백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백희는 그저 검술을 운동의 한가지로, 자기 자신의 건강을 위해 배우려고만했지 적을 쓰러뜨리는 것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당황한 표정의 백희를 내려다보며 유루린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두번째로 마음이 꽃 보다 여린 레이디께서 적에게 검을 겨눌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백희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 곳에서 검을 배운다는 것은 스포츠가 아니었다. 생과 사를 오가는 전투술을 배운다는 의미였다. 백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자 유루린은 괜찮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는 레이디께서 적을 대적 할 만한 수단을 익혀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백희는 희망 찬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루크는 말도 안된다는 얼굴을 하며 유루린에게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유루린? 저 녀석은 계집이잖아!"
"하하. 저 유루린은 레이디께서 혹시 모를 위협을 당하면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플 것 같습니다. 루크님은 안그러시나요?"
"당연하지!"
당당한 외침에 백희의 눈이 찢어져라 루크를 쏘아보았다.
'저 건방진 꼬맹이 녀석을 확 그냥! 내 언젠가 기필코 꿀밤 한대 먹이고 만다.'
백희의 마음속이 이글이글 거리고 있을 때 유루린은 슬프다는 표정과 과장 된 손짓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짚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상상만 해도 너무나 슬픕니다. 레이디의 깨끗한 얼굴에 손톱만한 상처가 나도 눈물이 날것 같습니다. 그녀에게 날 수 있는 상처라곤 꽃을 꺾다가 난 작은 생채기 정도로 저는 족합니다."
백희는 붉어진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유루린의 말을 끊었다.
"아, 알았어요. 그렇다면 저에게 다른 무술을 가르쳐 주실 생각인가요?"
그러자 유루린이 기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제가 레이디를 가르쳐도 되겠습니까?"
"저야 감사하죠."
그러자 루크가 자신의 팔을 방방 휘두르며 재빨리 끼어들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절대 안돼! 절대!"
루크의 격정적인 반대의 몸짓에 백희는 얘가 왜이러나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루크는 조금 초조한 듯한 얼굴로 유루린을 바라보았다.
루크가 반대하는 이유는 남들한테는 별거 아닌 이유였다. 함께 제파도의 수업을 듣는 백희의 글자공부가 점점 루크를 따라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희는 자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공부를 배워 나갔다. 초조했던 루크는 공부를 평소보다 열심히 해서 겨우 백희보다 앞서 나가고 있었다. 만약 무술 마저 백희가 자신을 따라잡으려 한다면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가 날 것이 분명했다.
그런 루크의 심리 상태를 모르는 유루린과 백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루크를 내려다 보았다. 유루린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루크에게 물었다.
"루크님 께서는 어째서 레이디가 무술을 배우는 것을 반대하시는 겁니까?"
루크는 우물쭈물하게 대답했다.
"……그냥, 계집이잖아."
"헛."
그 말을 들은 백희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이 곳이 남녀 차별이 있는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고작 10살인 루크가 저 정도로 여자를 차별한다면 성인들은 얼마나 심할지 감도 안 잡혔다. 그때 유루린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루크님.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레이디께서는 배우고 싶어하고 저도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상관없지 않습니까?"
오랜만에 듣는 유루린의 엄격한 목소리에 루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유루린은 다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는 루크님께서 커다란 남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작 그런 이유 하나로 배우고자하는 사람을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루크가 갑자기 얼굴을 힘차게 들어올렸다. 시무룩했던 얼굴이 어느새 희망에 찬 얼굴로 변해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기쁨이 묻어나 있는 높은 톤의 목소리로 루크가 커다랗게 외쳤다.
"그래! 난 커다란 남자가 될거니까!"
유루린이 말한 '커다란'과 루크가 떠올린 '커다란'의 의미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본 유루린은 귀엽다는 듯이 루크의 머리를 헤집어 놓았다. 유루린은 루크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백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루크를 쳐다보았다.
'애는 애구만.'
백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